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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24)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 [에세이] (정문정) ★ 본문

Report of Book/에세이

(2021-24)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 [에세이] (정문정) ★

재도담 2021. 5. 23. 20:39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 

정문정 저, 가나출판사, 264쪽.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 : 
① 문제가 되는 발언임을 상기시켜준다. 감정을 싣지 않고 최대한 건조하게 말한다. 
   "제3자가 들으면 오해하겠는데요?", "당사자가 들으면 상처받겠네요." 
② 되물어서 상황을 객관화한다.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것처럼 천진난만하게 물으면 더 좋다.
   "저 사람은 얼굴이 이타적이다." → "아, 저 사람이 못생겼다는 뜻이죠?"
③ 상대가 사용한 부적절한 단어를 그대로 사용해 들려준다.
   "영감탱이는 욕이 아니라 친근한 표현이라서 썼다." → "저도 친근하게 영감탱이라고 불러드릴까요?" 
④ 무성의하게 반응한다. 아예 답을 하지 않거나, 단답형으로 건성으로 답한다.
   읽씹하거나,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 정도. 
⑤ 유머러스하게 답한다. 
   "우와, 조선시대에서 오셨나봐요. 상평통보 보여주세요.", "요즘은 잔소리하려면 선불 내고 해야된다던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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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서 밑줄 친 부분이 참 많다. 아래는 밑줄 그은 부분. 

나이를 먹어가면서 나는 사람들의 이상한 말에 분명히 대처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무례한 사람들은 내가 가만히 있는 것에 용기를 얻어 다음에도 비슷한 행동을 계속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삶에서 만나는 다음 사람들에게도 용인받은(그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행동을 반복했다. 또한 나는 그런 말에 대응하지 않음으로써 패배감을 쌓아 갔고, 그렇게 모인 좌절감은 나보다 약자를 만났을 때 터져 나오기도 했다. 갑질의 낙수 효과다.

사람은 역할에 따라 적절한 옷으로 갈아입는데, 어느 순간부터 '갑의 옷'을 벗는 걸 잊은 것이다. 회사에서 대표인 사람이 집에서나 친구를 만날 때조차 대표처럼 행동하는 모습을 많이 봤다. 나이가 들고 사회적 지위가 올라가면서 행동을 제지하는 사람들이 줄어들자 자신이 옳다는 용기가 생긴 것이다. 그러면서 무례함이 걷잡을 수 없이 부풀어 올랐고, 풍선처럼 부푼 무례함으로 높이 떠오르자 모든 사람이 그의 발아래 있게 됐다.

나쁜 남자를 계속해서 만나는 여자들에게 해주는 조언. 
첫째, ‘내 인생은 원래 불행해’라고 말하는 걸 그만둬라. 
둘째, 사소한 것부터 거절을 연습해라. 거절도 근육이 필요해서 사소한 것부터 연습하면 갈수록 쉬워진다. 거절을 해도 별 일 안생긴다. 
셋째, 나는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존재라는 것을 믿어라. 인간은 어떤 조건때문에 사랑받을 가치가 생기는 것이 아니고 존재 자체만으로 사랑받을 가치가 충분하다.

'희생했다'고 하는 생각은 이상한 보상 심리를 볼러 온다. 겉으로 사소해 보이는 문제로 싸우게 되더라도, 싸우다 보면 일이 커지는 경우가 많다. '착한 사람'의 내면에는 그동안 참아온 것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기 때문이다. 자존감이 줄어드는 만큼 피해의식이 커지기 때문에 걸핏하면 "네가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 있어!"를 외치게도 된다. 돌이켜보니 혼자 과도하게 기대하고 섭섭해한 경우가 많았다.

누구나 어릴 때는 부모에게 전적으로 의존한다. 착한 아이가 되어서 사랑과 인정을 받고 싶어 한다. 문제는 어른이 된 후에도 그 심리에 지배당할 때 발생한다. 아이는 부모에게 기쁨을 주는 만큼 실망도 안기며 자란다. 부모의 기대는 언제나 과도하고 자녀의 생각과는 어딘가 조금씩 빗나가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한 인간이 주체적인 존재로 성장하는 데는 이 같은 부모와의 투쟁이 꼭 필요하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과도한 억압을 받아 내면의 목소리를 듣는 데 실패하면, 그는 어른이 되어서도 상대의 말을 잘 들어 착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는 것에 집착하게 된다.

