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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dGen's story
엘리바스는 계속해서 욥을 위로한다. 욥이 하나님의 훈계를 받아들이면 하나님께서 이 모든 재앙을 복으로 바꿔주실 것이라고 하며, 그 모든 것들을 자기들의 경험으로 고찰해 보았으니 틀림없는 말이라고 주장한다. 인간은 유한하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과 지혜 또한 유한하다. 나의 경험과 지식에 의지하여 하는 말이 늘 옳을 수 없다. 언제나 자신의 말이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하고 다른 사람의 말을 받아들일 수 있는 유연성을 지녀야 한다. 타인이 하는 말이 아무리 겉보기에 그럴싸해이는 말이라 하더라도 그도 틀린 말로 나를 위로하는 것일 수 있다. 위로를 사람에게 얻으려 하지말고 하나님께 위로를 구하자.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고난을 당하고 있는 욥을 보고 마침내 입을 연다. 그는 욥에게 그의 죄와 불의함 때문에 이러한 고난이 임한다며 욥에게 회개할 것을 권한다. 하지만, 욥은 자신의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께 벌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물론 욥에게도 죄가 있었겠지만, 그가 받고 있는 고난은 그러한 죄의 댓가가 아니다. 욥에게 고난 그 자체만으로도 삶을 버텨나가는 것이 힘들진데, 저런 비난은 욥의 마음을 얼마나 갈기갈기 찢어놓을까. 과연 엘리바스가 욥을 위한다는 저 소리가 욥에게 위안이 될까? 욥이 저 소리를 통해서 도움을 얻을까? 이 세상에도 엘리바스와 같은 사람들이 넘쳐난다. 그들은 제 딴엔 남들을 위한다고 이런 저런 조언을 해대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고난 당하고 있는 자들의 마음을 후벼파는 소리다...
고통 속의 욥. 죽기를 바랬던 욥.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차라리 갓난아기일때 죽었더라면, 나았을 거라고 말하는 욥. 그의 고통을 나는 안다. 나 또한 生卽苦라고 느끼며 살아왔다. 하나님의 긍휼만이 나를 살린다. 조용히 읇조린다. 주님...
어느 날 갑자기, 욥은 그의 소와 나귀, 양떼, 종, 아들, 딸들을 모두 잃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죄를 짓지 않고 하나님을 찬양했다. 우리는 우리가 겪는 상황과 환경으로 인해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할 때가 있다. 때때로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우리는 마음이 찢어지고 원망할 대상을 찾는다. 욥은 믿음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는 하나님을 섬기고 따르는 중에, 이런 일을 당하고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하나님은 기복의 대상이 아니었고, 오로지 찬양과 경배의 대상이었다. 그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이유는, 그가 자신에게 부와 건강과 다산을 허락하셨기 때문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그의 생명의 주인이었고, 만물의 창조주 였다. 나는 부지불식간에 하나님을 기복의 대상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고 정오부터 오후3시까지 어둠이 온 땅을 덮었다. 성소의 휘장 한 가운데가 찢어졌다. 예수님은 큰 소리로, "아버지여, 제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맡깁니다."라고 하시고 숨을 거두셨다. 백부장은 그 모습을 보고, "이분은 참으로 의로운 분이셨다."고 말했다. 요셉이라는 유대 공의회 회원이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해서, 삼베로 잘 싼 다음 바위 무덤에 모셨다. 예수님을 따라왔던 여인들이 요셉을 따라가 예수님의 시신이 어떻게 안장됐는지를 보고 각자 집으로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준비하고 안식일에 쉬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 성소의 휘장이 찢어졌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유대교의 제사와 형식, 율법의 폐기를 의미하는 것일까? 예전 유대인들의 제사 풍습..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다. 예수님의 좌우편에도 죄수가 못박혔다.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매다는 자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다.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던 백성과 군인, 그리고 십자가에 달린 죄수 중 하나는 예수님을 조롱했다. 다른 죄수 하나는 예수님께 자신을 기억해달라고 했다. 예수님은 그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라고 하셨다. 유대인들은 그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았다.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우리에 대한 구원사역을 완성하셨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조롱에도 개의치 않으셨다. ... 지금 읽고 있는 책으로 인해, 묵상이 잘 되지 않는다. 머릿속이 혼란스럽다. 예수님에 대한 내가 갖고 있는 이미지가 조작된 것이라..
