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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22) 엄마가 믿는만큼 크는 아이 [육아] 본문

Report of Book/육아

(2016-22) 엄마가 믿는만큼 크는 아이 [육아]

재도담 2016. 8. 26. 09:02

엄마가 믿는만큼 크는 아이. 

기시미 이치로 저, 오시연 역, 을유문화사. 


234면이지만 거의 소책자 분량의 책. 그림이 많고 행간, 자간이 넓어서 두 시간이면 읽을 수 있다. 

짧지만 내용은 좋다. 지난 번 읽었던 『프랑스 아이처럼』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어 더 좋았다. 

단, 한 문장으로 책의 내용을 정리하자면, "아이를 나보다 아랫사람으로 취급하지 말고, 동등한 인격체로 대우하라."

고 할 수 있다. 




자신의 부모가 자신을 어떻게 키웠는지 떠올리면 아이를 키울 수 있다는 생각은 맹장 수술을 받은 적이 있으니 자기도 다른 사람을 수술할 수 있다는 생각과 다를 바 없다. 

아이를 키우다가 벽에 부딪히는 사람은 육아에 관한 기술이 부족해서 그런 거지 나쁜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야단치는 것과 때리는 것, 나아가 학대하는 것은 양적으로 다를 뿐이지 질적으로 동일한 행위다. 부모는 그 어떤 식으로도 아이를 완력으로 억누르지 않고 키우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아이가 부모에게 반항하는 것은 부모가 아이보다 우월한 위치에서 아이에게 야단치거나 명령하거나 아이를 지배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아이는 부모에게 자신이 무엇을 원하지 않는지 정확하게 말로 주장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사실은 먼저 부모가 그 방법을 알고 있어야 한다. 

아이가 적절한 행동을 할 때, 부모는 대부분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지나친다. 그러면 아이는 어떻게든 부모가 자신을 쳐다보게 하기 위해 문제 행동을 시작한다. 

야단을 많이 맞으며 자란 아이는 이것이 야단맞을 일인지 아닌지만 생각한다. 또 야단만 안 맞으면 뭐든지 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결국에는 자신의 행동이 적절한지 아닌지를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야단 맞을지 맞지 않을지만 신경 쓰다보면 야단맞을까 봐 두려운 나머지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지만 신경 쓰게 된다. 

어른이 아이의 부족한 점이나 실패한 부분을 지적하면 비록 야단칠 의도가 없다 해도 아이는 비판당했다고 느낀다. 

실패하지 않으려고 소극적으로 행동하는 아이보다 적극적으로 행동하다가 실패하는 아이가 훨씬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어떤 사람을 야단치면 그 사람과 거리가 생긴다. 아들러는 분노란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는 감정이라고 했다. 

어른이 아이를 대등하게 보지 않기에 아이를 야단치거나 모욕하는 말을 하는 것이다. 어른끼리라면 상대에게 어떤 점을 고치라고 요구할 수는 있어도 다짜고짜 야단칠 수는 없을 것이다. 

야단만 치고 어떻게 하면 좋은지, 뭐라고 하면 좋은지 가르쳐 주지 않으면 똑같은 일이 반복될 뿐이다. 

명령형인 '~해' 또는 '~하세요'라는 말은 상대방에게 거절할 여지를 주지 않는다. 그러면 '싫다'고 말하지 못하는 그 사람은 감정적으로 반발하게 된다. '~해 줄 수 있나요?' 또는 '~해 주면 좋겠어요'라는 식으로 상대방이 결정할 수 있도록 주도권을 주는 것이 좋다. 

아이가 실수를 했을 때 악의를 갖고 한 것은 아니다. 이럴 때 야단치면 아이는 그저 위축될 뿐이며 그때 배워야 하는 가장 중요한 것을 배우지 못한다. 이럴 때는 아이에게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지 알고있냐고 물어보고 모른다고 하면 가르쳐 주면 된다. 아이가 실수를 통해 어떻게 하면 좋을지 배울 수 있다면 아이를 야단칠 필요가 없다. 먼저 최대한 원래 상태(상황)로 돌려놓는다. 그리고 앞으로 같은 실수를 하지 않게끔 대화를 나눈다. 이 두 가지를 하면 아이를 야단칠 필요가 없다. 

