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dGen's story
(2019-45) 호모데우스 [인문학] (유발 하라리) 본문
호모데우스
유발 하라리 저, 김명주 역, 김영사, 630쪽.
<사피엔스>라는 명저를 읽고 2년만에 호모데우스를 잡았다.
<호모데우스>도 괜찮은 책이긴 하지만 임팩트가 그리 크진 않다.
그래도 나름 재밌고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
책의 내용을 정리하기 전에 감상과 질문, 내 의견을 두서 없이 써본다.
일단 유발 하라리의 과거에서 현재까지의 정리와 해석은 매우 동의한다.
인류는 실존하지 않는 것들을 믿으며 사회를 키웠다.
처음에 그것은 신이었고, 이후엔 인본주의였다.
이후에 유발 하라리는 데이터교를 믿게 될 것이라고 했지만,
난 데이터는 수단이 될 뿐이고 우리가 신앙하는 것은 돈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미 우리는 돈을 신앙하고 있지만,
인본주의의 가치가 돈의 가치보다 높은 세상에서 그 가치가 역전된 세상이 될 것이다.
또 유발 하라리는 우리가 질병을 통제했듯이 앞으로 우리가 영생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나의 생각은 다르다.
인간이 질병을 통제하여 인간의 평균 수명이 엄청나게 증가한 것은 사실이지만
자연사의 시기를 늦추는 문제는 질병을 통제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과학이 엄청나게 발달했다고는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유기물과 무기물의 차이를 알지 못한다.
생명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내가 살아있다가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순간, 내 몸에 있는 원소들은 전혀 변화가 없지만
나의 생명은 사라진다.
내 뇌 안에서 흐르던 전기가 갑자기 정지되는 원인과 다시 전기가 흐르게 할 수 있는 방법을 모른다.
컴퓨터를 통한 인공지능이 개발된 시대에 살고 있지만,
아직 인간은 바이러스 하나, 아메바 하나, 풀 한 포기 만들어 낼 수 없다.
풀 한 포기에 들어있는 모든 원소를 알아내고 그 구조대로 조립할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된다 하더라도
그 물질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고, 앞으로도 매우 오랜 기간 인류에게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책을 읽으면서 예전부터 갖고 있던 질문들이 다시 떠올랐다.
생명이란 무엇일까?
인간에게 자유의지라는 것이 존재하는 걸까?
또 새로운 질문도 생겼다.
데이터와 알고리즘이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인간이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니게 될까?
책을 읽고 나니 미래를 예상하는 것이 훨씬 어렵게 느껴진다.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다.
이제 책 내용 정리.
인류는 기아, 역병, 전쟁을 거의 통제하게 되었다.
세계경제는 물질기반 경제에서 지식기반 경제로 탈바꿈했다. 전에는 부의 원천이 금광, 밀밭, 유전 같은 물질적 자산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지식이 부의 원천이다.
인류의 다음 과제는 우리 자신의 힘에 내재된 위험들로부터 인류와 지구를 보호하는 것이다.
우리가 지닌 예술적 창의성, 정치적 신념, 종교적 신앙심은 상당 부분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연료를 얻는다.
어디까지가 치료이고 어디부터가 성능 향상(업그레이드)인지 명확한 선은 없다. 의학은 언제나 표준 아래로 떨어진 사람들을 구하는 일로 출발하지만, 그 다음에는 같은 도구와 노하우로 표준을 뛰어넘을 수 있다.
역사 지식의 역설. 행동을 바꾸지 못하는 지식은 무용지물이다. 하지만 행동을 바꾼 지식도 곧 용도 폐기된다.
역사학자들이 과거를 연구하는 것은 그것을 반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에서 해방되기 위해서이다.
초인적 지능을 지닌 사이보그가 살과 피를 지닌 보통 사람들을 어떻게 대할지 알고 싶은가? 그렇다면 인간이 자기보다 지능이 떨어지는 동물 사촌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보면 된다.
인류는 7만년 전에 이미 지구에서 신이 되었다. 호모 사피엔스는 지구 생태계의 가장 강력한 독립변수다.
감각, 감정도 사실 단순한 알고리즘에 불과하다.
오늘날 생물학 이론에 따르면, 우리의 기억, 상상, 생각은 고차원적이고 비물질적인 영역에 존재하지 않는다.
마음이란 무엇인가? 마음에서는 뇌에서 일어나지 않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어떤 일이 일어난다면 어디에서 일어나는가? 그것은 뇌에서 일어난다.
인간에게 마음이 있다면 동물에게도 마음이 있다.
