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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 이상한 정상 가족 [사회] (김희경) 본문

Report of Book/사회

(2022-02) 이상한 정상 가족 [사회] (김희경)

재도담 2022. 1. 4. 16:31

선진국 중 한국만큼 부모가 자녀를 마음대로 휘두르는 친권이 강한 나라가 없고, 아이들의 보호·양육에서 소위 공공의 역할이 이토록 희박한 나라가 드물다. 
한국은 참 이상한 나라다. 태어나는 아이의 수가 계속 줄어들어 '국가소멸'을 우려하는 판국에 왜 하루가 멀다하고 아이를 버리며 해외입양을 보내는걸까? 왜 아동학대와 그로 인한 사망, 가정 내 아동학대는 줄어들지 않는가? 아이의 수는 줄어드는데 왜 아이들의 놀이와 수면 시간을 빼앗는 사교육비 지출은 계속 늘어나는가? 왜 여전히 양육은 오로지 엄마의 책임인가? 일하는 여성들은 왜 '독박육아'로 생고생하다 일자리를 포기해야 하나?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는 이 상황들은 서로 상관없는 별개의 문제들일까?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는 결혼제도 안에서 부모와 자녀로 이뤄진 핵가족을 이상적 가족의 형태로 간주하는 사회 및 문화적 구조와 사고방식을 말한다. 바깥으로는 이를 벗어난 가족 형태를 '비정상'이라 간주하며 차별하고, 안으로는 가부장적 위계가 가족을 지배한다. 정상성에 대한 지나친 간오로 가족이 억압과 차별의 공간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가족 안에서 가장 약한 사람의 아주 작은 권리조차 보장되지 않는다면 더 큰 세계에서 발전하려는 노력도 헛된 일이 될 것이다. 

체벌과 학대는 엄연히 다르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끔찍한 학대와 훈육 목적의 체벌이 무슨 상관이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현실의 답은 '상관있다'이다. 맞는 아이들에겐 체벌의 이유가 사랑이든 분노든 다를 게 없다. 체벌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큰 이유는 아이들에게 폭력도 사랑이라고 가르치며 가해자의 논리를 내면화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소중한 대접을 받지 못하면 스스로를, 그리고 다른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키우지 못한다. 

<유엔아동권리협약>은 어린이를 훈육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던 기존 시각에서 어린이가 연약할지라도 어른과 동등한 가치를 지닌 인간이고 권리의 주체라는 시각으로 인식의 전환을 이루어냈다. 유엔아동권리위원회는 체벌을 "아무리 정도가 가볍다 해도 물리적 폭력이 사용되고 이로 인해 어느 정도의 고통이나 불편함을 야기하는 모든 벌"이라고 정의했다. 여기에는 신체적 체벌 뿐 아니라, "무시하기, 창피주기, 비난하기, 책임 전가하기, 협박하기, 겁주기, 조롱하기" 등도 비신체적 체벌의 예로 제시됐다. 
가정 내 체벌금지를 법에 명시해야 하는 이유는 부모들을 범법자로 만들려는 게 아니라 아이들도 성인들과 똑같은 정도로 모든 종류의 폭력에서 법적 보호를 받을 권리를 갖고 있음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다. 

아동학대의 원인은 가족 형태(한부모, 조손, 이혼, 재혼, 다문화, 새터민, 장애인 가정 등)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양육지식 및 기술부족, 사회적 고립, 우울증, 게임 중독, 양육 스트레스, 경제적 사정 등에 있다. 아동학대를 예방하기 위해 특정 형태의 가정을 지원하는 것보다, 학대의 원인이 되는 부모의 문제들을 찾아내어 교육하고 지원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아이들이 가장 간절하게 원하는 것은 '놀 권리'다. 경쟁과 수익 창출이 지상과제일 때 가장 먼저 사라지는 장소는 공적인 삶이 이뤄지는 곳(놀이터,...)이기 십상인데 그 대가는 크다. 목적 없이 놀면서 아이들은 낯섦에 대한 두려움을 이기고 차이를 협상하고 갈등의 타협점을 모색한다. 그렇게 민주적인 마음의 습관을 키운다. 그런 물리적 공간이 아이들에게 필요하다. 

