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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rt of Book/인문학

(2021-29) 믿습니까? 믿습니다! [인문학] (오후)

재도담 2021. 6. 7. 17:30

믿습니까? 믿습니다! 

오후 저, 동아시아, 384쪽. 

아, 정말 이 책을 읽고 저자와 사귀고 싶어졌다. 

너무 내 스타일이다. 아니다. 만약 직접 만나면 어떨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여러모로 나와 맞는 면이 많다. 

이 시대에 유행하는 각종 미신꺼리를 잘 정리해주었다. 

일단 글이 재밌고 거침이 없다. 그리고 참 똑똑한 사람이다. 

아래는 책에서 줄 그은 것들. 


기독교(특히 개신교)에서는 동성애를 죄악으로 여기며 공개적으로 혐오한다. 어찌나 혐오하는지 굳이 그들의 행사까지 찾아가 깽판을 친다. 성경에는 실제로 동성애를 비난하는 구절이 등장한다. 하지만 동성애를 특별히 다른 죄악보다 더 나쁜 죄악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사실 성경에는 음주에 대한 비판이 동성애에 대한 비판보다 훨씬 많이 등장한다. 물론 신실한 기독교인은 음주도 좋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동성애를 비난하는 것만큼 음주를 비난하지는 않는다.

한국의 보수적인 유교맨들(진짜 유학을 공부한 사람이 아니라 그냥 꼰대)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언제나 나이를 따진다. 1년 차이, 종종 한 달 차이도 줄을 세우고 요즘 사람들은 예의를 모른다며 한탄한다. 그런데 조선 시대 기록을 보면 지폐에 나오는 대유학자들도 위아래로 열 살 정도는 친구로 지냈다. 형 아우 같은 호칭도 없이 서로 이름이나 호를 부르면서 말이다. 뼈대 있는 가문이 차리는 상다리 휘어지는 제사상도 전통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레위기』는 구약 중 하나로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에서 모두 인정하는 율법서다. 이 책에는 신자들이 일상생활을 하면서 지켜야 하는 규칙들이 세세하게 적혀 있다. 11 장에서 하느님은 돼지고기, 오징어, 문어, 새우, 게를 먹지 말라고 한다. 19장에서는 두 가지 재료 이상을 사용해서 만든 옷을 입지 못하게 하고(패션 산업으로서는 청천벽력같은 일이다). 머리를 둥글게 깎는 것도 금지, 수염 끝을 손상하는 것도 금지한다. 과연 이 규칙을 지키며 사는 종교인이 얼마나 되는지, 아니 이런 구절이 있다는 것을 알고나 있는지 의심스럽다.

사람이 순수한 악에 닿는 순간은 종교를 포함해서 자기 믿음에 가득 찬 순간뿐이다.

리처드 도킨스는 「만들어진 신」에서 존 레넌의 노래 <Imagine>의 가사를 이렇게 바꿔 쓴다. 
상상해보세요, 종교 없는 세상을. 자살 폭파범도 없고, 911도, 런던폭란테러도, 십자군도, 마녀사냥도, 화약음모사건도, 인도 분할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전쟁도,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에서 벌어진 대량 학살도, 유대인을 '예수 살인자'라고 박해하는 것도, 북아일랜드 분쟁도, 명예 살인도,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번들거리는 양복을 빼입은 채 텔레비전에 나와 순진한 사람들의 돈을 우려먹는 복음 전도사도 없다고. 고대 석상을 폭파하는 탈레반도, 신성 모독자에 대한 공개처형도, 속살을 보였다는 죄로 여성에게 채찍질을 가하는 행위도 없다고, 그렇게 상상해보세요.

진정한 자본주의의 신자들은 금욕적인 사람들이다. 이들은 돈을 벌기 위해 자신의 행복 따윈 신경 쓰지 않는다. 한평생 먹고살 돈이 충분한데도 남들보다 더 열심히 일하는 이들을 우리는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다. 실제로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일수록 오히려 여가 중에 얻는 행복감이 적다고 한다. 그들은 그 시간에 일했으면 벌었을 돈을 계산하느라 결코 여유를 즐기지 못한다. 그들은 돈을 벌기 위해 돈을 번다. 그들은 기꺼이 자신을 희생해서 쓰지도 못할 자본을 축적한다. 이들은 신의 말을 따르기 위해 자신의 몸에 채찍질을 하는 종교인과 마찬가지로 지독한 변태들이다. 방탕한 삶을 사는 재벌 2세나 3세들은 사회의 지탄을 받는다. 그들을 보며 사람들은 자본주의에 회의감을 느낀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열성적인 변태들은 사회의 존경을 받으며, 영웅이 되어 자본주의의 가치를 수호한다.