후려치기 또는 가스라이팅은 피해자가 스스로를 믿지 못하고 의심하게 유도해 가해자에게 의존하게 하는 명백한 감정적 학대다. 가해자는 이런 통제를 통해 자신을 떠나지 못하게 하고, 정상적인 인간관계를 맺는 방식에 까지 해를 입혀 사회생활을 어렵게 한다. 
가스라이팅의 피해자는 대개 다음과 같은 징후를 가진다. 첫째, 사과를 지나치게 자주 한다. 모든 책임과 의무를 자신에게 집중시키는 것이다. 둘째, 스스로 판단하여 결정을 내리기가 어려워진다. 자신에 대한 믿음이 없기에 다른 사람의 결정만을 기다리게 된다. 셋째, 자책을 많이 한다. 자신이 너무 예민하고 상태가 나빠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넷째, 폐쇄적인 성격이 된다. 친구나 가족에게 파트너의 행동을 숨기거나 변명 위주로만 일관한다. 또는 거짓말을 지나치게 많이 하거나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다.

"사람은 모든 질문에 대답하지 않아도 된단다. 모든 것에 대답하려고 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잃어버린단다. 자기 자신을."

오랫동안 고민해 선택한 결과가 대단하지 않더라도 자신조차 시시하게 여기지 말라는 것, 같은 방식으로 다른 사람이 선택한 인생에 대해서도 시시하게 여기지 말자. 한 가지 일에 실패해도 내 전부가 엉터리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이런 담담한 긍정은 자신에게 계속해서 질문하고 그 대답을 오래도록 찾아온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 같은 통찰이 아닐까?

모든 관계는 시간이 흐르면서 계속 변하기 마련이고, 특히 연인 관계 초기의 열정이 친숙함으로 바뀝니다. 그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뭔가 변화를 모색해 관계를 유지하고 성장시키고자 고민하는 사람들은 '권태기'란 말을 쓰지 않아요.

기억 또한 보정된 사진 같아서 사실 그 자체보다는 편집과 자기애가 꾸덕꾸덕 뭉쳐 있다. 그래서 인생에서 무언가를 회상할 때는 '상처를 주었다'는 기억보다 '상처를 받았다'는 기억이 압도적으로 많아지는 것 같다. 
인터넷에서 '진상', '갑질' 같은 기사와 그 댓글을 볼 때마다 생각한다. 갑질을 당했다는 사람은 차고 넘치는데 어째서 갑질을 했다는 사람은 찾기 힘든 걸까? 나도 그런 적이 있을 텐데, 잊고 싶어서 잊은 거겠지. 기억 보정이란 게 이토록 위험하다.

내 인생은 롱테이크로 촬영한 무편집본이다. 지루하고 구질구질하게 느껴진다. 반면 다른 사람의 인생은 편집되고 보정된 예고편이다. 그래서 멋져 보이는 것이다. 그걸 이해하지 못하면 세상에서 나 혼자만 힘든 것같이 느껴진다.

행복한 사람은 자기를 알아달라고 남을 괴롭히지 않는다. 스스로 충만하면 남의 인정을 갈구할 필요가 없으니까.

나는 이 평강공주식 이야기가 평범한 대부분의 인간을 괴롭히고, 심지어 인간관계나 조직문화를 망치기까지 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강요나 계몽 같은 방식으로는 바뀌지 않는다. 자기 스스로 달라지기로 마음먹고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기 위해 극도의 노력을 해야만 바뀐다. 대단한 정신력이나 의지가 없는 보통의 사람들은 대부분 잠깐 개선되는 것처럼 보이다가도 예전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특히 그것이 금연이나 다이어트 수준의 습관을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폭력성이나 우울증, 인격장애처럼 핵심 인격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나는 공감 능력이 부족한 사람은 사적으로 만나지 않는다. 그들이 주변을 병들게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공감 능력이 부족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아무렇지 않게 피해를 준다. 딱히 악의가 있는 것은 아닌데도 결과적으로 그렇게 된다. 다른 사람들을 자신과 같은 인격체로 여기지 않고 의사 결정을 하기 때문이다. 문제가 발생해 비판을 받으면 상대 쪽으로 튕겨내 버리는 데에도 능하다. 공감 능력이 부족한 사람과 오래 관계를 맺으면, 그렇지 않았던 사람도 정서적으로 불안해지며 자존감이 급격히 낮아진다.

