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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21) 후아유 [에세이] (이향규) 본문

Report of Book/에세이

(2022-21) 후아유 [에세이] (이향규)

재도담 2022. 3. 13. 22:05

후아유 

이향규 저, 창비교육, 288쪽. 

내 이야기가 아니라 그들이 믿고 보고싶어하는 내 이야기를 그들이 만든 질문과 보기 안에서 고르고, 내 마음을 다섯 단계로 나누어 놓은 범위 안에서 표시해야 하는 불편함.

토니는 어차피 결혼은 문화가 다른 사람이 만나서 사는 일인 것 같다고 했다. 영국과 한국의 문화 차이가, 서로 다른 가정에서 성장한 남자와 여자의 차이, 혹은 개인의 성격 차이보다 더 큰지는 모르겠다고 했다. 결혼은 성장 과정이 다른 사람이 만나 서로 생각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이해하면서 사는 것이 아니 겠냐고도 했다.

부부 싸움은 보통 상대방이 나하고 생각이 같을 거라고 가정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 같다고, 내가 말하지 않아도 내 마음을 알 거라고, 그래서 상대가 내 마음을 몰라 주거나 내 생각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때 섭섭하게 되는 것 같다고. 그런데 아예 ‘우리는 다르다. 상대는 내가 자란 문화에서 자연스럽게 여기는 모든 것이 익숙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면, 내 감정이나 생각은 말하지 않아도 상대가 ‘어련히 알아서’ 가늠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내가 ‘적극적으로 설명해야’ 하는 거라고 여기고 행동하게 될 거라고. 그래서 우리처럼 아예 문화가 다른 것을 받아들이면 오히려 잘 설명해 주고 소통하게 될 거고 그러면 싸울 일이 적지 않겠냐고 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다. 상대는 내 생각과 같지 않을 수 있다. 어떤 문제가 나한테 중요한 것이라면 내 편에서 적극적으로 이야기해 주는 게 차라리 낫다. 사실 그렇게 하는 것 말고는 별로 다른 방법도 없는 것 같다. 내가 다른 이와 한집에서 그런대로 불편하지 않게 살려면 말이다. 내가 겪고 있는 이 도전적 과제, 이건 내가 ‘국제결혼’을 해서가 아니라, ‘결혼’을 해서 그런 거다.

그때 나는 이런 지원을 방과 후 수업을 하고 싶어 하는 아이들 가운데 경제적 도움이 필요한 학생이 받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우리가 안 받겠다고 하면, 필요 없다고 하면, 정말 도움이 필요한 다른 다문화 학생도 지원을 안 해 줄 것 같아서 그 이야기를 사람들 앞에서 하지는 않았다.

나는 국제결혼 가족을 다문화 가족이라고 하는 것을 이제 그만두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 적이 많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먼저 다문화라는 이름이 도움이 필요한, 적응에 어려움을 겪는, 편견과 차별을 겪는, 우리가 배려해야 할 사람을 의미하는 낙인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더욱이 다문화라는 이름은, 이런 시선을 감추면서 뭔가 타인을 배려하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이름이라는 외피를 쓰고 있다. 

모든 가족은, 특히 이렇게 모든 것이 빠르게 변화하는 한국 사회에서 가족은, 가족 구성원 사이에 수많은 문화적 갈등을 안고 있다고 본다. 다문화 가족이 겪고 있는 문화 갈등, 그건 사실 우리 모두 매일 겪고 있는 것이고, 그걸 날마다 풀어 가면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다문화라는 이름을 쓰면서 '다양성'의 문제를 민족 사이의 문제로만 한정 지어 버린다.

다문화, 다문화 가족, 다문화 아동 청소년, 다문화 학생. 이 말들은 마치 다양성을 존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한 무리의 사람들을 이 범주 안에 집어넣고 한 가지 색을 칠해 버리면서 그 안에 있는 개개인의 다양한 색깔을 지워 버릴 가능성이 매우 높은 말들이다. 그래서 나는 이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말은 우리가 살면서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다름'을 섬세하게 풀어 가도록 격려하기보다는, 피부색이나 생김새처럼 눈에 보이는 겉모습이 다른 점에만 주목하게 만들어서, 다양성의 문제를 민족이나 인종 문제로만 축소시켜 버리는 오류를 일으킨다. 그래서 나는 이 말에 찬성하지 않는다.

