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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26) 무경계 [인문학] (켄 윌버) 본문

Report of Book/인문학

(2022-26) 무경계 [인문학] (켄 윌버)

재도담 2022. 4. 1. 12:50

무경계 

켄 윌버 저, 김철수 역, 정신세계사, 320쪽. 

자신과 온 우주가 근본적으로 하나라고 느끼는 자각상태를 '우주의식' 또는 '지고의 본성'이라 부른다. 이런 경험은 전세계에 다양하게 퍼져 있고, 인류는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교리를 세우고 거기에 '영원의 철학'이란 이름을 붙였다. 

나는 누구인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나인 것'과 '내가 아닌 것' 사이에 경계선을 긋고 경계의 안쪽에 있는 것을 '나'로 자각한다. 

페르소나) +그림자 =자아 ) +몸 =전유기체(켄타우로스) ) +환경(우주) = 합일의식 

경계는 양측의 대립과 갈등, 전쟁의 가능성을 내포한다. 우리가 안고 있는 대부분의 문제는 경계에 의해 발생하는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극 중 하나를 근절시키려는 시도는 문제의 해결이 되지 못한다. 진짜 문제는 경계 그 자체에 있다. 대극이 없이는 한쪽을 인지할 수 없고 결국 둘은 하나다. 오목 없는 볼록은 존재할 수 없고, 어둠 없는 빛은 존재할 수 없다. 실제로 경계란 존재하지 않는, 허구다. 

빛과 그림자, 긴 것과 짧은 것, 검은 것과 흰 것, 이와 같은 것들이 서로 별개로서 구별되어야 한다는 말은 그릇된 것이다. 그것들은 단독으로는 존재하지 못한다. 그것들은 다만 동일한 것의 다른 측면일 뿐이며, 실재가 아니라 관계성을 말하는 단어들이다. 만물은 본질적으로 둘이 아니고 하나이다. 

자연에 옳고 그름이 있는가? 

모든 경계는 인간이 관념적으로 만들어 낸 상상의 산물일 뿐이다. 
사사무애事事無碍 모든 사물과 사건 사이에는 아무런 경계도 없다. 
투쟁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해소된다. 
실재가 무경계라는 사실이 드러날 때 곧 모든 갈등이 환상이라는 사실도 밝혀진다. 이런 궁극적인 지혜를 열반, 해탈, 해방, 깨달음이라고 부르며, 이 이해가 곧 양극으로부터의 해방, 분리라는 마법으로부터의 해방, 내 안의 거짓 정체성이란 사슬로부터의 해방이다. 

나와 나 아닌 것 사이의 경계는 우리가 그은 최초의 경계이자 우리가 제거할 마지막 경계이다. 이 경계야말로 우리가 만들어 세운 모든 경계 중에서 가장 근원적인 최초의 것이다. 최초의 근원적 경계란 '경험자'와 '경험된 세계' 사이의 간극으로 볼 수 있다. 근원적 경계의 안쪽에는 주체, 생각하는 자, 느끼는 자, 보는 자인 '나'가 있고, 그 반대쪽에는 외부 대상의 세계, 나로부터 분리된 낯선 환경, 즉 '나 아닌 것'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런 인식은 관념적인 것일 뿐이다. '나'와 '나의 경험'을 분리할 수 없고, '나의 경험'과 '세계'를 분리할 수 없다. '내가 곧 우주'임을 깨달을 때 내게 고통을 줄 수 있는 '외부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진정한 나'란 무경계 자각상태인데 비해 모든 언어와 사고는 경계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현재순간(present moment)'에 완전히 몰입한 경험 속에서는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보인다. '현재순간'을 잘 검토해보면, 분명 그 안에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와 미래는 없다. 오직 현재만이 존재할 뿐이다. '영원'은 지금 이 순간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영원은 '언제나 이미 지금'이다. 현재만이 유일한 실재이다. 거기에 또 다른 실재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기억을 현재경험으로 본다는 것은 현재순간의 경계를 붕괴하는 것이며, 현재순간을 환상적 한계로부터 자유롭게 하고, 과거 대 미래라는 대립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앞 뒤 어디에도 시간이란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그렇게 해서 무시간적 현재 이외에 달리 서 있을 곳이 없게 되고, 영원 이외에 달리 있을 곳이 없게 된다. 

근원적 경계(나와 외부를 구별하는 것)가 발생함으로써 죽음에 대한 공포가 발생하게 된다. '탄생'은 과거가 없고, '죽음'은 미래가 없다. 일부는 죽을 수 있으나, 전체는 죽을 수 없다. 

▶ 페르소나 

경계가 생기면 자신의 일부는 외부로 '투사'된다. 특정 경계를 구축하는 것은 특정 투사를 만드는 것과 같다. 
현명한 사람은 어떤 압력을 느낄 때 그 압력을 스스로 인식하지 못한 어떤 에너지와 동인을 현재 자신이 갖고 있음을 보여주는 '신호'로 사용하는 법을 배운다. 

