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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74) 당신이 옳다 [인문학] (정혜신) 본문

Report of Book/인문학

(2019-74) 당신이 옳다 [인문학] (정혜신)

재도담 2019. 12. 22. 21:15

당신이 옳다 

정혜신 저, 해냄, 316쪽. 

매우 많이 배웠던 책. 다독다독의 12월의 책으로 읽었는데, 많이 배우고 반성했다. 

이 책의 핵심을 딱 두 가지만 말하라고 한다면, 이 세상 모든 사람의 감정은 잘못되거나 틀린 것이 없다는 것과 남의 감정을 들을 때는 절대로 충조평판(충고, 조언, 평가, 판단)하지 말라는 것. 이 두 가지만 잘해도 적어도 나쁜 상담자는 되지 않을 수 있다. 물론 쉽지만은 않겠지만 남의 말을 잘 들어주고 공감해주자. 공감을 훈련해나가자. 

이하는 책에서 밑줄 그은 부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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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윤택한 삶이 최종 목표인 과학, 그것도 과학만능주의 시대에 여유롭고 행복한 사람이 넘쳐나지 않는 건 이상하다. 어떤 이들은 그 이유를 우리에게 최첨단 과학기술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일상에 필요한 적정기술과 그것의 적정한 분배가 이뤄지지 않아서라고 요약했다. (p.12) 

정신의학은 신경증, 정신 질환 등의 질병을 진단하고 치료하기 위한 임상적, 학문적 틀 위에 세워진 의학의 한 분야다. 이 틀은 어쩔 수 없이 인간의 고통과 갈등을 질병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전통을 유지한다. 그래서 정신의학은 사람을 '사람'보다는 '환자'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 트라우마 피해자들은 자신을 환자가 아닌 고통받는 사람으로 바라봐주길 바란다. (pp.15-16) 

사람의 삶에 마지막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은 외부적 환경이나 상황 등 그들의 조건이 아니라 그 사람 존재 자체다. (p.23)  

물리적 허기만큼 수시로 찾아오는 문제가 인간관계의 갈등과 그로 인한 불편함이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매번 자격증을 가진 의사나 상담사를 찾을 수는 없다. 끼니 때마다 찾아오는 허기만큼이나 잦은 문제라서 그때마다 전문가를 찾아야 한다면 일상이 불가능해진다.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집밥 같은 심리학이 필요한 이유다. (p.26) 

공감의 위력은 어떤 힘보다 강하다. 부작용도 없다. 이것은 부유하든 가난하든, 강자든 약자든, 많이 배웠든 못 배웠든, 노인이든 아이든 누구에게나 적용된다. (p.27) 

'나'가 흐려지면 사람은 반드시 병든다. (...) 스타가 아니더라도 부모나 배우자의 강력한 기대에 부응하는 것 자체를 자기 삶으로 받아들이며 사는 사람들, 주어진 역할에 헌신하는 것이 자기 삶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고 살아가는 사람의 삶은 스타들이 겪는 공황장애 삶의 원리와 매우 닮아 있다. 자기성이 소거된 채 부모의 기대나 사회적 역할, 가치 등에 전적으로 기대어 살아가던 사람은 절대적 의존 대상이던 그 부모나 배우자와 이별하거나 절대적인 내 역할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던 일이 없어지거나 그 가치가 빛을 잃을 때 공황발작을 경험할 수 있다. (pp.40-41) 

심리적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서 끊어지지 않고 계속 공급받아야 하는 산소같은 것이 있다. '당신이 옳다'는 확인이다. 이 공급이 끊기면 심리적 생명도 서서히 꺼져간다. (...) 자기에 대해 안심해야 그 다음에 대해 합리적으로 사고할 수 있다. 네가 그럴 때는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내 편 인증'이 심리적 생명줄을 유지하기 위한 산소 공급이다. (pp.48-49) 

'너는 옳다'에 존재에 대한 수용을 건너뛴 객관적인 조언이나 도움은 산소 공급이 제대로 되지 않은 사람에게 요리를 해주는 일처럼 불필요하고 무의미하다. (p.50) 그런 마음이 들 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 거라고, 그러니 당신 마음은 옳다고. 다른 말은 모두 그 말 이후에 해야 마땅하다. 그게 제대로 된 순서다. 사람 마음을 대하는 예의이기도 하다. (p.53) 