한국 사회에서 부모가 자신의 뜻대로 자식을 '처분'하는 가장 극단적인 행위가 지금도 간간이 발생하는 부모의 자녀 살해 후 자살이다. 언론은 이를 곧잘 '가족 동반자살'이라 부르지만, 이는 엄연히 잘못된 표현이다. 아이들은 스스로 죽음을 택하지 않았고, 부모가 자식을 소유물처럼 여기는 관점이 베어있는 용어다. 개인이 자신의 목숨을 끊는 잘못된 선택을 하더라도 자녀의 목숨까지 끊게 하는 것은 명백한 살인이며 자녀를 부모의 소유물로 바라보는 뒤틀린 문화의 극단적 표현이다.
부모의 자녀살해 원인중 하나는, 사회가 남겨진 아이들에게 최소한의 인간 대접을 하며 성장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이라는 믿음의 부재다. 사회 양극화와 가족에게 모든 걸 떠넘기는 구조, 자녀 양육이 거의 전적으로 핵가족 내 부모의 성별 분업에 달려 있고, 위기 상황에 직면했을 때 부모가 없는 자녀는 정상적 사회 성원으로 자라기 힘든 사회구조. 이 구조의 가장 밑바닥에 아이들이 깔려 목숨을 잃고 있다. 

왜 미혼모만 있고 미혼부는 없을까? 현행법이 직접 아이를 버린 행위를 한 사람만 처벌하기 때문이다. 친부에게 임신 사실을 알렸지만 도움을 거절당해 아이를 유기했을 때도 친부는 법적 책임이 없다. 
아동인권의 관점에서 보아도 미혼모의 권리 보장과 지원은 절실하다. 성인과 달리 취약한 특징을 가진 아이들의 인권에 있어서는 '부모'의 지위에 대한 차별이 곧 아이에 대한 차별이다. 

출산율이 높은 나라들은 그렇지 않은 나라에 비해 혼외출산 비율이 높은데, 그런 나라들은 혼외출산에 대한 차별과 멸시가 없고, 양육을 지원하는 정부 정책이 도덕적 판단 따위와 무관하게 중립적이다. 부모가 다 있는 가정보다 일, 양육의 동시 유지가 아무래도 불리한 미혼모가 가난의 수렁에 빠지지 않도록 직업 교육, 훈련 서비스를 제공하고 보육시설 이용에서도 우선권을 부여해준다. 

한국 입양제도의 가장 큰 문제는 입양절차와 제도 운영의 책임을 공적 기관, 즉 국가가 아니라 민간이 맡고 있다는 것이다. 

왜 우리 사회의 가족은 개별성을 존중하지 못할까. 아이의 개별성에 대한 존중이 없으니 과도한 통제와 체벌, 학대, 과보호 등 관계에서 신체적, 정서적 폭력이 잦다. 또 왜 다양성을 수용하지 못할까. 나와 다른 사람을 내치는 배타적 태도와 차별, 편견은 왜 약화되지 않을까. 

근대화 과정 내내 국가가 '선 성장, 후 분배'의 논리하에 거의 모든 사회 문제를 가족에게 떠넘겼다. 사람을 먹이고, 키우고, 보호하고, 가르치고, 치료해주고, 부축해주는 그 모든 일들이 전부 가족의 책임이었다. 한국의 많은 사회제도들은 개인이 아닌 가족을 전제로 설계되었으며 가족주의 원리로 작동하고 있다. 부양의무제로 인한 부작용이 많은데도 이 제도가 폐지되지 않는 이유는 "아직도 가족이 부양을 책임져야 한다는 강한 가족주의 전통"이 우리 사회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교육, 아이 돌봄과 관련된 거의 모든 정책들도 가족주의를 전제로 설계됐따. 사회정책이 가족 단위로 설계되는 방식이 지속되면 가족을 형성치 못한 개인, 가족에게서 충실한 지원을 받지 못하는 개인에게는 사회가 또다시 불이익을 가하는 셈이 된다. 

가족주의를 떠나서 보편적으로 부모와 자녀의 심리적 분리는 부모뿐 아니라 자녀에게도 어려운 일이다. 자신 안에 내면화한 부모의 모습과 싸우고, 달래고, 도망치고, 협상하고, 이해하는 과정이 곧 사람이 자기 자신이 되어가는 성장의 과정이다. 

어른의 책무는 아이들에게 폭력이나 협박, 위협에 기대지 않고도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있음을 가르치는 것이며, 정부의 책무는 비폭력적으로 아이를 키우는 게 가능한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그러려면, 체벌을 금지하는 법과 함께 부모가 필요로 하는 지원을 정부가 제공하고, 정부와 사회가 합심하여 부모가 아이들에게 좋은 역할 모델이 될 만한 시간과 에너지를 갖기 위해 필요한 환경을 체계적으로 조성해야 한다. 