투사의 메커니즘 :
자신의 '내부'에서 생겨난 (동기, 분노, 욕구와 같은) 충동은 당연히 '외부환경을 목표로 한다'. 그렇지만 그 충동이 투사될 경우, 그것은 외부환경 속에서 발생해서 '자신을 표적으로 하는' 충동처럼 보인다. 이것은 일종의 부메랑 효과로서, 자신의 에너지로써 자신에게 고통을 가하는 결과를 빚는다. 충동을 '나/나 아닌 것' 경계의 바깥쪽에다 놓았기 때문에, 자연히 그것은 환경에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환경이 나를 공격하는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 

우울, 불안, 권태, 공포 등의 증상에는 투사된 감정 같은 그림자 측면이 포함되어 있다. 
이런 증상의 치료의 첫 단계는 이런 증상들을 받아들이고 여유를 가지는 것이다. 
우울, 불안, 소외, 권태, 상처, 당혹감 등을 거부하지 말고 이 감정들이 스스로 드러나게끔 내버려두라. 
첫 단계로 해결이 되지 않을 때는 외부 증상을 다음과 같이 '해석/변환'해 볼 수 있다. 

증상 
외부 압력 
원래 그림자 형태 
내적 동인 
거부감 (아무도 날 좋아하지 않아)
죄책감 (넌 나에게 죄책감을 느끼게 만들어)
불안
자의식 (모든 사람이 나를 보고 있어)
성적무기력/불감증
두려움 (저들이 나를 해치려고 해)
슬픔
위축 (물러남)
난 할 수 없어
의무감 (해야만 해)
혐오감 (나는 ~때문에 널 경멸해)
부러움 (넌 정말 멋져)
 난 그들을 상대하고 싶지 않아 
 난 네 요구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 
 흥분 
 난 내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사람들에게 관심이 많아 
 난 네게 만족을 주고 싶지 않아 
 적개심 (난 부지중에 화를 내고 공격하고 있어) 
 미칠듯이 화가 나 
 난 너희 모두를 밀쳐낼거야 
 난 하고 싶지 않아 
 욕망 (하고 싶어) 
 자기 험담 (나는 내 안의 ~가 싫어) 
 난 생각보다는 괜찮은 인간이야 

 

▶ 켄타우로스 

신체와 심리적 자아, 둘 중 어느 것이 더 심층적인 실재라고 말할 수 없다. 신체와 자아의 '통합체'야말로 어느 한쪽보다 더 심층적인 실재이다. 

수의voluntary vs. 불수의involuntary. 
자아는 통제와 조작의 지위에 있으며, 수의적이고 의지에 의한 활동의 장이다. 자아는 정의상 오직 수의적인 과정하고만 동일시한다. 반면 신체는 기본적으로 혈액순환, 소화, 성장과 발달, 신진대사 등과 같은 불수의적 과정들의 잘 조직된 결합체이다. 

신체 안의 모든 블록, 모든 긴장이나 압박감은 기본적으로 어떤 금지된 충동이나 느낌을 '근육적으로' 억제한 결과다.
신체 안에 정착된 근육긴장은 모두가 심층에 자리잡고 있는 '스스로 꼬집는 행태' 중 하나이다. 따라서 중요한 문제는 "어떻게 하면 블록을 제거하거나 완화시킬 수 있을까?"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내가' 능동적으로 블록을 만들어내고 있음을 알아챌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자신이 실제로 스스로를 꼬집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그때 처음으로 꼬집기를 자발적으로 멈출 수 있게 된다. 

블록은 특정 감정에 대한 '저항'의 한 형태였으며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다. 그러므로, 이들 블록을 완전히 해소시켜 없어지게 하려면, 근육에 갇혀 깊숙이 파묻혀 있는 감정에 대하여 자신을 개방하지 않으면 안된다. 

켄타우로스적인 삶의 의미, 즉 근본적인 삶의 의미를 발견한다는 것은 바로 삶 자체의 과정이 기쁨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이다. 의미는 외적인 행위나 소유에서가 아니라, 자기 존재의 빛을 발하는 내적인 흐름에서 발견된다. 

 

▶ 초월적인 나 

집단무의식에는 인류 공통의 주제들이 저장되어 있다(융은 이것을 원형原型archetypes이라고 불렀다). 
인류 공통인 원형과 신화적 심상의 눈을 통해 자신의 삶을 곰곰이 되새겨보기 시작하면, 그의 자각은 좀더 보편적인 관점으로 이행하기 시작한다. 그는 편파적인 자신의 눈을 통해서가 아니라, 집단적인 '인류정신의 눈'이라는 전혀 다른 관점을 통해 스스로를 바라본다. 

초개아 대역의 모든 치료법과 실천법의 주된 목적은, 어떤 형식으로든, '초월적인 나'를 발견하는 것이다. 