예수님이 끌고가던 십자가를 구레네 사람 시몬이 대신 지고 예수님을 뒤따라가게 했다. 많은 사람들과 여인들이 예수님을 뒤따라가며 슬퍼했으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나로 인해 슬퍼하지 말고, 너희 자신과 자녀들을 위해 울라'고 말씀하셨다. 십자가의 도를 모르는 자들에게는 십자가의 고난보다 더 힘든 심판과 멸망이 기다리고 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 자신을 위해 울라고 말씀하셨다. 자기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은 하나님의 아비된 마음은 어떨까? 그리고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님의 마음은 또 어떨까? 태어난 것만 못한 인생이 되어서야 되겠는가? 우리의 삶이 하나님과의 교제속에서 사랑을 느끼고 행복함을 느끼는 인생이 되어야지, 죽음보다 못한 인생이 되어 죽는 것이 차라리 낫겠다고 고백하는 삶이 되어서야 되..
빌라도는 예수에게서 유대인들이 요구하는 죗가를 치를 만한 죄를 찾았으나,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세번이나 풀어주겠다고 공포했다. 그러나 대중은 빌라도가 그렇게 할 때마다 큰 소리로 "예수를 없애라! 그리고 바라바를 대신 풀어주라!"고 외쳤다. 그리하여 결국 빌라도는 대중의 요구대로 바라바를 풀어주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도록 허락했다. 옳은 일과 그른 일, 하고 싶은 일과 해야만 하는 일, 사람들이 요구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것. 이런 일들 사이에서 우리는 고민하고 선택하고 우리의 삶을 결정짓는다. 우리의 선택은 얼마나 비합리적이고 불공정하며 즉흥적일 때가 많은가? 나의 선택과 행동의 기준은 무엇인가? 대중이 원한다고 반드시 옳은 것이 아니다. 거기엔 인기와 지지와 명예와 권력이 있는 달..
제자들 사이에서 누가 높은가를 두고 다툼이 벌어지자, 예수님께서는 큰 사람은 어린 사람이 되어야 하고 다스리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높은 곳에 있는 사람이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낮은 곳에서 섬기는 자가 다스리는 자'라는 주님의 말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낮은 곳에서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남들을 섬기는 자라야, 그들을 변화시킬 수 있다. 높은 곳에서 이것저것 명령만 하는 자는 더 이상 권력자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 말씀이 이 세상 가운데서 효력을 나타내게 된 데 2천년이 걸렸다. 지난 20세기동안 권력은 위로부터 나왔으며, 중앙집권적이었다. 그러나, 곧 세상은 변할 것이다. 이제는 수평적 권력이 세상을 바꾸어 놓을 것이다. 새로운 시대의 도래가 눈앞에 다가왔다. 어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다락방에 들어가 유월절 음식을 나누었다. 그리고, 빵을 본인의 몸으로, 잔을 본인의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라고 말씀하셨다. 빵 - 누룩없는 빵 누룩 없는 빵 = 순전하고 진실함(고전5:8) 누룩 = 죄(고전5:6-8), 외식(눅12:1),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그들의 교훈(마16:12) 유월절의 무교병은 순결하고 깨끗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한다. 유월절의 첫날 누룩을 집에서 제하고 일곱째 날까지 그것을 유지하라고 하였다(출12:15). 우리는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고 오직 누룩 없는 순전함과 진실함의 모습으로 주님께 나아가야 한다(고전5:6-8). 우리는 무교병인 예수 그리스도를 먹어야 한다. 예수께서 내 속에 살아계시고 그가 내 살과 뼈가 되어야 한다. 성찬식에서 우..
유월절이 다가올 때에, 대제사장들, 서기관들(율법학자들), 그리고 유다가 함께 작당하여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궁리하였다. 유월절이 이른 날, 예수님은 베드로와 요한에게 그들이 먹을 자리를 예비하라고 하셨는데, 물 한 동이를 메고 가는 자의 뒤를 따라가 그에게 다락을 요구할 것을 명하셨고, 제자들은 그리했다. 유월절은 모세가 출애굽하던 시기에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로 인도해 낸 가장 큰 사건을 기념하는 날이다. 이집트에 내린 열 가지 재앙 중 마지막 장자의 죽음이 임하기 전,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모든 이스라엘의 가정, 문설주에 흠 없고, 일년된 수양의 피를 바르도록 지시하셨고 문설주에 피가 발린 집만 재앙을 피할 수 있었고 그 이외 모든 집은 장자의 죽음을 맞았다. 예수님은 친히 유월절의 어린 양이 되..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인하여, 우리를 박해하고 감옥에 가둘 것이다. 그러나 그런 핍박의 때가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고, 그 때 예수님은 우리에게 적대자들이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구변과 지혜를 주시겠다고 하신다. 그러한 핍박을 참고 견디면 우리 영혼을 보존할 수 있게 된다. 그러한 일들 후에 전쟁과 기근, 지진, 역병, 하늘의 징조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나는 살면서 예수님 때문에 핍박당한 적이 있는가? 없다. 왜 없는가? 내가 그리스도의 도를 전하지 않았기 때문인가? 왜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름때문에 우리를 핍박할 것인가? 그리스도의 도가 세상의 규율과 법칙에 반하기 때문인가? 내 안에 남들에게 전할 수 있는 살아있는 그리스도의 도가..