위압적인 태도를 취하는 사람은 분노의 칼끝을 상대방에게만 향하지 않고 이리저리 휘두르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은 마치 자신에게 화를 내는 것 같이 느끼게 된다. 

야단치는 대신에 어떻게 대하는 것이 좋은지 알지 못하면 아이와의 관계를 더는 진전시킬 수 없다. 

칭찬받으며 자란 아이는 칭찬하는 사람이 없으면 적절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 그 자리에 아무도 없어서 칭찬받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자신이 하는 일이 적절한지 아닌지를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아이가 되어야 한다. 

어른과 아이는 같지 않다. 그러나 같지는 않지만 인간으로서는 대등하다. 자신이 아이와 대등하다는 것을 알고 아이를 존중하며 전폭적으로 신뢰한다면 아이를 완력으로 통제할 필요가 없으며 야단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승인욕구는 누구에게나 있는 감정이지만 승인받는 것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가장 큰 문제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 또는 하고 싶지 않은 일이 있어도, 야단맞고 싶지 않은 아이 또는 칭찬받고 싶은 아이는 자신의 의사가 아니라 부모나 교사의 의사를 우선시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아이는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사는 존재가 아니므로 부모에게 칭찬받기 위해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단념하면 안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아이가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아이에게 용기를 준다는 것은 한마디로 아이가 인생의 과제에 도전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는 뜻이다. 

아무리 싫어도 지금의 나를 다른 나로 교체할 수는 없다. 아무리 성격적으로 모가 난 부분이 있다 해도 앞으로도 그런 자신과 함께하지 않으면 안되므로 자신을 좋아할 수 없는 사람은 행복해질 수 없다. 그러니 자신을 좋아하라. 

자신에게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고 자신을 좋아할 때만 '과제'에 도전하려는 용기를 낼 수 있다. 사람과 관계하면서 상처받거나 배신당하거나 슬퍼하는 것을 회피하면 깊은 관계로 발전하지 못한다. 그리고 깊은 관계로 발전하지 못하면 삶의 기쁨도 얻을 수 없다. 

'이런 나도 남에게 도움을 줄 수 있구나'하고 생각할 때 사람은 자신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고 그런 자신을 좋아하게 된다. 따라서 아이가 그렇게 생각할 수 있도록 부모는 아이에게 '고마워'라거나 '도움이 됐어'라고 말해줘야 한다. 

아들러는 '보통으로 사는 용기'를 말했다. 이것은 평범해지라는 의미가 아니라 뛰어날 필요도, 나빠질 필요도 없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라는 뜻이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을 '자기 수용'이라고 한다. 아이를 있는 그대로의 상태로 인정할 수 있으면 아이가 부모의 이상과 동떨어진 모습이어도 신경 쓰지 않게 된다. 가령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아도 학교에 가지 않아도 무조건 살아있다는 것에 기뻐할 수 있다면 부모가 아이에게 요구하는 수준은 낮아진다. 그렇게 되면 어떤 일에도 '고마워'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아들이 초등학생이었을 때 어느 날 밤 아이가 '오늘 고마웠어'라고 말해서 놀란 적이 있다. 그날은 특별하게 아들에게 뭔가 해 준 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들은 단지 함께 지낸 것에 대해 고마웠다고 한 것이었다.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자신과 타인을 보는 방식을 '생활 양식'이라고 부른다. 타인을 '필요할 때 자신을 지원할 용의가 있는 친구'라고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타인을 친구로 인식하고 그 친구에게 공헌함으로써 자신이 가치 있다고 여기며 타인과의 관계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생활 양식을 선택하라고 권장한다. 
그렇다면 아이가 좋은 생활 양식을 선택하기 위해 부모가 어떤 지원을 할 수 있을까? 부모가 '아이의 친구'가 되어 주면 된다. 설령 아이의 친구가 부모 외에 한 명도 없다 해도 아이가 부모만은 자신의 친구라고 생각하게 되면 그 아이는 반드시 변한다. 먼저 부모가 아이의 친구가 되어야 한다. 

육아와 교육의 목표는 '공동체 감각을 육성하는 것'이다. 공동체 감각이라는 것은 '타인에 대한 관심'이라는 뜻이다. 자기에 대한 관심을 타인에 대한 관심으로 바꾸는 것이 공동체 감각을 육성한다는 것의 가장 기본적인 뜻이다. 