내 가치관이나 신념, 견해라는 것은 알고 보면 내 부모의 가치관이나 책에서 본 신념, 내 스승의 견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내 감정은 오로지 '나'다. (...) "요즘 마음이 어떠세요"라는 질문 하나가 예상치 않게 '심리적 심폐소생술'을 시작하게 만들기도 한다. (pp.57-58) 

 직장, 학위, 직업, 돈, 권력, 외모, 재능을 다 가진 사람도 자기 존재 자체가 주목을 받지 못하면 심한 결핍이 생긴다. 자기 존재에 대한 영역에서 인간은 공평하게 허기지다. (pp.64-65) 

어떤 고통을 당한 사람에게라도 그 고통스러운 마음에 눈을 맞추고 그의 마음이 어떤지 피하지 않고 물어봐줄 수 있고, 그걸 들으면서 이해하고, 이해되는 만큼만 공감해 줄 수 있다면 그것이 가장 도움이 되는 도움이다. (...) 아기 때부터 도리도리와 걸음마를 과외 교사가 가르치고 연인과 사랑하는 법조차 학원에서만 배울 수 있다면 뭔가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된 것이다. 이런 비상식적이고 비일상적인 외주화가 사람을 불행하게 한다. (p.76) 

어떤 것을 문갸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죽고 싶다는 마음을 비쳤는데도 그 고통이 아무 관심도 받지 못하고 방치되거나 외면되지 않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 사람들은 누가 죽고 싶다는 말을 했을 때 그 마음에 대해 자세히 묻는 것은 상대에게 상처를 주는 행위라 여긴다. 아니다. 정 반대다. 나에게 집중하고 나의 마음을 궁금해하는 사람이 존재하는 것 자체가 치유이기 때문이다. (p.80) 

슬픔이나 무기력, 외로움 같은 감정도 날씨와 비슷하다. 태풍이나 쓰나미가 지구의 병은 아니다. 우리가 살면서 겪는 모든 감정들은 삶의 나침반이다. 약으로 함부로 없앨 하찮은 것이 아니다. 약으로 무조건 눌러버리면 내 삶의 나침반과 등대도 함께 사라진다. 감정은 내 존재의 핵이다. (pp.86-92) 

존재가 소멸된다는 느낌이 들 때 가장 빠르게 자기 존재를 확인하고 증명하는 방법이 폭력이다. 폭력은 자기 존재감을 극대화시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p.100) 

내 상처의 내용보다 내 상처에 대한 내 태도와 느낌이 내 존재의 이야기다. 내 상처가 '나'가 아니라 내 상처에 대한 나의 느낌과 태도가 더 '나'라는 말이다. (p.105) 

충조평판은 고통에 빠진 사람의 상황에서 고통은 소거하고 상황만 인식할 때 나오는 말이다. 고통 속 상황에서 고통을 소거하면 그 상황에 대한 팩트 대부분이 유실된다. 그건 이미 팩트가 아니다. (...) 내가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인정한다면 그에게 물어볼 말이 자연히 떠오른다. 만약 그의 대답이 없어도, 그가 대답을 피하거나 못해도 걱정할 필요 없다. 대답은 중요하지 않다. 자기 존재에 주목하고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의 존재를 그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 자신의 고통에 진심으로 주목하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 그것이 치유의 결정적 요인이다. (...) 심리적 CPR이란 결국 그의 '나'가 위치한 바로 그곳을 정확히 찾아서 그 위에 장대비처럼 '공감'을 퍼붓는 일이다. 사람을 구하는 힘의 근원은 '정확한 공감'이다. (pp.106-110) 

공감은 너를 공감하기 위해 나를 소홀히 하거나 억압하지 않아야 이루어지는 일이다. 누군가를 공감한다는 건 자신까지 무겁고 복잡해지다가 마침내 둘 다 홀가분하고 자유로워지는 일이다. 너를 공감하다보면 내 상처가 드러나서 아프기도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나도 공감받고 나도 치유받을 수 있는 기회가 된다. 공감하는 사람이 받게 되는 특별한 선물이다. (p.121) 

