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dGen's story
(2017-36) 열한 계단 [인문학] 본문
열한 계단
채사장 저, 웨일북, 408쪽.
채사장의 장점은 눈높이를 낮춰서 누구나 쉽게 편하게 읽을 수 있도록 글을 쓴다는 것이다.
이 책 또한 마찬가지다.
자신의 경험, 자신에게 영향을 줬던 사건들, 책들, 인물들을 소개하면서
대중이 편하게 읽을 수 있도록 쉽게 써놓아 좋다.
다른 것들보다 채사장 개인의 경험들을 써놓은 대목들이 가장 좋았다.
채사장의 인생을 응원하고 또한 나의 인생과 나의 계단들을 응원한다.
현대는 근대의 이성중심주의에 반대하며 '반이성'을 주장하고, 근대의 합리주의에 저항하며 '비합리성'을 추구하고, 근대를 벗어났다는 의미에서 '탈근대성'을 말한다. (p.142) 현대를 대표하는 개념은 다음과 같다. 반이성, 탈중심, 해체, 다원성. 이러한 개념들은 탈근대라는 단어와 혼용된다. (p.143)
아무리 노력해도 잘 읽히지 않는 책이 있다. 그럼 굳이 읽으려 애쓸 필요는 없다. 잘 읽히지 않는다는 건 내가 그 책을 읽을 준비가 덜 되었거나, 반대로 그 책이 나를 설득할 준비가 충분히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당신이 노력하지 않아도 당신의 흥미를 끌고 당신을 깨우치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책들이 무수히 많다. 읽히지 않는 책을 가볍게 지나치지 못하고 집착할 필요는 없다. (p.163)
그런데 어느 날인가 군 생활이 너무 힘들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겠습니까? 사람들도 힘들게 하고, 되는 일도 없고, 왜 힘든지 생각했더랬지 말입니다. 생각하다 보니까 보람도 성취도 없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생각했습니다. 그럼 왜 보람도 성취도 없나. 그랬더니 제가 모든 걸 대충하려고 한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군대 일이란 게 그렇게 인생에서 중요한 것도 아니고. 그러니 구색만 맞추려고 한 거지 말입니다. 그렇게 저는 군 생활 전체를 중요하지도 않은 일로 채우고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역해서 사회에 돌아가면 지난 2년은 버린 시간이 되겠구나 하고 말입니다. 그랬더니 걱정이 됐습니다. 그러면 안되지 않겠습니까? 20대의 가장 소중한 시간을 하찮은 시간으로 채울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짐했지 말입니다. 나한테 선물해야겠다, 군 생활의 2년을 의미있는 시간으로 만들어서 스스로에게 선물해야겠다 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뭐, 구두부터 닦기 시작했습니다. (p.209)
우선 책만 본 사람들의 한계는 타인에게 엄격하다는 것이다. 이들은 세상이 쉽다. 왜냐하면 책의 울타리 속에서 안전하게 보호받으며 성장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실제 세상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는 까닭에 현실의 폭력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다른 사람들이 나약할 것이라고 상상한다. 그리고 자신이 그들을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막상 현실에 발을 디디면 이들은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 현실에 당황한다. 그리고 스스로의 나약함을 부정하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사람이 된다. 모든 일에서 불평불만거리를 찾아내는 사람, 타인의 잘못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사람, 선과 도덕과 정의를 습관적으로 강조하는 사람.
다음으로 현실에 적응하기만 한 사람들의 한계는 자신에게 너무도 너그럽다는 것이다. 이들은 세상이 어렵다는 것을 잘 안다. 내 뜻대로 되는 것은 하나도 없으며, 계획과 일정에 따라 정확하게 진행되는 일 따위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음을 정확히 알고 있다. 그래서 이들은 문제에 봉착했을 때, 옳고 그름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타협과 조율을 통해서만 상황에 따라 문제를 봉합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들은 다음과 같은 사람이 된다. 선과 도덕에 대해 하찮게 여기는 사람, 모든 것을 손익으로 판단하는 사람, 심연의 깊은 대화가 불가능한 사람. (p.251)
우리가 이 세상에 온 이유는, 현시대가 구획지어놓은 과학과 학문이라는 영역 안에 머물며 거기서 인정받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는 신기한 것들을 만나고 놀라워하며 삶의 의미를 풍부하게 이해하기 위해 이 세상에 왔다. 합리주의라는 근현대의 기준 안에 당신의 드넓은 영혼을 구겨 넣지 않기를 바란다. (p.333)
사후에 대한 논의 없이 삶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은 전혀 합리적이지 않다. (p.333)
공통된 세계관을 기반으로 하지만, 불교와 《우파니샤드》는 근본적인 차이를 갖는다. 그것은 '자아'에 대한 입장 차이다. 《우파니샤드》는 고정불변한 자아를 상정한다. 탄생과 죽음을 반복하면서 업에 따른 결과를 수용하는, 연속적이고 불변하는 존재. 이것은 그리스도교의 영혼과 같은 존재다. 그 영혼이 새로운 육체 속으로 옷을 갈아입듯 들어가며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우파니샤드》는 이렇게 영원하고 절대적인 존재로서 본질적인 자아를 '아트만'이라고 부른다.
반면 붓다는 아트만을 부정한다. 우리가 윤회계를 떠도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고정불변의 자아가 존재하기 때문은 아니다. 붓다는 무아(無我)를 주장한다. 영원한 자아나 영혼에 대한 믿음이야말로 여태껏 사람들이 품어온 가장 기만적인 망상이다. 이를 '아나트만'이라고 한다. (p.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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