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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rt of Movie

칠드런 오브 맨

재도담 2016. 10. 27. 07:53

최근 몇 몇 지인들로부터 추천을 받고 꼭 봐야겠다고 결심하고 의지를 갖고 본 영화. 

내가 느낀 영화에 대한 감상을 올려야 옳지만, 너무 좋은 영화평이 있어 그대로 옮겨 놓는다. 

아래는 이인엽 교수님의 영화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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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와 교회에서는 온갖 답답하고 황당한 소식들만 들려오고, 쓰고 싶은 글들이 있지만, 여유과 에너지도 별로 없는 요즘이다. 2006년에 봤던 영화 "칠드런 오브 맨(Children of Men)"이 한국에서 10년만에 개봉한다고 해서, 예전에 써놓은 글을 찾아보고 몇마디 추가해 보았다. 
너희가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라는 말씀처럼, 교회가 시대에 대한 예언자적 목소리를 잃어버린 지금, 때로는 좋은 영화한편이 어떤 설교나 신학서적보다 뛰어난 통찰력을 주기도 한다. 아직 못보신 분들은 관람을 강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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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드런 오브 맨 (Children of Man, 2006): 메시야의 탄생과 평화, 인류의 미래에 대한 진지한 성찰>
2007. 9.15 이인엽 (http://blog.naver.com/inyeop2)


테러와의 전쟁이 한창이던 2006년에 개봉한 영화는, 그리 멀지 않은 2027년의 미래를 배경으로 한다.
영화가 그리는 미래세계의 첫 번째 특징은 현재의 대 테러 전쟁, 불법이민자 문제 등이 극단화 되어, 국제질서가 무너지고 정부는 권위주의화 된 디스토피아적인 모습이다. 이때 세계에서 영국만이 질서를 유지하고, 전세계에서 피난민들이 몰려오는데, 영국 정부는 강력한 경찰력으로 난민들을 체포, 격리한다.
두 번째 특징은 어떤 알 수 없는 이유로 전세계에 18년째 새로운 아기가 태어나지 않고 있다는 것. 이때 18세가 된 가장 어린 소년이 사소한 다툼 끝에 살해되자 세계는 다시 한번 절망감에 빠져든다.

주인공 테오(클라이브 오웬)는 과거 권위주의 정부에 대한 반정부 투쟁 시 만났던 부인 줄리안(줄리언 무어)과 낳은 아들 딜런이 전염병으로 죽은 후, 현재는 이혼하고 혼자 살면서, 세상을 바꾸겠다던 희망과 열정을 잃고 정부의 하급 관리로 생활하고 있다.

그가 가끔 찾아가는 친구 야스퍼(마이클 케인)는 은퇴한 시사만화 작가인데, 언론인으로 대테러 전쟁을 비판하다 정보기관에서 고문을 당해 식물인간이 된 부인을 돌보며 숨어 살고 있다. 야스퍼의 집에서 카메라는 신문기사 스크랩을 흩어 나가는데, 그것은 현재의 대테러 전쟁과 이라크 전쟁 반대에 대한 기사로 시작해서, 영화의 속의 암울한 현실로 연결된다. 이는 영화가 제작되던 당시, 부시 정부의 무모한 대테러 전쟁이 파국적인 미래를 가져올 수 있음을 간접적으로 경고하고, 한편으론 인류의 미래를 위해 의식 있는 세계 시민들이 비판의 목소리를 낼 것을 촉구한다는 생각도 든다. 야스퍼의 죽음이나 난민들에 대한 가혹한 대우는, 법과 질서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권력의 폭력성을 잘 보여준다.

테오의 아내 줄리언은 그와 헤어진 이후에도 희망을 잃지 않고, 저항세력의 지도자로 살고 있는데, 어느 날 십 년 만에 그에게 나타나 한 사람을 해안까지 이동시키기 위한 가짜 통행증을 구해달라고 한다. 줄리언이 부탁한 흑인 소녀 키(클레어 호프 애쉬티)는 놀랍게도 전세계에서 18년 만에 처음 아기를 임신한 소녀이다. 그녀의 유일한 희망은 해안까지 이동해, 휴먼 프로젝트라는 것이 진행되는 'Tomorrow'라는 배에 탑승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함께 이동하던 중, 줄리언은 알 수 없는 폭력배들에게 살해되고, 결국 테오는 엉겁결에 키를 보호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영화는, 마구간에서 키가 테오에게 자신이 임신했다는 것을 처음 밝히는 장면이나, 아버지가 누구냐고 묻는 테오의 말에 키가 웃으면서 자기는 처녀라고 농담을 하는 장면, 그리고 Children of Men이라는 영화의 제목(예수는 자주 스스로를 사람의 아들-Son of Man-이라고 칭했음)등에서 노골적으로 메시야 예수의 탄생을 패러디 하고 있다. 임신한 아내(그러나 자신의 씨는 아닌)를 데리고 일종의 인종청소라 할 수 있는 헤롯의 박해를 피해 난민이 된 요셉처럼, 테오는 임신한 키를 데리고 불안한 여행을 떠난다.