취향이 자신을 끊임없이 부정하고 단지 남들에게 인정받기 위한 것일 뿐이라면, 일기를 검사받는 것과 뭐가 다를까. 내가 정말 좋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솔직하게 표현하고 남들의 취향에 대해서도 무시하지 않아야 세상은 여러 색으로 다양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서로 '취존(취향 존중)'부터!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들으려면 내 목소리를 낮춰야 한다. 판단을 뒤로하고 자세히 살펴보는 것은 의외로 어려운 일이며, 그렇기에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치 있는 일 중 하나다. 무언가를 보고 더 많이 느끼는 사람은 더 많이 생각한 사람이고, 더 많이 생각한 사람은 더 많이 보는 사람일 것이다. 더 많이 보는 사람은 여러 입장을 모두 보는 것이나 다름없으므로, 자신이 살아보지 않았던 삶까지 살아볼 수 있다. 그렇게 하면 우리도 유일한 사람이 될 수 있겠지.

평정을 유지하면서 나만의 고유한 공간 감각을 고수하기란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만큼 가치 있는 일이기도 하다. 이는 결국 '나를 지키는 법'과도 관련되기 때문이다.
의도를 알 수 없는 질문을 받았을 땐 섣불리 대답하지 말고 되물어보고 상대의 의도를 파악해라. 
대답하기 꺼려지는 질문에는 상대의 의견을 묻는 것으로 답을 피해갈 수 있다.

일상에서 무례한 사람이 당신을 평가하거든 '저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하고 넘겨버려라. '그의 말이 사실일지도 몰라' 하면서 불안해할 필요가 없다. 그는 나를 잘 모를뿐더러 나에 대해 열심히 생각하지도 않는다. 몇 년 후 "그렇게 말한 적이 있는데 기억하세요?"하고 물어보면 분명 기억하지도 못할 것이다. 그런 말을 곱씹는 게 억울하지 않은가? 나의 과정을 모두 아는 사람은 나뿐이며, 자신을 신뢰하는 사람은 남의 평가에 연연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의 말에 흔들리려 할 때마다 나는 이렇게 다짐한다. '사람들이 말하게 두고, 나는 나의 일을 하러 가자.'

자신이 불합리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강하게 어필하면 직장 상사가 그 속내를 헤아려줄 것 같은가? 그런 일은 절대 없다. 상사도 사람이다. 위로부터 실적 압박을 받고, 언제까지 이 일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평범한 직장인일 뿐이다. 그러니 후배에게 지적을 당하면 합당한 비판일지라도 고깝게 들릴 수밖에. 절대 상사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마라. 불합리한 일을 당하더라도 사람들 앞에서 대놓고 비판해서는 안된다. 필요하다면 감정이 진정됐을 때 개별 면담을 하는 것이 좋다. 부드러운 분위기에서 고민 상담 형식으로 상사에게 질문하면 불필요한 감정 소모를 막을 수 있다.

자식은 부모의 감정받이를 하려고 태어난 게 아니다. 그런 부모 밑에서 자라왔다면 어릴 때는 어쩔 수 없더라도 성인이 되면 최대한 빠르게 독립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이를 볼모로 한 정서적 협박에 시달려 원하는 인생을 살지 못하게 된다. 친구나 연인 관계에서도 항상 하소연만 하거나, 내 이야기를 꺼내도 금세 자기 얘기로 돌아가 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뭔가 일이 있어서 일시적으로 그런 게 아니라 항상 그런 사람이라면 최대한 거리를 두는 것이 좋다. 그런 이들은 성숙하지 못하다. 자신의 불행에만 함몰되어 당신을 존중할 여력이 없다.

