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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dGen's story
우리가 일반적으로 의식을 이야기할 때 뇌손상을 받아 식물상태가 된 사람에게는 의식이 없다고 한다. 또한 뇌의 일부분이 손상되면 특정 감각을 느낄 수 없거나 기억의 일부분이 소실되거나 정상적인 논리과정을 수행하지 못하게 된다. 이런 것들을 종합해보면 우리의 의식은 뇌에 기반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뇌의 활동은 신경의 전기적/화학적 활동에 의한다. 그렇다면 컴퓨터에도 의식이 있는가?
토론이나 논쟁의 목적은 승리가 아닌 진보가 되어야 한다. ※ 성숙한 토론을 하는 방법.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 다른 정치적 지향점과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는 것은 같은 사건을 보더라도 그 해석이 다르고 서로가 가지고 있는 도덕적 잣대가 다르기 때문이다. 토론자로서 가장 나쁜 자세는, 나의 해석만이 옳은 해석이라고 믿는 태도와, 상대가 가지고 있는 도덕적 잣대를 무가치하다고 폄훼하는 것이다. 나와 다른 해석에 대해 비아냥거리고 조롱을 하는 것은 성숙하지 못하고 올바른 토론을 방해하는 요소다. 그렇게 해서 일종의 배설적 쾌감을 느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토론으로서는 전혀 가치가 없다. 이 글을 쓰기 위해 많은 시간 고민을 하면서 내가 과거에 왜 그토록 토론을 하면서 분노했는지 알게 되었고 그런 나의 모습에 부..
문재인 정권 들어서고나서 언론이 민주당에 장악당했다는 사람이 있던데, 지금 조국 관련 기사가 1400개 정도 나왔다고 한다. 대선에서 후보자 검증할 때도 이 정도로 기사 안나온다. 이런데도 정부가 언론을 장악하고 통제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나? ㅎㅎㅎ 웃긴다, 그저.
지지하는 정당을 결정하는데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요인을 꼽으라면, 도덕성과 경제성과를 들 수 있다. 자한당은 경제성과를, 민주당은 도덕성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걸고 그 지지자들을 모았다. 그리고 자한당은 민주당을 향해 실력도 없는 바보멍청이라고 욕하고, 민주당은 자한당을 향해 양심도 없는 탐욕덩어리라고 말한다. 과연 그들의 말처럼 자신들은 100점, 상대는 0점짜리인가? 나는 도덕성에 있어서 민주당과 자한당에 각각 40점, 30점을 주고 싶다. 그리고 경제성과에 있어서는 60점, 70점(그나마 박정희 대통령 시절을 포함해서)을 주고 싶다. 실제로 두 당은 경제성과나 도덕성에 있어서 크게 차이가 나는 정당이 아니다. 하지만 그 지지자들은 두 당이 완전히 다른 정당이고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덕목에 있어 상대정..
조국이 불법을 저지른 것도 아닌데 무슨 문제가 있냐고 주장하시는 분들은 자한당 의원들을 (불법이 아닌)외압의 정황이 보일 때 비판하지 않았었는지 생각해 봤음 좋겠다. 마찬가지로 자한당 의원들의 자녀 채용비리나 입학특례 의혹이 불거졌을 때 그걸 괜찮다고 생각하신 분들이 조국의 딸 문제에 대해서는 비판하는 것이 일관성 있는 판단인지 생각해 봤음 좋겠다. 정치인들의 내로남불이야 하루 이틀 일은 아니지만, 국민들의 수준은 좀 더 높아져야 하지 않겠나. 정치의 수준은 그 나라의 국민들 수준을 그대로 반영한다.
신을 섬겨온 시절, 우리는 같은 신을 섬기며 같은 경전을 읽으며 같은 율법을 지켰지. 그렇게 사는 곳이 달랐던 너와 나였지만 우리는 하나로 뭉쳤어. 시간이 흐르고 우리는 신이 되었어. 계급은 하나 둘 무너져내리고 서로를 평등하다 믿었어. 누구에게나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고 믿었고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는 것이 옳다 생각했어. 또 다시 시간이 흐르자 신의 자리를 돈에게 내어주었어. 돈이란 마음대로 찍어낼 수 있는 것이지만 우리는 그것이 자연속에 존재했던 것인냥 우리를 원래 지배했던 것인냥 믿고 따르기 시작했지. 지금은 알아, 신도, 자유평등박애도, 돈도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지만 우리가 서로 믿기로 한 이야기일 뿐이란걸. 이 모든 것이 거짓이라해도 우리는 이 거짓에 의탁해 살아온 인생살이라 쉽게 부인할 수 ..