시편 110;1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임과 동시에, 다윗의 주Lord이시다. 흡사 뫼비우스의 띠와 같이 그것은 안이면서, 밖이 되는 현실이다.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므로 다윗의 주가 아니다, 라고 말할 수 있고, 또 다른 이들은 그리스도가 다윗의 주시므로, 다윗의 자손이 아니다 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임과 동시에, 다윗의 주시다. 우리는 종종 머리로 이해되어지지 않는 상황을 맞닥뜨리게 된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가 그러할 때가 많다. 우리의 머리로 이해되어 지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거나, 부정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아직 우리의 지식 체계..
부활이 없다고 믿는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와서 물었다. "한 여인이 일곱 남자와 결혼하고 죽으면 그는 누구의 아내입니까?" 예수님은 대답하셨다. "부활한 사람들은 시집도 장가도 가지 않는다. 너희는 부활이 없다고 믿으나, 하나님께서는 떨기나무 안에서 모세에게 자신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부활 신앙을 가지고 있다. 나는 그 부활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모습인지 알지 못하나, 부활에 소망을 두고 인생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부활 후 우리의 모습은 지금의 삶의 굴레를 그대로 지고 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서 있을 것이다. 나는, 또한 우리는 죽은 후에도 살아 있을 것..
율법학자들과 대제사장들은 예수님을 잡고 싶었으나, 백성이 두려워 로마 총독의 치리권과 사법권에 넘기려 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 아첨하며 의인인 척 접근하여,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것이 옳은지 그른지를 물었다. 예수님은 그들의 속셈을 알아채시고,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돌려드리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듣기 좋은 말을 하며 접근하는 사람들의 겉모습에 속지 않으시고, 그들의 간계를 파악하셨다. 사람의 겉모습만 가지고 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특히나, 아첨하는 말, 듣기좋은 말에 스스로 취하지 않도록 주의하고, 자고하지 않도록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한다. 모든 것은 주인에게로 돌아가야한다.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신 시간과 물질, 정력은 다시 주님께 돌려드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도착하시고 성을 보시고 우셨다. 그리고, 평화를 가져다 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네가 멸망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네게 찾아온 때를 모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 예루살렘은 그리스도의 초림을 눈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었지만, 정작 예수님께서 그 땅에서 사역하실 때 그를 십자가에 못박고 말았다. 그들은 여전히, 메시아의 초림을 기다리며 살아가고 있다. 눈뜬 장님과 같이 그들을 구원할 하나님의 손길을 단칼에 잘라버리고 말았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후, 휘장이 갈라지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막힌 담은 허물어졌다. 이제는 하나님의 때가 따로 있지 않다. 하나님은, 늘 나와 함께 하시고, 어느 곳에나 함께 하시며, 내 안과 밖에 충만히 존재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실 때, 두 제자를 먼저 보내어 아무도 타지 않은 나귀 새끼를 끌고오라고 명하신다. 두 제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걸쳐 놓고 예수님을 태우고, 가실 때에 그 제자들은 자신들의 겉옷을 길에 펼친다. 겉옷은 자신의 신분과 사회적 지위을 나타낼 수 있는 도구다. 그리고 겉옷은 신체를 보호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도구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겉옷을 벗어서 나귀위에 안장처럼 걸쳐 놓았고, 나귀가 가는 길에 레드카펫처럼 깔아놓았다. 예수님께서 왕으로 오시는 그 때(지금)는, 나의 신분, 나의 사회적 지위, 나의 보호막을 모두 벗어 놓고,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 만이 왕의 자리를 차지하실 수 있도록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 내가, 나의 신분..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셨다. 귀인이 왕위를 받기 위해 타국에 가면서 종들에게 1므나(=100드라크마=약1000만원?)를 맡겼다. 귀국 후, 왕은 종들에게 맡긴 돈이 어떻게 되었나를 물어보았다. 그 중 어떤 이는 10므나, 어떤 이는 5므나를 남겼으나, 어떤 이는 맡긴 돈 그대로를 들고 있었다. 왕은 1므나 가진 종의 돈을 빼앗아, 열배로 불린 종에게 주고, 자신이 왕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던 원수들을 끌어내어 죽였다. 이 귀인이 각 종에게 맡긴 돈은 무엇을 비유하는 것일까? 이 구절의 바로 앞의 내용은 삭개오가 예수님을 맞이하는 장면이다. 여기서 예수님은 잃어버린 영혼을 찾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고 말씀하신다. 귀인이 종에게 맡긴 돈은, 복음에 대한 비유가 아닐까? 우리는 각자 하나님의 복음을 들은-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