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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dGen's story

(2022-23)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에세이] (무라카미 하루키) 본문

Report of Book/에세이

(2022-23)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에세이] (무라카미 하루키)

재도담 2022. 3. 27. 00:03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무라카미 하루키 저, 임홍빈 역, 문학사상사, 280쪽. 

빨리 달리고 싶다고 느껴지면 스피드도 올리지만, 설령 속도를 올린다 해도 그 달리는 시간을 짧게 해서 몸이 기분 좋은 상태 그대로 내일까지 유지되도록 힘 쓴다. 장편소설을 쓰고 있을 때와 똑같은 요령이다. 더 쓸 만하다고 생각될 때 과감하게 펜을 놓는다. 그렇게 하면 다음 날 집필을 시작할 때 편해진다. 계속하는 것-리듬을 단절하지 않는 것. 장기적인 작업을 하는 데에는 그것이 중요하다. 일단 리듬이 설정되어지기만 하면, 그 뒤는 어떻게든 풀려 나간다. 그러나 탄력을 받은 바퀴가 일정한 속도로 확실하게 돌아가 기 시작할 때까지는 계속 가속하는 힘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아무리 주의를 기울인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p. 19)

올해 5월 말, 매사추세츠 주 케임브리지에서 지내게 되면서부터 꽤 착실하게 달리고 있다. 내가 '착실하게 달린다'고 하는 말은 구체적인 숫자를 들어서 말한다면, 일주일에 60킬로를 달리는 것을 의미한다. (p. 21)
→ 착실함의 기준을 정량화해두면 좋다. 

어떤 일이 됐든 다른 사람을 상대로 이기든 지든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 그보다는 나 자신이 설정한 기준을 만족시킬 수 있는가 없는가에 더 관심이 쏠린다. 그런 의미에서 장거리를 달리는 것은 나의 성격에 아주 잘 맞는 스포츠였다. (p. 25)

자신이 쓴 작품이 자신이 설정한 기준에 도달했는가 못했는가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며, 그것은 변명으로 간단하게 통하는 일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을 쓰는 것은 마라톤 풀코스를 뛰는 것과 비슷하다. 기본적인 원칙을 말한다면, 창작자에게 있어 그 동기는 자신 안에 조용히 확실하게 존재하는 것으로서, 외부에서 어떤 형태나 기준을 찾아야 할 일은 아니다. 
달린다는 것은 나에게 있어 유익한 운동인 동시에 유효한 메타포이기도 하다. (…) 어제의 자신이 지닌 약점을 조금이라도 극복해가는 것, 그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 장거리 달리기에 있어서 이겨내야 할 상대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과거의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p. 26 ~ p. 27)

내가 공부하는 일에 흥미를 느끼게 된 것은, 소정의 교육 시스템을 어떻게든 마친 다음, 소위 '사회인' 이 되고 나서부터다. 자신이 흥미를 지닌 분야의 일을 자신에게 맞는 페이스로, 자신이 좋아하는 방법으로 추구해가면 지식이나 기술을 지극히 효율적으로 몸에 익힐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령 번역 기술도 그렇게 해서 나만의 스타일로, 내 돈을 들여가면서 하나씩 익혀 나갔다. 그래서 어느 정도의 수준에 이르기까지 시간도 걸렸고 시행착오도 거듭 했지만, 그런 만큼 배운 것은 확실하게 내 것으로 만들었다. (p. 63)

살찌기 쉬운 체질로 태어났다는 것은 도리어 행운이었는지도 모른다. 즉 내 경우 체중이 불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 매일 열심히 운동하고 식사에 유의하고 절제하지 않으면 안된다. 골치 아픈 인생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고 계속해 나가면 신진대사가 높은 수준으로 유지되고, 결과적으로 몸은 건강해진다. 노화도 어느 정도는 경감 시킬 것이다. 그런데 거의 노력을 하지 않아도 살이 찌지 않는 체질의 사람은 운동과 식사에 유의할 필요가 없다. 필요도 없는데 그런 귀찮은 짓을 일부러 하려고 하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체력이 점점 쇠퇴해가는 경우가 많다. 의식적으로 관리하지 않으면 자연히 근육이 약해지고 뼈가 약해져 가는 것이다. 무엇이 공평한가 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보지 않으면 잘 알 수 없는 법이다. (p. 70 ~ p. 71)

올림픽 마라토너인 세코 도시히코 씨와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현역에서 은퇴하고 S&B팀의 감독으로 취임한 지 얼마 안 됐을 때의 일이다. 그때 나는 "세코 씨 같은 레벨의 마라토너도 '오늘은 어쩐지 달리고 싶지 않구나. 아, 싫다. 오늘은 그만둬야지. 집에서 이대로 잠이나 자고 싶다' 라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까?" 라고 질문해보았다. 세코 씨는 말 그대로 눈을 크게 뜨고는, ‘무슨 그런 바보 같은 질문을 하는 거야’라는 어조로 "당연하지 않습니까, 늘 그렇습니다!"라고 말했다. (p. 75)

건전한 자신감과 불건전한 교만을 가르는 벽은 아주 얇다. (p. 87)