용기가 있는 아이는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지 신경쓰지 않는다. 또 과제를 해결하여 자신을 좋게 보이려고 하지도 않는다. 과제를 달성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아이가 평가받거나 실패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타인과의 경쟁에서도 자유로워진다. 

자신이 공동체의 중심에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고 있는 아이는 타인이 자신에게 특별히 주목하지 않아도 불평하지 않는다. 

타인에게 관심이 있는 사람은 타인이 자신에게 무엇을 해 주는지가 아니라 자신이 타인에게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관심을 갖는다. 

'문제 행동'은 공동체에 실질적으로 피해를 입히는 행동으로 정의한다. 문제행동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바람직한 행동도 아닌 경우를 '중성 행동'이라고 부른다. 중성 행동에 대해서는 본인의 의지를 존중해야 하므로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개입할 권리는 없으며 야단칠 필요도 없다. 

사실 아이는 어른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빠른 시기에 스스로 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도 부모가 계속 아이의 과제를 대신 해주면 아이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자립하지 못한다. 

부모의 과제와 아이의 과제를 분리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이들은 '본래 자신이 해야 하는 과제'를 하지 않게 된다. 육아의 목표는 아이가 자립하는 것이다. 

'중성 행동'에 대해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아이의 과제를 공동의 과제로 두도록 제안한다. 예를 들어, "요즘 널 보면 공부를 잘 안하는 것 같아. 그에 관해서 한번 같이 이야기를 좀 하고 싶은데, 괜찮겠니?", "지금 사태가 네가 생각하는 만큼 낙관적이지 않지만 언제든지 힘이 되어 줄테니까 말하고 싶어지면 꼭 말해주렴." 누구의 과제인지, 그리고 부모와 아이의 관계는 대등하다는 것을 확실하게 이해하지 못하면 지원이 아니라 개입이 되어 버린다. 부모와 아이의 관계가 대등하고 과제를 분리할 수 있다면 그것은 지원이지만, 부모와 아이의 관계가 상하 관계고 과제를 분리할 수 없다면 그것은 개입이다. 가장 좋은 것은, 부모가 아이의 과제를 공동의 과제로 삼는 것보다 아이가 자신의 과제에 스스로 도전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최종 목표는 과제의 분리가 아니라 협력하며 사는 것이다. 부모가 '시켜서 자립한' 아이는 자립한 것이 아니다. 부모가 할 수 있는 것은 아이가 '자립하는' 일을 지원하는 것뿐이다. 

아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이를 존중하는 것이다. 아이를 존중하는 데는 이유가 필요 없다. 문제가 있든 부모의 이상과 다르든 아이가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고마운 일이다. 이 세상에는 억지로 얻을 수 없는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사랑'과 '존중'이 그것이다. 

우리는 '이 아이는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다', '이 아이와 나는 지금 이렇게 함께 있지만 결국 언젠가는 헤어져야 할 날이 온다'라는 사실을 잊고 지낸다. 하지만 '그 때까지 하루하루를 소중히 여기고 사이좋게 존중하며 살자'라는 마음가짐을 매일 성실하게 되새기자. 아이가 자립하는 날이 아이와 헤어지는 날이다. 

신용은 믿을 만한 근거가 있을 때 믿는 것이다. 반면 신뢰는 무조건이다. 믿을 만한 근거가 없을 때도 믿는 것이다. 신뢰한다는 것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나 앞으로 일어날 일에 불확실한 부분이 있을 때 그 잘 모르는 부분을 자신의 주관으로 보완하는 것이다. 

부모만은 아이를 신뢰하고 아이의 친구가 되어 주어야 한다. 

'내가 도와줄 게 있으면 말해주렴'하고 말할 수는 있다. 그러나 아이가 도와달라고 요청하지 않으면 부모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부모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아이는 고난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고, 지켜보는 용기를 갖자. 

용기를 주는 것은 지금까지 보아 왔듯이 아이가 인생의 과제를 해결할 능력이 있다는 자신을 가질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 다른 사람을 친구라고 생각할 수 있게끔 지원하는 것이다. 즉, 아이 자신이 판단하여 자신의 인생의 과제에 도전하게끔 도와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