삶은 개인적으로, 해결은 집단적으로 
진정한 인간관계는 서로에게 의존하지 않고 불평등한 권력관계에 놓이지 않는 개인들 사이에서만 가능하다. 자율적이고 평등한 개개인 사이에서만 사랑과 우정 같은 인간적 교류가 이루어진다. 심지어 부모와 자녀 관계에서도 서로 의존적이고 굴욕을 강요하는 권력관계가 존재하는 한 진정한 사랑은 불가능하다. 국가는 이런 굴욕감에서 개인을 해방시킬 의무가 있다. 
스웨덴의 중요한 이데올로기 중 하나는 개인적 삶의 독립성을 보장하되 개인 삶의 질은 집단적 책임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전 세계에서 가장 개인주의적 사회라 할 수 있는데도 스웨덴의 개인주의는 흔히 말하는 아노미 상태, 소외, 신뢰의 붕괴로 나아가지 않는다. 

돌봄은 공적 가치를 지닌 공공재다. 특정한 성, 계급에게 일임해서 해치울 일이 아니라 민주적 정부와 시민 모두가 책임져야 하는 과제다. 

공공성이 강화될수록 사생활의 자유는 오히려 커진다. 

 

 

함께 생각해 볼 문제.

1. 자녀의 훈육을 어디까지 허용할 수 있을 것인가? 가르침? 혼냄? 손들고 서있기? 방에 가두기? 손바닥 체벌? (p.47) 
- 이 책을 읽기전까지는 물리적 체벌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만 있었고, 정서적 체벌(?)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무시하기, 창피주기, 비난하기, 책임 전가하기, 협박하기, 겁주기, 조롱하기 등도 비신체적 체벌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앞으로 나 자신부터 매우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만, 체벌 없이 훈육만으로 교정되지 않는 아이의 잘못은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고민이 된다. 모든 아이들이 말을 잘 듣는다면 얼마나 좋을까만은, 세상에 그렇지 않은 아이도 너무 많지 않나. 

2. 한국에서 가장 부족한 것을 꼽으라고 한다면 놀이문화?를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아동/청소년들도 게임이나 SNS 이외 신체를 사용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건강하게 노는 문화가 실종되었고, 성인들의 놀이문화도 모여서 술 마시는 것 이외에 특별한 놀이문화가 없다. 몸도 마음도 건강해지는 놀이에 대해서 아는 게 있다면 나눠보자. (p.73) 

3. '아동 최선의 이익'에 대한 판단 주체는 누가(부모 vs. 국가) 되어야 할까? (p.107) 이 책에서는 부모가 아동의 안녕을 방해한다고 판단될 때 국가가 그 자리에 대신 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부모가 아동의 안녕을 방해한다는 판단은 누가 어떻게 해야하나? 만약 국가가 부모 대신 아동의 이익과 안녕을 결정하게 될 경우 생기는 문제는 어떤 것이 있을까? 

4. 부모의 의무와 권리는 무엇인가? (p.108) 
- 부모의 의무는 아이가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환경을 제공하는 것. 신체적, 정서적, 지적으로 자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각 개인이 그것을 감당하기 힘들다면 국가가 그 의무를 이어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반면, 부모의 권리는 없는 것같다. 

5. 미혼모/미혼부를 위해 국가와 사회는 어떤 노력을 할 수 있을까? 
- 영유아에게 각종 혜택을 줄 때 보호자의 자격요건을 까다롭지 않게 바꾸면 좋겠다. 국공립 어린이집과 유치원을 많이 만들고 양질의 돌봄 서비스를 제공한다. 

6. 왜 한국의 부모들은 자녀의 교육에 목숨을 거는가? 건강한 모습은 어떤 모습인가? 그렇게 되려면 무엇이 어떻게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나? 
- 가장 큰 이유는 부모들이 자식을 분리시켜서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식을 자신의 소유물, 또는 자신의 전리품이라고 생각하는 문화가 여전히 많이 남아있다. 자식은 남이다. 부모의 역할은 자식의 인생을 대신 결정해주고 고난을 대신 물리쳐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그런 과정을 "잘 겪을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다. 부모가 자식을 "타인"이라고 생각하는 인식의 전환이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7. "공공성이 강화될수록 사생활의 자유는 오히려 커진다"(p.264)고 한다. 이 말에 동의하는가? 
- 여기서 말하는 "공공성"을 "복지"로 치환해서 생각해봐도 좋을 것 같다. 복지가 강화되면 사생활의 자유가 커진다는 말에 동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