인류가 세계를 정복한 주요 요인은 여럿이 소통하는 능력이었다.
사피엔스들은 냉정한 수학적 논리를 따르기보다는 훈훈한 사회적 논리에 따라 행동한다. 우리는 감정의 지배를 받는다.
실재에는 제3의 층위가 존재한다. 그것은 상호주관적 실제이다. 상호주관적 실재들은 개개인의 믿음과 느낌보다는 여러 사람들 사이의 의사소통에 의존한다. 역사의 중요한 동인들 가운데 많은 것이 상호주관적 실재이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서로의 믿음을 강화하면서 자기 영속적인 고리를 만든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믿는 것을 믿지 않을 수 없을 때까지 상호 확증을 거듭하며 의미의 그물망을 팽팽하게 만든다. 그런데 몇십 년, 몇백 년이 지나면 의미의 그물망이 풀리고 그 자리에 새로운 그물망이 만들어진다. 역사를 공부한다는 것은 이런 의미의 그물망들이 생기고 풀리는 것을 지켜보고, 한 시대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였던 것이 후손에 이르러 완전히 무의미해진다는 것을 깨닫는 일이다.
허구는 우리의 협력을 돕는다. 그 대가로 우리가 감내해야 하는 것은 이 허구가 협력의 목표도 결정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가 매우 정교한 협력 시스템을 가졌다 해도, 그 시스템은 정작 허구적 실체의 목표와 이익을 위해 이용된다.
기업, 돈, 국가는 우리의 상상에만 존재한다. 우리는 우리를 도우라고 그것들을 발명했다. 그런데 왜 그것들을 위해 우리의 생명을 희생하는가?
허구(종교, 이데올로기,...)는 사회질서를 유지하고 대규모 협력을 조직하는 도구다.
근대는, 인간은 힘을 가지는 대가로 의미를 포기하는 데 동의한다는 것이다.
'자유'라는 신성한 단어는 알고 보니 '영혼'과 마찬가지로 의미를 밝히고 말고 할 것도 없는, 알맹이 없는 용어였다. 자유의지는 앞으로 우리 인간이 지어낸 상상의 이야기 속에만 존재할 것이다. 자유를 관 속에 넣고 못을 박는 것은 진화론이다. 진화는 불멸의 영혼과 아귀가 맞지 않는 것처럼, 자유의지라는 개념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자신의 욕망을 선택할 수 있는가?
현실에는 의식의 흐름만 존재하고, 욕망은 그 흐름 안에서 생겨났다가 사라질 뿐이다. 욕망을 소유하는 불멸의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내가 내 욕망을 결정론적으로 선택하는지, 무작위로 선택하는지, 자유의지로 선택하는지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
우리가 무언가를 결정할 때 다양한 내면의 목소리가 합쳐져 하나의 의견으로 통합·결정되는데, 그 목소리들의 일부는 사회적 편견들의 반복이고, 일부는 개인적 역사의 메아리이며, 일부는 유전적 유산의 발현이다. 이 모두가 합쳐져 보이지 않는 이야기를 창조하고, 그것이 알게 모르게 우리의 의식적인 결정에 영향을 미친다.
실제로 내 안 깊은 곳을 들여다보면, 내가 당연하게 여기는 이른바 단일한 실체는 상충하는 목소리들의 불협화음으로 흩어지는데, 그 목소리들 가운데 어떤 것도 '내 진정한 자아'가 아니다.
프랑스 혁명 이후 200년에 걸쳐 민주주의를 방어한 일반적 논증에 따르면, 민중에게 정치적 권리를 부여해야 하는 이유는 독재국가보다 민주주의 국가의 병사와 노동자들이 더 뛰어난 수행능력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시간이 갈수록 인간을 컴퓨터 알고리즘으로 대체하기가 점점 더 쉬워지는데, 알고리즘이 더 영리해지고 있기도 하지만, 인간이 전문화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알고리즘이 인간을 직업시장에서 몰아내면 전능한 알고리즘을 소유한 소수 엘리트 집단의 손에 부와 권력이 집중될 것이고, 전례 없는 사회적 불평등이 발생할 것이다. 아니면 그 알고리즘들이 스스로 주인이 될지도 모른다.
전 지구적 데이터 처리 시스템이 전지전능해지는 만큼, 시스템과 연결되는 것이 모든 의미의 원천이 된다. 사람들이 데이터의 흐름속에 합류하고 싶어하는 이유는 데이터 흐름의 일부일 때 자신보다 훨씬 더 큰 어떤 것의 일부가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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