하나의 대의명분을 공유하게 되면 구성원 간 관계는 점점 평등해질 수밖에 없다. 국가를 위해 함께 싸우는데, 누구는 귀족이고 누구는 노예일 수 없다. 내부에서 동지애(박애)가 싹트고 평등과 자유가 뒤따라온다.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민족주의와 내셔널리즘을 받아들인 국가에서 신분제도가 타파되는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진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조금 더 발전하면, '모두가 평등한데 다른 민족이나 외국인도 평등한 것 아냐?'라는 생각으로 이어지고, 이는 결국 내셔널리즘과 민족주의를 무너뜨리는 또 한 번의 역설로 이어진다.

발전된 인공지능의 문제는 그 기술이 특정 인물이나 단체에 악용되는 것이지, 기술 자체는 아니다. 악용 가능성이 커지므로 기술 발전을 우려하는 것이라면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지만, 마치 그 기술 자체가 인간을 공격하고 인간을 대체할 것이라는 건 과도한 생각이다. 그런데 그 과도한 생각을 지성인들이 진심으로 진지하게 하고 있다. 인본주의적 세계관이 기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가로막고 있는 셈이다. 객관적으로 보라. 기계가 뭣 하러 인간을 흉내 내겠는가.

어떤 공동체를 보더라도 젊은 세대를 ‘이기적’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것은 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새로운 세대가 공동체의 사상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그것이 국가주의든 가족주의든 공동체주의든 혹은 명명할 수 없는 어떤 것이든 기존 사회 구성원이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동의하는 대의가 있는데, 새로운 세대는 여기에 동의하지 못하므로 공동체를 위해 희생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당연히 기존 구성원 입장에서는 그런 태도를 이기적으로 보는 것이고.

백악관 기자와의 만남에 참석한 기자들은"왜 대변인이 거짓말을 하느냐?"며 항의했다. 그러자 켈리앤 콘웨이 백악관 고문은 전설이 될 말을 남긴다. "자꾸 우리가 거짓말을 한다고 말씀하시는데, 우리는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대안적 사실’을 제시한 거죠."

지금 우리에게 닥친 위기는 가짜 뉴스가 아니다. 진짜 위기는 더 이상 우리에게 권위를 주는 뉴스가 없다는 것이다. 진실의 적은 거짓이 아니다. 복잡함이다. 이제 우리는 어느 것도 확신하지 못한다.

특정한 행동이나 사물이 어떤 초자연적인 힘과 연결되어있으며 그것을 지킴으로써 행운이 온다고(혹은 불행을 피할 수 있다고) 믿으면, 우리는 미래를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다는 느낌을 갖는다. 그래서 미신을 적당히 믿으면 긍정적인 태도가 생기고 고민을 덜하며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

주식시장에는 인과가 없거나 있어도 카오스 이론에 수렴하므로 정확히 알 수 없다. 주식시장뿐 아니라 세상의 많은 일이 그렇다. 모든 일에 인과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많은 일이 우연히 일어난다. 그런 데도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신이 받아들일 수 있는 서사를 만들고 그 서사에 맞춰 행동한다. 그래서 이상한 믿음이 생기는 것이다. 물론 어떤 혼란 속에서도 패턴을 만들어내는 것이 인간의 가장 탁월한 능력이지만, 종종 그 능력이 인간의 발목을 잡는다.

미신을 믿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도 자신의 일을 맞히기 시작하면, 갑자기 태도가 달라진다. 하지만 그럴 때 묵자의 일화를 떠올려보라. 운이 좋든 나쁘든 간에 대체 세상이 왜 나의 운에 맞춰 움직인단 말인가? 세상의 중심은 내가 아니다. 그것만 알아도 세상 많은 일에 마음이 편해진다.

내가 지금까지 쉬지 않고 노력해온 이유는 사람의 행동을 조롱하기 위해서도, 통탄하기 위해서도, 모욕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다. - 바뤼흐 스피노자

인류의 역사는 종종 무분별한 믿음에서 비롯됐다. 농경처럼 속은 것이기도 하고, 특정 사상처럼 희생한 경우도 있다. 어쨌든 그런 인류의 모습은 그다지 스킵틱(회의적)하진 않았다. 슬라보예 지젝은 이런 인간의 모습을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에서 '신념의 도약'이라고 표현했다. 닿을지 안 닿을지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믿음을 바탕으로 무작정 뛰어드는 행동, 이런 행동은 대부분 실패했지만 가끔 성공했고, 이는 역사의 단계를 넘어가는 선택이 되곤 했다. 앞으로도 인류는 이제까지 그래 온 것처럼 종종 위기에 처할 것이고, 신념의 도약을 해야만 하는 순간이 올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