나는 <몸>을 '갖고 있다'. 하지만 나는 나의 몸이 '아니다'. 나는 몸을 보고 느낄 수 있다. 나는 몸을 '갖고 있지만', 나는 나의 몸이 '아니다'. 
- <몸>을 <욕망>, <감정>, <생각>으로 치환하여 각각 암송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확언한다. 
"나는 그 뒤에 남아 있는 순수한 자각의 중심이며, 모든 생각, 감정, 느낌, 욕구에 대한 부동의 주시자이다." 

합일의식 속에서는 초개아적 주시자 자체가 주시된 모든 것과 함께 붕괴된다. 그러나 그런 일이 일어나기 전에 먼저 초개아적 주시자를 발견해야만 한다. 이 발견이 합일의식으로의 손쉬운 '도약대'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혼란시키는 감정이나 감각, 생각, 기억, 경험이란 모두 자신이 배타적으로 동일시해왔던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혼란의 궁극적인 해소는 단순히 그것들로부터의 '탈동일시'일 것이다. (자신의 괴로움을 한발 물러나 떨어져 보면, 나 자신에게는 괴로움이 없음을 깨닫고 괴로움을 자유롭게 놔둘 수 있다) 

우리는 초월적 주시자의 입장에서 환경 속의 모든 대상을 마치 나 자신을 대하는 것처럼 대하기 시작한다. 

당신이 자신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그 어느 것도' 진정한 나, 아는 나, 내면의 나가 아니다. 그것은 지각될 수도, 정의될 수도 없다. 어떤 식으로든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속박이란 보는 자를 '보여질 수 있는' 것들과 잘못 동일시한 데서 비롯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해방은 이런 잘못의 단순한 역전에서부터 시작된다. 
누구든 문제, 불안, 정신상태, 기억, 욕망, 신체감각, 감정 등과 자신 을 동일시한다면 그는 속박, 한정, 두려움, 수축,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죽음에 스스로를 내던지고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볼 수 있는 것들이며, 그렇기 때문에 보는 자가 아니다. 반면에 보는 자, 주시자, ‘진정한 나’로서 계속 머문다면 제약과 문제들로부터 한발 ‘비켜나게’ 되며, 궁극적으로는 그런 것들로부터 완전히 ‘발을 빼게’ 된다.  

 

▶ 궁극의 의식상태 (합일의식) 

“도에 있어서는 자신을 수행해야 할 아무것도 없다. 만일 거기에 수행할 것이 있다면, 그 수행의 완성은 도의 파괴를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도에 아무런 수행이 없다면, 그 사람은 무명상태로 머물게 될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켄 윌버와는 다른 방식으로 합일의식에 도달했다. 

켄은 내면으로부터 밖으로 뻗어나가며 자신의 영역을 확장해나갔으나, 

나는 반대로 바깥에서부터 안으로 들어오며 합일의식에 도달했다. 

갓난 아기는 자신과 환경을 구별하지 못하고 하나로 인식한다(합일의식). 
그러다가 점차로 자신과 환경을 구별하기 시작하지만 
여전히 자신의 주양육자와 자신을 구별하지 못한다. 
조금 더 크면 엄마와 자신을 분리해서 인식하게 된다. 
자신의 몸을 '나'로 인식하던 아이는 
사춘기를 거치며 자신의 몸과 자신의 자아(정신세계)를 분리하고 
자아의식을 나로 여기다가
점차 사회가 요구하는 나(페르소나)와 사회가 부정하는 나(그림자)를 분리하여
페르소나만을 인식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의 페르소나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페르소나는 뇌의 생화학반응과 신경의 전기신호에 의해 발생한다. 
이러한 신경전달물질과 전기신호는 어디에서 유래하는가? 
그것들은 내가 섭취한 음식, 호흡한 공기, 온몸(오감-시청후미촉)으로 겪은 경험들로부터 유래한다. 
결국 나라는 존재는 음식+공기+감각경험의 합이며 이것들이 나를 만든다. 
결국 나와 환경(우주)는 분리될 수 없으며 이것들은 돌고 돌아 하나를 이룬다. 

과거-현재-미래의 개념도 내가 다시 한 번 정리해보자. 
나라는 존재가 과거에도 존재했었고 미래에도 존재하겠지만,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와 미래의 나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나'만 있을 뿐이다. 
마찬가지다. 시간도, 과거와 미래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오로지 '현재'만이 존재할 뿐이다. 과거와 미래, 같은 건 그냥 인간이 만들어 낸 허구의 개념일 뿐이다. 
시간은 흐르지 않으며, 태초부터 종말까지의 시간은 다 펼쳐져 있고, 그것은 지금 현재의 모습이다. 

내 개인적으로, 합일의식에 도달하는 경로는 바깥에서부터 안쪽으로였지만, 
그것을 회복하는 과정은 켄 윌버의 방식대로 안에서부터 바깥으로 뻗어나가는 것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