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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38) 혐오사회 [사회과학] (카롤린 엠케) 본문

Report of Book/사회

(2019-38) 혐오사회 [사회과학] (카롤린 엠케)

재도담 2019. 7. 9. 15:47

혐오사회 

카롤린 엠케 저, 정지인 역, 다산초당, 272쪽. 

다독다독 덕에 읽을 수 있었던 책. 

나는 혐오하는 것을 혐오한다. 

'우리'와 '너희'를 경계짓는 선긋기를 혐오한다. 

나와 너를 구분짓은 자의적이고 의도적인 포함과 배제의 비자유주의적 역학을 혐오한다. 

우리는 모두 우리가 될 수 있다. 


혐오와 증오는 이데올로기에 따라 집단적으로 형성된 감정이다. 그것은 느닷없이 폭발하는 것이 아니라 훈련되고 양성된다. 집단적인 증오와 멸시 성향이 생겨나려면 사회적으로 증오와 멸시를 당하는 이들이 오히려 사회에 피해나 위험이나 위협을 가한다고 주장하는 이데올로기가 있어야 한다. 

사람이 아니라 행위를 관찰하고 비판하면 사람들이 자신과 자신의 행위를 분리할 수 있고, 그러면 스스로 달라질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 이러한 관점은 개인이나 무리 전체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구체적인 상황에서 말하고 행하는 바를 비판한다. 

채색된 색안경을 끼고 보면 세상은 어떻게 보일까? 사람들을 늘 특정한 한 가지 역할, 특정한 한 가지 지위, 특정한 한 가지 특징을 지닌 것으로만 본다면 어떤 결과가 생길까? 처음부터 증오가 생기는 건 아니다. 그렇게 협소한 시각은 무엇보다 상상력을 훼손한다. 개인은 집단과, 집단은 언제나 그 속성들과 하나로 결합된다. 그런 매체를 통해서만 정보를 얻는 사람들, 거기에서 제시하는 여과된 시선으로만 세상과 사람들을 바라보는 이들에게는 늘 고정된 동일한 방식의 연상만이 각인된다. 

표준에 부합하는 사람들은 흔히 자신이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배제하거나 비하하는지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이 용인되는 것을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자신이 어떤 힘을 행사하는지 감도 잡지 못한다. 하지만 인권이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것이다. 자신과 유사한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어떤 종류의 일탈과 어떤 형태의 다름이 소속이나 존중이나 인정과 관련해 유의미한 것으로 제시되는지 주의깊게 살펴야 한다. 

타인을 혐오하는 원리 : 동질성 - 본연성 - 순수성 

IS가 유럽이나 미국에서 테러공격을 가할 때마다 곧바로 각 해당 국가가 그곳에 살고 있는 무슬림들을 향해 최대한 집단적으로 보복하기를 바라는 것은, 매우 뒤틀리기는 했지만 그들로서는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바람이다. 그들의 입장에서 현대 세속국가에 살고 있는 무슬림들은 무조건 그 집단 전체가 의심을 받는 상황에 처해야 하며, 그럼으로써 고립되고 배제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현대 민주국가에서 떨어져 나와 결국 IS에게로 향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슬람의 공격이 있을 때마다 모든 무슬림을 싸잡아 저주하는 목소리, 무슬림의 기본권과 존엄을 부인하는 목소리, 무슬림들을 오직 폭력과 테러와만 연관 짓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은 정확히 IS가 꿈꾸는 분열된 유럽을 실현하는 일이며 자기도 모르게 그들의 순수 숭배를 후원하는 결과를 낳는다. 

그 광신주의가 동질적 국민이라는 표상과 연결된 것이든, 종족으로 이해되는 민족에 대한 소속감을 내세우는 인종주의적 개념과 연결된 것이든, 아니면 '순수'라는 유사종교적 관념과 연결된 것이든 이 모든 교리는 자의적이고 의도적인 포함과 배제의 비자유주의적 역학과 하나로 결합된다. 

처음부터 모든 개별 존재는 유일무이하며, 따라서 다른 모두와 함께, 다른 모두의 안에서 모두가 다 유일무이하다. 한 사회내의 복수 複數 the plural 성은 개인이나 집단에게서 자유를 앗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엇보다 먼저 그 자유를 보장한다. 

권력은 사실 그 누구도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사람들 사이에서 그들이 함께 행동할 때 생겨나고 그들이 흩어질 때 사라지는 것이다. 혼자서 '우리'를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증오에 저항하는 것, '우리'안에 한데 모여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행동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용기 있고 건설적이며 온화한 형태의 권력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