낯선 사람을 만날 때 그 개인의 고유성을 한눈에 다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보통은 그가 속한 어떤 집단에 그를 넣어서 파악한다. 여성, 남성, 중·고등학생, 초등학생, 교사, 회사원, 서울 사람, 외국인…. 때때로 집단을 가리키는 이름이 없으면 만들기도 한다. 다문화도 그런 경우리라. 
그런데 이 이름이 타인을 온전히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성찰이 필요한 지점은 여기이다. 일단 집단의 이름이 생기고, 개개인의 총합인 것처럼 생각되는 집단의 이미지가 만들어지면 우리는 낯선 이를 집단 속에 넣고 충분히 안다고 착각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그와 내가 더 깊은 관계를 맺는 게 어려워진다. 혹시 나도 그런 것은 아닌지, 이 사람을 집단의 이름으로 다 파악했다고 믿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물어보는 것.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성찰이다.

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제 우리가 진지하게 '역사를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를 고민할 때가 왔다는 생각을 했다. 다양한 민족적 배경을 가진 학생이 모여 있는 교실에서는 그동안 한국 사람들끼리 토론 없이 동의했던 '우리' 역사에서 벗어나 여러 가지 다른 처지와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는 역사를 가르쳐야 할 것 같다.

이제 정말 ‘국사'가 아닌 '역사'를 가르쳐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다문화 학생들을 위해서 그래야 한다는 게 아니다. 그렇게 해야 우리 모두 역사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야 조상의 빛난 얼과 찬란한 문화유산에 대한 소심한 자부심, 평화를 사랑하는 백의민족을 침략한 외세에 대한 분노, 우리 역사가 가장 비극적이라는 피해 의식에서 벗어나 사람 사는 넓은 세상의 이야기를 좀 더 차분히 할 수 있지 않을까? 이건 우리 어른들의 과제이다.

우리 모두가 배워야 하는 '함께 사는 법'은 스스로 가해자가 되지 않도록 성찰 하는 것과 함께 피해자가 되었을 때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것, 두 가지 다 아니겠는가.

모두와 친해질 수는 없지만, 누구에게나 친절할 수는 있다. 감정은 억지로 만들어낼 수 없지만, 행동은 의식적으로 할 수 있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어떤 사람이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를 알아 보려고 하지 않는다. 그 대신 그냥 내 기준으로 짐작하고 그의 됨됨이를 판단해 버린다. 
상대방이 잘못된 행동을 하면 혼내기 전에 먼저 가르쳐주고, 상대방의 문화가 어떤 의미인지 모르면 물어봐야 한다.  

태안에서 유조선 사고가 일어났을 때 엘렌은 기름을 닦아내는 자원봉사를 하고 싶어 했다. 가는 차 안에서 물었다. 한국에서 일어난 일인데 외국인이 이 추운 날 거긴 왜 가고 싶냐고, 그녀의 대답은 간단했다. 책임을 느낀단다. 자기가 석유 에너지를 쓰는 한 원유 유출 사고에 대한 자기 몫의 책임을 피할 수 없지 않느냐고 했다.

엘렌에게, 한국에 선교사로 왔는데 네게 선교는 무엇이냐고 물었다. 나는 엘렌이 기독교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해서, 그녀가 처음에 선교사로 한국에 왔다는 사실도 종종 잊었다. 그녀는 다른 종교에도 개방적이었고 나중에 스님 친구도 생겼다. 그녀의 답은 이랬다. 삶에서 사랑을 실천하면서 사는 것이 선교인 것 같다고, 하나님은 사랑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지금까지 많은 기독교인을 만나 보았지만, 나는 지금도 크리스천이라고 하면 엘렌이 생각난다.

"We wanted a labour force but human beings came."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그 사람과 나 사이에 이야기라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 각자 20분쯤 아무런 방하 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다른 이들은 판단하거나 평가하거나 조언하지 않고 귀 기울여 듣는다. 영혼이 안전한 공간에서 사람들이 풀어내는 이야기와 그를 통한 소통의 다이내믹은 예술과 기적 사이 어디쯤 있는 것 같다. 아이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고, 자기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해 본 것은 처음이라고 했다. 