감정적 반응 그 자체가 공감은 아니다. 한 존재가 또다른 존재가 처한 상황과 상처에 대해 알고 이해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그 존재 자체에 대해 갖게 되는 통합적 정서와 사려 깊은 이해의 어울림이 공감이다. 그러므로 공감은 타고난 감각이나 능력이 아니다. 학습이 필요한 일이다. 공감을 '정서적 공감'과 '인지적 공감'으로 나눈다면 그 비율이 2:8 정도로, 공감이란 것은 인지적 노력이 필수적인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p.124) 

잘 모르면 우선 찬찬히 물어야 한다. 내가 모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시작되는 과정이 공감이다. 제대로 알고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조심스럽게 물어야 공감할 수 있다. 그래서 공감은 가장 입체적이고 총체적인 파악인 동시에 상대에 대한 이해이고 앎이다. (p.127) 

외형적 성과나 성취 자체에 대한 과도한 방점은 사람에게 성과에 대한 불안과 강박을 가져오지만 존재 자체에 대한 집중은 안정과 평화를 준다. 부작용이 없다. 공감은 누군가의 불어난 재산, 올라간 직급, 새로 딴 학위나 상장처럼 그의 외형적 변화에 대한 인정이나 언급이 아니라 그것을 가능하게 한 그 사람 자체, 그의 애쓴 시간이나 마음씀에 대한 반응이다. 그럴 때 사람은 자신이 진정으로 인정받고 보상받았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런 경험을 반복적으로 하면 사람은 그런 외형에 덜 휘둘리며 살 수 있게 된다. (pp.142-143) 

누군가의 고통을 덜어주는 공감자가 되기 위해선 그의 마음에 대해 '그'에게 물어야 한다. 돕는 자로서의 '내' 견해를 말하거나 주장하기보다 '그'에게 주목하고 그의 마음에 대해 그에게 물어야 한다. 그의 세세한 속마음은 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전문가가 알 것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비로소 그에게 질문을 시작할 수 있다. 그만이 아는 그의 마음에서 혼돈을 끝낼 그만의 길이 나온다. 당사자가 그것을 속속들이 느끼고 만질 수 있을 때까지 그의 손을 놓지 않는 것이 공감자의 일이고 그것이 치유다. (p.153) 

사람의 감정은 항상 옳다. 사람을 죽이거나 부수고 싶어도 그 마음은 옳다. 그 마음이 옳다는 것을 누군가 알아주기만 하면 부술 마음도, 죽이고 싶은 마음도 없어진다. (...) 사람의 감정은 늘 옳지만 그에 따른 행동까지 옳은 건 아니다. 별개다. 감정에는 공감해도 행동에는 동의하지 않을 수 있다. 때론 관계를 끊는 힘도 필요하다. (pp.167-170) 

상대방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행위는 경계를 침범하는 행위다. 주권이 훼손되면 사람은 모욕감, 모멸감, 수치심과 함께 그로 인한 분노가 생긴다. 이런 감정들이 올라온다면 내 경계가 침범당하고 있다는 신호다. (...) 모든 인간은 상황에 따라 움직이고 적응하는 독립적이고 개별적 존재다. 그 사실을 믿으면 함께 울며 고통을 나누면서도 서로의 경계를 인정하며 서로가 서로에게 살아갈 힘과 근원이 된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존재들이 지닌 경계를 인식해야만 모두가 각각 위엄 있는 개별적 존재로 살아갈 수 있다. (pp.181-186) 

감정은 한 존재의 지금 상태를 있는 그대로 나타내는 바로미터다. 모든 감정에는 이유가 있고 그래서 모든 감정은 옳다. 불안을 느낀다면 '이러면 안되는데' 할 게 아니다. '내가 지금 불안하구나, 왜 그런걸까?' 곰곰이 나와 내 상황을 짚어봐야 한다. 불안할 때 안정제로 불안을 없애버리고 그 신호의 근원을 외면하면 계속 약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불안 신호를 따라 '나'를 점검해봐야 한다. 불안을 따라가다 보면 근원이 나오고 그러면 근원적인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 (p.220) 

사랑 욕구는 아기 때부터 시작해서 늙어서 숨이 멎기 직전까지 인간이 한결같이 갈망하는 것이다. 열흘을 굶은 사람이 음식 앞에서 품위를 갖출 수는 없다. 일상적으로 잘 먹어야 음식 앞에서 품위를 유지한다. 충족된 욕구는 더 이상 욕구가 아니므로 충분히 사랑받은 사람은 그 욕구에 휘둘리지 않고 품위를 유지할 수 있다. (pp.224-225) 