기존의 질문 '그 사람은 그것만 빼면 괜찮은가?'와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고칠 수 있을까?'는 틀렸다. '그의 단점이 객관적으로 문제가 되는 수준임이 분명한가?'와 '단점이 개선되지 않는다 해도 그것을 내가 감당할 수 있는가?'로 옮겨가야 한다. 인간은 잘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 후, 그가 바뀌지 않더라도 내가 그를 감당할 수 있는지 물어야 한다. 판단이 잘 서지 않는다면 일단은 적당한 거리를 둔 후 생각해도 늦지 않다. 어떤 경우에는 노력하지 않는 것이 최선일 때가 있다.

"재능이 있고 없고가 중요한 게 아니고, 스스로 있다고 생각하는 그 믿음이 중요한 거다."
남들이 지적하는 말을 듣고 단점을 없애는 부분만 집중하다 보면 장점도 함께 없어지고 만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좋아할 때, 단점이 있더라도 특정한 장점이 크게 발휘되는 사람을 보고 매력적이라고 느끼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원래 반짝거렸던 것들을 '다른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것들'로 수정하다 보면, 결국 그것은 아무도 좋아하지 않게 되어 버린다.

예전에 열렬히 좋았던 것이 시시해지기도 하고 취향도 변하듯,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수밖에 없다. 인생의 주요 시기마다 목표와 우선순위가 바뀌기 때문에 같이 있고 싶은 사람도 계속 바뀌는 것이다. 내가 사회학에 푹 빠졌을 때는 사회참여를 적극적으로 하는 사람을 사랑했고, 영화와 음악에 관심을 많이 가졌을 때는 예술가의 면모를 보이는 사람에게 반했다. 농담을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을 때는 개그 코드가 맞는 사람을 찾아다녔으며, 마음의 안정을 찾고 싶고 고민이 깊을 때는 배려심 많은 이와 오랜 시간을 보냈다. 
우리는 관계하는 타인들에게 영향을 받고, 그의 일부가 나의 일부가 된 후 작별하고, 이를 통해 성장한다.

'자존감 높이는 법'과 관련해 많은 지침이 있지만 기본은 마음 사이즈를 주기적으로 체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변화를 직시한 후 그에 맞는 것을 찾아 나서야 새로운 만남이 시작된다. 언제든 떠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만이 현재에 충실할 수 있기도 하다.

다른 사람의 기대에 부응하려 애쓰지 말고 내가 원하는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후회하지 않는 인생을 살기 위해서 내가 자꾸 되뇌는 것은 이것이다. 나의 시간과 에너지는 한정되어 있으니 가치 없는 곳에 쓰지 말 것. 오늘의 나를 행복하게 하는 데 최선을 다할 것.

뼈 있는 말을 하는 사람은 평소 상대에게 섭섭한 일들이 쌓여 폭발 직전인 경우가 많다. 또는 이미 개선점에 대해서 이야기했지만 상대가 듣지 않아 시니컬해졌기 때문일 때도 있다. 그렇게 마음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관계를 유지하다 보니 자꾸 숨겨둔 가시가 삐쭉삐죽 튀어나오고, 그것이 말이 되는 것이다. 나는 뼈 있는 말을 자주 하거나 듣게 되면 이 사람과의 관계를 잠시 쉴 때가 됐다는 시그널로 받아들인다.

어떤 소설은 재미가 없어 던져두었다가 몇 년 후에 다시 보니 충격적으로 좋기도 하고 어떤 소설은 한때 참 좋아했는데 다시 보니 시시하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예술도 사람도 마찬가지다. 상대가 바뀐 것이 아니라 내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러니 무언가를 어떤 시기에 잠깐 거쳐 간 뒤 거기에 대해 다 안다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어릴 때의 좋지 않은 경험만으로 다시는 그것을 접하지 않는다면 인생에서 좋은 것을 누릴 기회를 그만큼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싫은 것들로 가득 찬이 세상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