바쁘다는 핑계로 인해 건너뛰거나 그만둘 수는 없다. 만약 바쁘다는 이유만으로 달리는 연습을 중지한다면 틀림없이 평생 동안 달릴 수 없게 되어버릴 것이다. 계속 달려야 하는 이유는 아주 조금밖에 없지만 달리는 것을 그만둘 이유라면 대형 트럭 가득히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가능한 것은 그 '아주 적은 이유' 를 하나하나 소중하게 단련하는 일뿐이다. 시간이 날 때마다 부지런히 빈틈없이 단련하는 것. (p. 115 ~ p. 116)

이와 같은 능력(집중력과 지속력)은 고맙게도 재능의 경우와 달라서, 트레이닝에 따라 후천적으로 획득할 수 있고, 그 자질을 향상시켜 나갈 수도 있다. 매일 책상 앞에 앉아서 의식을 한 곳에 집중하는 훈련을 계속하면, 집중력과 지속력은 자연히 몸에 배게 된다. 이것은 앞서 쓴 근육의 훈련 과정과 비슷하다. 매일 쉬지 않고 계속 써나가며 의식을 집중해 일을 하는 것이, 자기라는 사람에게 필요한 일이라는 정보를 신체 시스템에 계속해서 전하고 확실하게 기억시켜 놓아야 한다. 그리고 조금씩 그 한계치를 끌어올려 간다.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아주 조금씩, 그 수치를 살짝 올려간다. 이것은 매일 조깅을 계속함으로써 근육을 강화하고 러너로서의 체형을 만들어가는 것과 같은 종류의 작업이다. 자극하고 지속한다. 또 자극하고 지속한다. 물론 이 작업에는 인내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만큼의 보답은 있다. (p. 122)

주어진 개개인의 한계 속에서 조금이라도 효과적으로 자기를 연소시켜 가는 일, 그것이 달리기의 본질이며, 그것은 또 사는 것의(그리고 나에게 있어서는 글 쓰는 것의) 메타포이기도 한 것이다. (p. 128)

자동조종 같은 상태로 몰입해버렸기 때문에 그대로 더 달리고 있으라는 말을 듣는다면, 100킬로 이상이라도 아마 달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상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마지막 단계에는 육체적인 고통뿐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런 것조차 머릿속에서 대부분 사라져버렸다. 그것은 참으 로 이상한 기분이었지만, 나는 그 이상함을 이상함으로 느낄 수 조차 없는 상태였다. 그 상태에서는 달린다는 행위가 거의 형이상학적인 영역에까지 이르고 있었다. 행위가 먼저 거기에 있고, 그 행위에 딸린 것 같은 존재로서 내가 있다. 나는 달린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p. 175)

마라톤 풀코스를 달리고 있으면 마지막 단계쯤에 일분일초라도 빨리 골인해서, 아무튼 이 레이스를 완주하고 말겠다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찬다. 다른 일은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게 된다. 그렇지만 그때(울트라 마라톤을 할 때)에는 그런 건 추호도 생각나지 않았다. 끝이라고 하는 것은, 그저 우선 한 단락을 짓는다는 것뿐으로, 실제로는 대단한 의미가 없다는 기분이 들었다. 사는 것과 마찬가지다. 끝이 있기에 존재의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존재라는 사물의 의미를 편의적으로 두드러지게 보이기 위해서, 혹은 또 그 유한성의 에두른 비유로서, 어딘가의 지점에 다른 일은 젖혀놓고 우선 종착점이 설정되어 있을 뿐이 아닌가, 하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p. 175)

요절을 면한 사람에게는 그 특전으로서 확실하게 늙어간다고 하는 고마운 권리가 주어진다. 육체의 감퇴라고 하는 영예가 기다리고 있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익숙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p. 187)

중요한 것은 시간과의 경쟁을 하는 것이 아니다. 어느 만큼의 충족감을 가지고 42킬로를 완주할 수 있는가, 얼마만큼 자기 자신을 즐길 수 있는가, 아마도 그것이 이제부터 앞으로의 큰 의미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 아닐까. 수치로 나타나지 않는 것을 나는 즐기며 평가해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제까지와는 약간 다른 성취의 긍지를 모색해가게 될 것이다. (p. 187) 


무라카미의 소설을 읽고 무언가 나랑 잘 안맞다고 생각했었는데, 

처음으로 좋았다고 생각한 책이었다. 

읽고 나서 가장 크게 와닿았던 것은,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작가가 정말 성실하구나! 하는 것. 

역시 좋은 작가는 단순히 천재성을 갖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더해 

부단한 노력과 성실성이 담보되지 않으면 안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무라카미가 말하는 것처럼 '달린다'는 것이 운동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삶에서 메타포이기도 하다는 것이 참 와닿는다. 

그리고 자기만의 기준으로 성실함을 정량화 한다는 것도, 새롭게 얻은 좋은 아이디어였다. 

나도 나만의 성실함의 기준을 세워보아야지. 

또 늙는다는 것, 그로 인한 체력의 한계와 감소를 인정하는 것도 배웠고, 

달리기의 시작과 끝이 경계에 대한 상징 이외에 실제로는 의미가 없는 것처럼, 삶의 시작과 끝-죽음-이라는 것도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좋은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