인류의 운명을 건 아기의 탄생은 암울한 현실에 소망을 불러 일으키며, 흉포화된 인류에게 인간성을 회복시켜주는 상징이기도 하다. 한편 아기의 존재로 정치적 이익을 얻으려는 세력들에게는 욕망과 공포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더 이상 아기가 태어나지 않는다는 사실 앞에서 새 생명에 대한 갈망은 극대화 되는데, 이는 난민들이 인권 없이 무차별 살상되는 비인간적 현실과 대비된다. 18 년 만에 세상에 처음 태어난 아기의 존재 앞에 격렬하게 싸우던 반군과 군인들도 넋을 잃고 총성을 멈추는데, 생명과 평화에 대한 갈망이 표현되는 순간이다.

영화는 많은 기독인들이 인식하지 못하거나 간과하는 사실 - 즉, 예수는 정치를 하지 않았으나, 그가 처한 상황과 그의 존재가 지극히 정치적일 수 밖에 없었다는 것 - 을 다시 한번 상기 시켜 준다. 과거 로마제국의 잔혹한 식민지배와 피지배자들의 독립 투쟁이라는 유혈극 속에서 예수가 태어났다는 것을 기억해 볼 때, 만일 예수가 오늘 세상에 다시 온다면, 제국의 모순이 극대화 되는 변방, 즉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 팔레스타인에서 하층민의 아기로 태어나지 않을까?

상당히 철학적이고 신학적이며 정치적인 시각을 보여주는 이 영화, Children of Man은 큰 흥행은 하지 못했지만, 또 하나의 의미심장한 SF 영화로 기억될 것 같다.

P.S. 영화보고 글을 썼던 2006년 이후 10년만에 추가하는 몇마디.

이 영화가 나온것이 2006년이었었는데 국내에선 흥행성이 부족해선지 개봉하지 않았었고, 나는 2006년에 미국에서 감상하고 간단히 영화평을 썼던것 같은데, 금년(2016년)에 한국에서 처음 개봉을 한다고 한다니 반갑다. 
영화에서 묘사하는 정도 까지는 아니지만, 부시 정부의 등장, 9/11과 함께 시작된 테러와의 전쟁은, 아프가니스탄 전과 이라크 전, ISIS의 등장, 시리아 사태와 대량 난민 발생, 전세계의 테러 등으로 지속되고 있어서, 영화의 예측이 어느 정도 실현된 것 같기도 하다.

사담후세인이 대량살상 무기로 곧 미국을 공격할 것처럼 정보를 조작하고 정당성 없는 전쟁을 시작한 부시정부 인사들, 이라크 파병이 국익에 도움이 된다고 강변하던 우리나라의 학자들,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면 기독교 선교의 문이 열릴거라는 미친 소리를 하던 일부 기독교인들의 주장과 달리, 이라크는 미국에게 또 하나의 악몽같은 베트남이 되었고, 전쟁이 만들어낸 종파갈등과 후세인 정부가 사라진 진공과 혼란에서 분노한 수니파들을 중심으로 ISIS가 등장하고, 이어진 시리아의 내전속에 거대한 세력으로 부상했다. 시리아의 난민들이 유럽으로 몰려들고, 유럽 국가들에선 반동적인 극우파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기도 하다.

시리아 대량 난민 사태가 발생하자, 신앙 좋다는 미국의 보수 공화당 인사들은 기독교인 난민만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하기도 하고 (시리아는 다종교 국가로, 무슬림과 기독교인이 섞여있다), 대선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는 아예 무슬림은 당분간 입국 자체를 금지해야 한다는 황당한 주장을 하기도 했다. 
세상에 대해 조금만 고민해 보고, 화석화된 신학을 넘어 있는 그대로 성경을 읽어보면, 예수는 제국의 폭압하에 신음하던 식민지의 하층민으로 태어났고, 자신의 권력에 위협을 느낀 권력자가 자행한 인종청소와 영아학살을 피해 타국으로 달아난 난민이었음을 볼 수 있다. 한마리 잃은 양을 생각하던 예수와 달리, 나의 안전을 위협하는 단 한명의 테러리스트를 막기 위해서 99명의 불쌍한 난민이 죽어도 상관이 없다는 소위 신앙좋은 미국의 기독인들은, 사실 예수의 당시에 태어났다면 분명 예수의 가족을 거부했을 것임을 스스로 인증하고 있다.

화석화된 신학이 얼마나 무서운지, 오늘 성경을 읽는 기독인들은, 예수의 탄생과 삶과 죽음을, 당시의 모든 역사적 사회적 정치적 컨텍스트에서 분리해, 오직 나의 속죄와 영적 구원을 위한, 완결적인 신학적 결과물로만 이해하고 있기에, 오늘의 세상을 보면서 그 어떤 구체적인 적용점을 찾기도 힘들다. 모든 것이 예정되어 있었고, 그는 오직 나의 속죄와 구원을 위해 태어나고 죽어야만 했다고 생각하는 도식화된 설명은, 심지어 예수의 삶과 죽음에 대한 놀라움과 감동조차 사라지게 만든다.

너희가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라는 말씀처럼, 교회가 시대에 대한 예언자적 목소리를 잃어버린 지금, 때로는 좋은 영화한편이 어떤 설교나 신학서적보다 뛰어난 통찰력을 주기도 한다. 아직 못보신 분들은 관람을 강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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