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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천만리 할아버지

재도담 2016. 9. 14. 13:10

천만리(千萬里, 1543년~ )는 명나라의 수위사 겸 총독장으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조선에서 전공을 세우고 귀화하여 한국 영양 천씨의 중시조가 된 장군이다. 자는 원지(遠之), 호는 사암(思庵),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묘는 전라북도 남원시 금지면 방촌리에 있다. 

아버지는 천종악(千鐘嶽)이며, 어머니는 병부시랑 전탁(錢鐸)의 딸이다. 9세에 외삼촌 전륜(錢倫)에게 의탁되어 공부하였다. 

1571년(28세) 무과에 장원 급제하여 1575년에 총절사가 되어 몽골군을 격퇴하였다. 그 공으로 내직인 내위진무사가 되었으나, 남의 참소를 입어 양릉에 귀양살이하였다. 8년의 귀양살이 후에 태청전수위사와 총독오군사를 겸직하였다. 태청전수위사로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선이 명나라에 원병을 요청하였는데, 1592년(49세) 임진왜란 때 중국 명나라 황제의 명으로 조병영양사 겸 총독장으로 두 아들 천상(千祥), 천희(千禧)와 함께 이여송을 따라 조선에 와서 군량 수송업무를 관장하였다. 

철기(鐵騎) 2만 명을 거느리고 제독 이여송을 따라 압록강을 건너 곽산에서 첫 전투를 이긴 다음, 평양으로 진군하여 주둔하고 있는 적을 포위하였다. 제3차 평양 전투에서 칠성문을 공격했는데, 대포로 문짝을 부수고 군사를 정돈하여 들어가 승세를 타고 싸운 결과 1,280여 급(級)을 참획하였다. 계속 싸우면서 동래에까지 이르는 동안 연전연승함으로써 적의 예봉을 꺾어놓았다. 

1597년 정유재란 때는 마귀 제독을 따라 파병되어, 중사마로서 일본 군사와 직산에서 싸웠는데, 매복하였다가 들이치자 적들은 풀대 쓰러지듯 하였으며, 울산까지 도망치는 적을 승세를 타서 곧바로 무찔러 버리고 그 공로를 서생진의 층암절벽에 새겼다. 

임진왜란이 끝나자 1600년(선조33) 8월 만세덕, 이승훈은 귀국하였으나, 그는 따라가지 않고 조선에 머물러 살았다. 왕경에 머무르면서 금강산에 세 번 가보고 두류산에 두 번 올랐는데, 이르는 곳마다 시를 읊어 감회를 털어놓았다. 대체로 천만리가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억누르고 이국 땅의 고신이 된 것은 명나라가 마지막 운수에 들어서고 중국이 오랑캐 땅으로 되리라는 것을 예감하고 후손들이 오랑캐 땅에 들어가지 않게 하자는 것이었다. 

선조는 그의 전공을 생각하여 자헌대부로 봉조하의 벼슬을 내리고, 화산군에 봉하여 전(田) 30결을 급복하였으며, 그의 장남 천상은 한성부좌윤, 차남 천희는 평구도찰방으로 승진시켜 자손에게 세록을 전수받게 하였다. 

숙종이 대보단(大報壇)을 설치하여 종향하도록 명하였고, 1827년 순조는 신주를 부조하도록 하였다. 

정1품 숭정대부 궁내부특진관 김영목에 의해 시장이 작성되었으며, 1910년 7월 26일 순종은 종헌의 뜻이 담겨져 있는 충장이라는 시호를 하사하였다. 



명절을 맞아 시조 할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궁금하여 찾아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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