자신에 대한 성찰을 건너뛰고 타인의 마음을 공감하는 일로 넘어갈 방법은 없다. 타인에 대한 공감이 자전거의 왼쪽 페달이라면 자기를 살펴보는 일은 동시에 돌아가는 오른쪽 페달이다. 한쪽이 돌아가지 않으면 그 즉시 자전거는 멈추고 넘어진다. 자기에 대한 성찰이 멈추는 순간 타인에 대한 공감도 바로 멈춘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자기 성찰의 부재는 공감을 방해하는 허들이 된다. (p.231) 

좋은 대답과 결정이 자신을 지켜주는 게 아니라 자기에게 주목하고 공감해 주는 과정 자체가 자신을 끝내 보호하는 것이다. (p.240) 

공감을 받지 못하고 넘어간 상처는 일방적 게몽과 충고의 형태로 상대방의 마음에 칼로 꽂히기 쉽다. (p.240) 

경력이나 그가 속한 집단의 특성으로 한 사람을 미루어 짐작하고 규정하는 것은 집단 사고다. 집단 사고에 의해 파악된 그는 '그'가 아니다. '그'는 집단 사고에 의해 규정된 모습 그 이상이다. (...) 서로가 마음이나 느낌을 주고받는 존재의 차원에서 만나는 관계가 아니라면 배우자나 절친 사이라도 실제로 나는 그를, 그는 나를 만난 적이 없는 관계일 수 있다. 공감이란 제대로 된 관계와 소통의 다른 이름이다. 공감이란 한 존재의 개별성에 깊이 눈을 포개는 일, 상대방의 마음, 느낌의 차원까지 들어가 그를 만나고 내 마음을 포개는 일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나도 내 마음, 내 느낌을 꺼내서 그와 함께 나누고 소통하는 일이다. (...) 다양하게 깎인 수많은 입체적인 면면들 때문에 빛이 드는 방향에 따라 빛깔과 분위기가 달라지는 예각의 크리스탈 조각 같은 존재가 사람이다. 그런 존재를 집단적 정체성이라는 둔각으로 뭉개는 일은 자신에 대한 폭력인 동시에 자기 은폐나 억압, 사람이란 존재에 대한 무지다. (...) 외형적인 조건에 휘둘려 한 존재의 개별성에 주목하는 일을 게을리 하면 본의 아니게 타인에게뿐 아니라 자신에게도 폭력자가 된다. (pp.247-254) 

잘 모를 때는 아는 척 끄덕끄덕하지 말고 더 물어야 한다. 이해되지 않는 걸 수용하고 공감하려 애쓰는 건 공감에 대한 강박이지 공감이 아니다. 에너지 소모만 엄청나다. 그렇게 계속 버티기는 어렵다. 본인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무슨 수로 공감하나. (...) 상대방이 깊숙이 있는 자기 마음을 꺼내기 전엔 그의 생각과 마음을 나는 알 수 없다는 데서 시작하는 것이 관계의 시작이고 공감의 바탕이다. (pp.266-269) 

공감을 잘한다는 건 상대와 똑같은 감정을 느끼는 상태까지 가야 하는 것인가. 아니다. 공감은 똑같이 느끼는 상태가 아니라 상대가 가지는 감정이나 느낌이 그럴 수 있겠다고 기꺼이 수용되고 이해되는 상태다. (p.270) 

공감이란 나와 너 사이에 일어나는 교류지만, 계몽은 너는 없고 나만 있는 상태에서 나오는 일방적인 언어다. 나는 모든 걸 알고 있고 너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말들이다. 그래서 계몽과 훈계의 본질은 폭력이다. 마음의 영역에선 그렇다. (...) 누군가의 속마음을 들을 땐 충조평판을 하지 말아야 한다. 충조평판의 다른 말은 '바른말'이다. 바른말은 의외로 폭력적이다. 나는 욕설에 찔려 넘어진 사람보다 바른말에 찔려 쓰러진 사람을 과장해서 한 만 배쯤은 더 많이 봤다. 사실이다. (pp.296-2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