나도 빨갱이 혐오와 친일혐오 둘 다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공산주의를 지지할 수도 있고, 일본을 찬양할 수도 있다. 현 정부를 비판할 수도 있는 건 물론이고. 하지만, 친일을 혐오하는 현상에 대해 비판하고 몸서리쳐 하면서 지난날 공산주의를 혐오해왔던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한다면 제 눈의 들보를 보지 못한 채 남의 눈의 티만 찾는 격이다. 이제는 좀 성숙해져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나는 복지에 대해 호의적인 편이다. 하지만 가난한 이를 위한 원조가 어떻게 쓰이는 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다. 복지는 가난한 이들을 부유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비생산적인 사람들을 생산적인 사람으로 만드는 데 사용되어야 한다. 교육을 받지 못한 이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주고, 아픈 사람들에게 회복의 기회를 주고, 의지가 꺾인 사람들에게 의지를 심어주는데 복지가 사용되어야 한다. 단순히, 가난한 이들을 부유하게(또는 덜 가난하게) 만드는 것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그 국가의 복지정책은 망하는 길로 가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인간이 각자의 능력에 따라 임금의 격차가 다르고 노력 여하에 따라 벌어들이는 수입이 생기는 것을 막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고 불공정의 해소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사람은 각자 자신의 능력과 역할에 따라 다른 수입을 가질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무분별하게 재화가 나눠지는 것을 방치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근본적으로 합리적인 분배가 이루어지게 하기 위해서는 운동장의 규칙을 바꾸는 것이 필요하다. 첫째로 토지의 사유화를 막아야 하고, 둘째로 화폐의 발행을 통제해야 한다. 토지의 사유화를 허용한 상태에서 부가가치의 상승을 거기에 기여한 대로 나누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한 유효통화량이 제멋대로 늘어나는 상태에서도 부의 부적절한 쏠림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막을수는 없다. 이 두가지 문제가 선결되지 않으면, 경제성..
최근 피터 드러커의 저서를 읽으며 가장 크게 와닿았던 말은, 기업/조직/사업은 사회내에서 존재하며, 사회의 필요에 부응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사회의 필요를 위해 조직이 수단으로 존재하는 것이지, 조직 자체가 목표는 아니다. 그리고 흑자경영은 조직의 의무다. 아무리 좋은 일을 한다해도 경영의 잘못으로 인해 조직이 재정적으로 마이너스 성장을 하는 것은 사회에 손실을 끼치는 행위이다. 내가 속한 조직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우리 병원은 "서로 어울려살아가는 사회"를 위해 존재하고, 그것이 우리 병원의 소명이다. 성과가 중요한데, 병원내에서 내가 속한 내과는 어떤 성과를 좇아야 할 것인가?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성과는 무엇인가? 무엇을 기준으로 성과에 대한 평가를 할 것인가?
어제 월례회를 보면서 그동안 재활 참여자들을 몇년이나 봐왔지만, 내가 그들에 대해 정말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신경의 sensory와 motor가 모두 손상된 사람이 motor를 회복하기 위해 재활하는 과정에 sensory도 같이 살아나면서 엄청난 고통이 수반된다는 것을 어제 처음 알았다. 그리고 어떤 이들에게는 밥 한 숟가락 떠먹는 것이 그렇게 힘든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어제 비로소 깨달았다. 편견과 오해, 무지를 많이 극복하고 싶지만 아직 내게는 요원한 길이다. 더 많이 소통하고 겪고 부딪혀야 할 것 같다.
모두가 동의하는 당위명제란 존재하지 않는다. 선악과 옳고 그름의 판단은 시대와 환경에 따라 늘 변해왔다. 그래서 내가 당연히 옳다고 믿는 가치에 대해, 근원적인 질문, 왜 그래야 하는가? 라고 묻는 질문에는 속수무책, 아무런 답을 내놓을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아무런 가치관을 취사선택할 수 있는 기회조차 없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 중에 내가 옳다고 믿는 가치관을 따르고, 그것을 위해 목소리를 내고 투쟁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변호하고 옹호할 수 있다. 우리는 누구나 그렇게 하고 있다.
시민으로부터 폭력에 대한 권한을 이양받은 국가권력이 그 권력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다면, 그래서 시민들의 공분을 제대로 삭여주지 못한다면, 리바이어던에 의해 통제된 시민들의 폭력이 언제 튀어올라 무질서와 혼란을 초래하게 될지 모른다. 미투 운동으로 그동안 불편하고 무례하게 행해져 왔던 성추행과 언어폭력이 처벌받고 있는 시대에, 멀쩡한 여대생을 유인, 납치하여 폭행하고 마약투여, 강간하는 것도 모자라 신고하지 못하도록 불법 촬영한 영상으로 협박한 사안에 대해 ‘혐의없음’이라는 딱지로 돌려보내는 일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지나가는 여종업원의 엉덩이를 만진 혐의로 2년을 선고받는데, 형평성을 기하자면 앞의 범죄에 대해서는 광화문 사거리에서 사지를 말에 묶어 찢어죽여도 시원찮을 판인데, 아무도 처벌 받는 사람이..
