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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42) 생각의 좌표 [사회과학/에세이] 본문

Report of Book/사회

(2018-42) 생각의 좌표 [사회과학/에세이]

재도담 2018. 8. 8. 17:41

생각의 좌표 

홍세화 저, 한겨레출판, 248쪽. 

주옥같은 문장으로 꽉 찬 글이다. 

묘하게 표지가 내 가슴을 울려서 구매했고, 책장에 꽂아두고도 계속 눈에 밟혔는데, 

읽으면서 감탄과 경탄을 연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의식중에 들어와앉았던 교만하고 비민주적인 의식들을 반성한다. 

나의 생각을 다시 한번 정돈하고 가다듬는 계기가 되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사 주고 싶은 책이다. 정말 강추!!!!!


책에서 건진 문장. 

사람은 편함을 추구한다. 남에게 불편함은 물론 고통과 불행을 안겨주면서까지 나의 편함을 추구한다. 함께 더불어 산다는 말은 내 편함의 추구가 남에게 불편함, 고통, 불행을 주지 않아야 한다는 말과 만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 편함을 추구할 뿐 '어떤 사회에서 살 것인가'라는 물음을 던지지 않는다. (p.6) 

'지금 내가 생각하는 바'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에 대한 물음은 자기성찰의 출발점이다. (p.15)

'내 생각은 어떻게 내 것이 되었나?'라고 물을 때 자기 생각을 바꿀 가능성이 그나마 열리지만, 그렇지 않을 때에는 자기 생각을 바꿀 가능성이 없는, 지금 갖고 있는 '생각을 믿는' 사람으로 남는다. (p.18) 

우리가 우리 안에 채우는 '생각'이나 '주장' 또는 '이념'은 이 사회에서 강조되는, 이 사회를 관통하는 것들로써 이 사회를 지배하는 세력이 요구하는 '지배적인 그것'일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내 안에 생각을 집어넣는 실제 주체인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안목을 갖춰 나가면서 기존에 형성된 생각을 끊임없이 수정하여 나의 주체성을 확장하지 않으면 진정한 자유인도, 내 삶의 진정한 주인도 되기 어렵다. (p.22) 

폭넓은 독서, 열린 자세의 토론, 직접 견문, 성찰. 이 네 경로를 통해 갖게 된 생각은 주체적인 반면, 제도교육과 미디어를 통해 갖게 된 생각은 주체적이지 않다. 독서와 토론, 직접 견문과 성찰은 내가 주체적으로 행하는 것이지만, 제도교육과 미디어에서 나는 주체로 존재하지 않으며 오로지 객체이며 대상일 뿐이다. (…) 한국처럼 제도교육이 민주화되지 않은 사회에서는 스스로 책을 읽지 않을 때 필연적으로 지배세력이 요구한 것만으로 채우게 된다. (p.24) 

교육의 궁극적 목적이 주체적 자아, 진정한 자유인을 형성하는데 있다면 학생들에게 독서와 토론, 직접 견문과 성찰의 기회를 갖게 해야 한다. (p.26) 

우리는 오로지 암기나 문제풀이 능력으로 학생을 평가할 뿐 감수성이나 사람됨에 대해선 거의 무시한다. (p.27) 

자주 사용하는 익숙한 단어에서 번득이는 지혜를 발견할 때가 있다. '학습學習'이라는 단어가 그 중 하나다. '배우고 익힘'이라는 뜻을 모르는 이야 없겠지만,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습習, 즉 '익힘'이다. (…) 우리 학생들은 좋은 가치에 관해서는 어쩌다 '배울學' 뿐이고 일상 속에서는 그 반대를 익힌다習. 남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공동체의식, 연대의식을 어쩌다 '배우지만' 일상에서는 남을 누르고 혼자 이기는 것을 '익힌다'. 인권의식에 대해 이따금 배울 뿐이고, 일상에서는 인권 침해를 몸에 익힌다. 자유, 평등의 가치를 어쩌다 배우고 일상에서는 억압과 차별을 몸에 익힌다. 이렇게 우리 학생들은 일상에서 억압과 차별, 인권 침해를 겪으며 몸에 익히기 때문에 나중에 남을 억압, 차별하고 인권을 침해하면서도 인식하지 못한다. (p.29) 

'사람을 이해하고 사회를 보는 눈 뜨기'를 위한 학문인 인문사회과학에는 원래 정답이 없다. 다만 각자의 견해가 있을 뿐이고, 그 견해가 얼마나 풍요로운지, 나름대로 정교한 논거를 갖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공부에 암기가 아닌 다양한 독서와 토론이 받쳐주어야 하는 이유다. 이처럼 인문사회과학은 생각과 논리를 요구하는, 정답이 없는 학문인데도 서열화된 대학은 초중고 교육을 대학입시 교육에 종속시킴과 동시에 학생들을 일등부터 꼴찌까지 줄을 세우도록 요구했다. 학생들에게 생각과 논리를 물어서는 일등부터 꼴등까지 줄을 세울 수 없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인간과 사회, 사물과 현상에 관해 묻지 않는다. 학생들에게 자기 생각과 논리를 갖도록 요구하는 대신 객관적 사실에 관해 암기하도록 요구할 뿐이다. 우리 학생들은 가령 '사형제는 폐지되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자신의 생각과 그 생각을 뒷받침하는 논리를 펼치도록 요구받지 않는다. 대신에 이런 따위의 질문만 받는다.
[ 다음 나라들 중에서 실질적으로 사형제가 폐지된 나라는? ① 미국 ② 중국 ③ 일본 ④ 러시아 ⑤ 한국 ] (p.34) 