K 씨를 만난 뒤 나는 마음이 놓였고 고마웠고 듬직했다. 이건 지금까지 북한 사람들을 숱하게 만나면서 한 번도 느끼지 못한 감정이었다. 왜일까? 문득 그건 K 씨가 특별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지금까지 내가 북한 이주민을 만난 상황이 기형적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 아이들은 모두 다 이 상자가 필요한가요?" 
"이 아이들 말고 상자가 필요한 아이들도 다 이렇게 지원하나요?" 
담장 밖에는 키 작은 아이들이 가득하다. 북한 출신 학생도 다문화 학생도 아닌데 기초 학력이 모자라고 가정에 어려움이 많고 또래 친구가 없는 상태로 제법 오랫동안 살았던 아이들이 담장 밖을 서성인다. 두 질문에 답을 해야 하는데 대답이 좀 구차하다. 이 아이들이 모두 다 지원이 필요한 아이들인지 잘 모르겠고 이 아이들 말고 다른 아이들도 이렇게 지원하는지도 자신 없다. 

그들이 통일 역군이 될지 말지, 자신이 먼저 온 미래라는 사명감을 가질지 말지는 스스로 결정할 문제이지 우리가 그러라고 떠 맡길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 것이 아니듯이, 이들도 "한반도 통일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온 게" 아니다. 그들은 더 나은 삶을 찾아 이곳에 왔을 뿐이다. 나는 그들도 평범하게 살고 싶어하는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봐 주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해야 그들도 온전히 한 개인으로 우리 사회에 뿌리내릴 수 있을 것 같다. 과도한 짐을 지우지 말자. 나는 이들이 탈북을, 다문화를 잊고 사는 시간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

이제 북한 출신 청소년을 돕는 일을 그만두고 나니 나는 자꾸 두터운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다른 아이들이 떠오른다. 그래서 그가 누구든 어느 집단에 속해 있든 상관없이 누구나 보호받고 성장할 수 있게 지원해 주는 제도는 무엇인지, 그것은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에 대해 자꾸 말을 걸어 보고싶다. 혹시 그런 것이 있다면, 좀 먼 길을 돌아가더라도 북한 출신 청소년 혹은 다문화 청소년 개인에게도 훨씬 좋은 도움이 될 것 같기 때문이다. 

구술사의 고전 <The Voice of the Past(과거의 목소리)>에서 톰프슨(Paul Thompson)이 구술에는 ‘치유적’ 성격이 있다고 말한 것은, 말하는 과정에서 억눌러 놓았던 특정 기억들을 해방시키고 비로소 자신의 삶을 온전히 통합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 후회하는 것, 고통스러웠던 것, 증오했던 것, 그리운 것들이 마음결 구석 구석에서 기어 나와 말로 표현되는 순간, 그 기억은 더 이상 사람을 지배하지 않게 된다. 듣는 사람의 역할은 단지 조용히 있 어 주는 것뿐이다.

세대, 성별, 체제, 정치적 성향을 뛰어넘어 그가 나를, 내가 그를 애틋하게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은 말하기와 듣기였다. 말하도록 하고, 또 그것을 들어 주는 것, 이 역시 세상에 화해와 평화를 가져오는 한 방법이리라. 세상에 이런 종류의 기억들이 많이 남았으면 좋겠다. 

프라이드(Pride) 축제 기간에 브라이턴에 다녀왔다. 가게마다 무지개 장식이 가득했다. 은행도 음식점도 슈퍼마켓도 서점도 약국도 옷 가게도 커피점도 온통 깃발과 슬로건을 걸었다. "해피 프라이드" "프라이드를 지지한다” “스티그마와 싸우자" "여기 사랑이 있다" 프라이드는 LGBT를 위한 축제라고 말했다가 린아가 고쳐 줬다. 프라이드는 모든 사람을 위한 축제라고. 커피숍에 앉아 물끄러미 거리를 보는데 과연 동성애자와 이성애자가 보이는 게 아니라 사랑하는 이와 함께 걷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보였다.

발문. 

1. 피해자는 가해자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누군가 다른 사람에게 폭력을 행사했을 때, 그 사람에게 그렇게 하지 말라고 권면하는 것으로 족한가, 그것보다 경한 폭력을 돌려줘야 하는가, 동일한 수준의 폭력으로 갚아줘야 하는가, 더 강한 폭력을 행사해야 하는가? 

2. 학교에 편·입학할 때, 학력심의가 필요한가? 학교교육을 받는데 자격이 필요한가? 

3. 우리에게 주어진 자원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까? 우리는 누구에게 지원을 해야할까? 어떤 기준으로 지원해야 할까? 각각의 지원방식에는 어떤 문제나 한계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