내가 싫어하는 사람은, 1)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2)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는 사람들이다. 내가 불쌍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의 이드(id)를 인정하지 못하고 초자아(superego)로 자신의 욕망과 욕구를 끊임없이 부정하고 억누르는 사람들이다.
자신의 부귀영화를 목적으로 삼아, 성장과 성공의 동력으로 삼아도 되겠지만 이것을 동력으로 자기개발과 노력을 하다보면 타인이 나보다 더 큰 부를 갖고 있는 것을 볼 때, 시기와 질투 같은 부정적인 감정이 생겨나는 부작용이 있다. 우리는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은데, 이런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이다 보면 인생을 낭비하고 망치게 된다. 이타적인 것을 인생의 목표로 설정해 두고 자기계발과 노력을 한다면, 그런 부정적인 마음이 파고들 기회가 거의 없어진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적절한 프레임과 태도를 갖춰야 한다. 자신과 타인을 바라볼 때 다른 태도가 적용되어야 하는데, 자신을 향해서는 개인의 프레임을, 타인을 향해서는 시스템의 프레임을 적용하는 것이 사회를 발전시키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 나 자신에게 적용해야 할 태도 1. 위기와 환난이 닥쳐도 이기지 못할 환난은 없다라고 생각하는 마음. 2. 틈나는대로 자신을 개발하고 발전시키는 습관과 태도. 3. 부단히 시간을 아끼고 쪼개서 쓰고, 작은 돈이라도 낭비하지 않는 삶의 자세. # 타인에게 적용해야 할 태도 1. 그가 겪고 있는 삶의 고통과 어려움이 사회의 구조적 어려움에 기인했을 가능성에 대한 열린 자세. 2. 반복된 실패와 불운에 의해 학습된 무기..
자기가 스스로 선택한 일에 대하여, 본인의 힘으로 다른 결정을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본인의 불행을 남의 탓으로만 돌리는 사람들을, 나는 싫어한다. 살다보면 피치 못할 일도 발생한다. 개인의 힘으로 어찌 할 수 없는 다양한 사회적 압력이 존재하고, 극복할 수 없는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하지만, 본인이 결정한 일, 그리고 본인이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는 일에 대하여, 그 결정을 번복하지 않고 계속 투정만 부리고 있는 것은, 결국엔 자기가 선택한 그 결정이, 다른 결정에 비해 아주 조금이라도 나은 점이 있기 때문에 그 결정을 고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장점을 보지 않고, 자기의 삶에 대해, 운명에 대해 불평하고 투정만 부리는 것은 주위에 불행 바이러스를 퍼트리는 일일 뿐이다. 자기의..
인류는 지구 이외의 행성에서 생명체를 발견하기 위해 엄청난 자본과 과학기술을 투입하고 있다. 하지만 지구에서 만난 생명체와도 제대로 대화를 나누지 못하는 인간이 지구 밖의 행성에서 새로운 생명체를 만난다 한들, 그들과 어떻게 대화를 할 수 있으며 어떻게 그들과 교감할 수 있겠는가. 기껏해야 인간과 유사한 형태로서의 생명체만 상상할 수 있는 볼품없는 상상력의 소유자들이 만날 수 있는 생명체는 그 한계가 너무나 자명하다.
나무 사이를 뛰어다니며 지저귀는 저 새들의 종알거림은 나의 귀를 간지럽힌다. 저들의 대화는 우리에게 어떤 음악보다 아름다운 노랫소리이다. 우리가 만들어내는 소리는 자연에게 즐거움을 주는가, 고통을 주는가.
인간의 의식은 무엇인가. 인간이 단순한 물질의 복합체라면 인간의 의식이란 뇌의 전기적 자극의 산물일 뿐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인간은 왜 아름다움과 추함을 느끼는가. 왜 우리는 어떤 것에서 경이감을 느끼는가. 왜 우리는 감동하는가. 의식이라는 것이 독자적으로 존재하는가. 자연계에 아무런 의지가 없다면 생명은 왜 존재하는가. 장미는 왜 피는가. 왜 에너지는 그 형태를 바꾸는가. 인간이 느끼는 고독감, 허무함, 무력감은 생존에 어떤 식으로 기인하는가. 생존에 도움이 되지 않는 여러 가지 인간의 감정과 반응들은 왜 생겨난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