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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 미스 함무라비 [문학-소설] 본문

Report of Book/문학

(2018-10) 미스 함무라비 [문학-소설]

재도담 2018. 3. 2. 23:55

미스 함무라비

문유석 저, 문학동네, 388쪽. 

이제 막 첫 발령을 받은 박차오름 판사. 그녀가 발령받은 곳은 서울중앙지법 44부. 그곳엔 한세상 부장판사와 3년 선배인 임바른 판사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이 세명이 소속된 곳은 합의부로 부장판사가 재판장을 맡고, 임바른 판사가 우배석, 박차오름 판사가 좌배석을 맡아 함께 재판을 진행해 나가는 곳이다. 무뚝뚝하고 출세에는 관심이 없지만 아내 앞에서는 약하고 연륜이 묻은 지혜를 갖고 있는 한세상 부장판사, 내성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성향을 띄지만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며 균형감각이 뛰어난 임바른 판사, 정의감에 불타오르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의협심을 갖고 있지만 아직 경험이 부족하고 내면에 상처를 안고 있는 박차오름 판사. 그들이 맡은 사건들을 보면서, 실제 판사들이 갖고 있는 고민들과 법정의 실제 모습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는, 흡인력 있는 소설이다. 

문유석 부장판사가 현직에서 겪었던 일들을 각색하여 재구성한 만큼 현실감이 뛰어나고 일반인들이 잘 모르는 현직 판사들의 속사정을 들여다 볼 수 있으며, 전문 소설가가 쓴 글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아주 재미있고 감동적이다. 

많은 사람들이 사법부에 대한 불신을 갖고 있고, 그들이 과도한 권력을 쥐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나는 예전부터 그런 대중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다. 가끔 언론을 통해서 대중의 생각과는 다른, 이해하기 어려운 판결들을 보면서 대중은 사법부에 대한 불신과 불만을 갖게 되는데, 나는 그런 비정상적인 판결의 이면에는 판결이 내려지기까지의 과정을 우리가 제대로 모르고 언론이 대중의 관심을 끌기 위해 특정한 부분을 과도하게 부각시킨 측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설사 부조리한 판결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전체 사건의 1-2%에 불과한 것이고, 대부분의 판사들은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자신의 일을 수행하며 불철주야 고생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비단 사법부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인, 의료인, 언론, 등 등 대표적으로 국민들에게 싸잡아 욕먹는 직종 모두가 해당된다. 

이 소설을 읽게 되면, 일단 판사들에 대한 일종의 환상 같은 것이 걷히게 된다. 우리는 흔히 사법고시를 통과하고 난 사람에게는 비단길이 펼쳐져 있고, 그들은 법복을 휘날리며 판결망치를 신나게 휘두르는 등 뭔가 폼나는 일들이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법관들은 하루 종일을 책상앞에 앉아 엄청나게 쌓인 서류를 검토하고 내용을 파악하고 밑줄 긋고 요약하고, 하는 것이 업무의 거의 대부분이다. 그들에게는 판결문 하나하나에 자신의 명예가 걸려 있고, 또 미래에 있을 판결에 영향을 미칠 선례를 만든다는 생각에, 모든 판결이 신중할 수 밖에 없다. 살인적인 업무량과 그들의 고뇌와 직업 자체가 요구하는 무거운 책임감이, 얼마나 그들을 힘들게 할지 상상해 볼 수 있게 된다. 

또,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전관예우와 같은 법조계의 비리와 부패가 사실과 얼마나 멀지도 다소 가늠해보게 된다. 자세한 것은 책을 읽어보면 나오겠지만, 어쨌든 우리는 자기가 해보지 않은 것에 대해 너무나 쉽게 비판적이고 악의적인 판단을 하는 경향이 있다고 본다. 나는 이 글에서 문유석 판사가 갖고 있는, 대중이 법조계를 향한 부정적인 시각에 반응하는 태도를, 의학계에서도 반드시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중이 의료계에 대해 오해에 의해서든 시기와 질투에 의해서든 곱지 않은 시선과 태도를 갖고 있는 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대중을 멍청한 개돼지 취급해서는 안된다. 그들의 눈높이에서, 그들이 왜 그렇게 생각하고 바라보게 되었는지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그들의 관점에서 부족다고 보이는 부분들을 개선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이 책을 통해서 느꼈던 가장 좋았던 점은, 선악의 구별이 그렇게 간단하고 쉬운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이야기하는 부분이다. 흔히들 선악을 너무 쉽게 판단한다. 어렸을 때부터 읽었던 동화나 우화가 그랬고, 대부분의 영화와 소설이 선악을 명확하게 구분해놓고 있다. 하지만 세상을 살아보면, 세상이 그렇게 무 자르듯 나뉠 수 없다는 것을 알게된다. 우리는 흔히 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게 약한 것이 미덕이라고 생각한다(물론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역겨운 인간들도 보긴 하지만). 하지만 누가 과연 강자이고, 누가 약자일까. 재판정에서 원고와 피고의 이야기를 모두 들어보면 그들 모두 그 상황에서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고, 피할 수 없는 환경이 있다. 피해자처럼 보이는 사람이 또 다른 한편으로는 가해자이기도 하고,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이 억울한 피의자가 된 경우도 너무나 많다. 이런 세상에서 판결을 내려야 하는 판사들이 가지는 고민과 괴로움은, 정말 그들의 큰 멍에와 짐이 아닐까 한다. 

좋은 글을 내주신 문유석 판사님께 고맙고, 많은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