독서는 사람을 풍요롭게 하고 글쓰기는 사람을 정확하게 한다. (p.40) 

학벌체제가 모든 사회구성원들에게 강요하는 입시지옥은 경쟁에서 낙오하거나 패배한 구성원들에게 사회적 차별을 받아들이도록 작용한다. 학벌 경쟁에서 승리한 자들은 그 보상으로 특권의식을 갖는 한편, 패배한 자들은 신분귀족화한 사회 상층에 대한 견제의식을 갖지 못한다. 과거 신분제에선 그나마 기대할 수 있었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한국의 사회상층에게 기대하기 어려운 것은 이긴 자와 패배한 자 모두 학벌 경쟁에서 이긴 자들이 누리는 지위, 명예, 권력과 불르 당연한 보상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p.48) 

초중고 시절에 고전 한 권 제대로 읽지 않은 채 암기와 문제풀이 요령으로 획득할 수 있는 경쟁력이란 게 대체 무엇인가?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시대도 아닌, 이른 지식기반 사회라는 오늘날 창조성도 없고 상상력도 빈곤한 사회구성원에게서 경쟁력이란 게 가당키나 한가? 그것이 벗과도 자연과도 사귀지 못한 채 좁은 공간에 갇혀 등수와 등급의 노예가 되어 학습노동에 시달리면서 피폐해진 인성, 닫힌 상상력에 값할 만한 것인가? (p.49) 

학생들이 학문을 즐기지 않는 대학에서 학문 경쟁력이 나올 리 없고 학문 경쟁력이 없는 곳에서 국가경쟁력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p.50) 

오늘에도 학교에서 강조하는 것은 민주주의, 자유, 평등, 정의, 공공성이 아니라 질서와 국익, 경쟁이다. (p.56) 

질서를 강조하지 않고 줄 서기도 하지 않는 다른 나라 교실보다 질서를 강조하는 한국의 교실이 더 무질서한 이유는 자율성이 배제된 교육 탓이다. 자유의 반대말은 '억압'이다. 하지만 안보와 질서 이데올로기에 세뇌된 한국사회구성원들에게 자유의 반대는 '억압'이 아니라 '무질서'나 '불안'이다. 의 동의어는 '무질서'와 '불안'이다. (p.60) 

공공성이 없는 제도교육은 사회구성원들 사이에서 사익추구의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한 전쟁터로 남았다. (p.66) 

우리는 어렸을 때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데 주눅 들어야 했고 결국 '왜?'라는 질문을 스스로 죽였다. 가장 가까운 엄마와 아빠에게 거부당한 '왜?'라는 질문을 누구에게 던질 수 있겠는가? 우리는 학교를 비롯해 어디에서도 '왜?'라는 질문을 감히 던지지 않는다. (p.70) 

우리에게 비판의식을 갖도록 이끈 것은 결국 독서와 토론이다. 진보 의식의 성숙은 끊임없는 자기부정의 과정이어야 한다. (pp.79-80) 

성찰 이성에 눈뜬 사라은 나와 다른 사람, 문화를 만날 때 서로 장점을 주고 받으려고 노력한다. 또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내가, 오늘의 나보다 내일의 내가 더 성숙하기를 기대하며 자기성숙을 위해 노력한다. 성찰 이성에 눈뜨지 못한 인간은 자기성숙을 위해 노력하는 대신에 남과 비교하여 스스로 우월하다는 점을 확인하기 위해 애쓴다. 자기성숙의 긴장이 없는 사람에게 스스로 우월하다고 믿게 해주는 것은 그의 소유물이며, 그가 속한 집단이다. (p.133) 

소수자들은 일상적인 '자기 돌아봄'을 통해 역지사지를 쉽게 익히지만, 다수자들은 자기 돌아봄도 부족하고 역지사지도 어렵다. (p.136) 

이 땅에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없다고 말하는 수많은 사람에게, 특히 젊은 그대에게 묻는다. 그대가 장차 이 땅의 '노블레스'가 된다면 스스로 '오블리주' 할 것인가. 그대가 말하듯 이 땅엔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그 개념조차 없는데 유독 그대만 '오블리주' 할 것인가? 왜? 어떻게? 오늘 그대의 분노가 정당한 만큼 그대에게 던지는 이 질문 또한 정당하다. 거듭 말하지만, 사회귀족의 자식이 국민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 것에 우리는 분노해야 하고, 그 자식들이 다시 이 땅의 사회귀족이 되어 대물림으로 군림하는 것에 분노해야 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분노한다고 이 땅에 없던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갑자기 솟아나는가. (p.140) 

횡적, 종적 연대의 구체적 실현으로서 무상교육제도는 가난한 서민들에게도 교육 받을 기회를 준다는 점에서도 중요하지만 여기에 더해 교육과정에 있는 어린 사회구성원들에게 자연스럽게 연대의식을 갖도록 한다는 점에서 또한 중요하다. 학생들 자신이 사회적 연대의 구체적 실현인 무상교육제도의 수혜자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연대의식을 가지게 된다. 남과 더불어 살아야 하며 연대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말로 주장하는 게 아니라 제도와 사회환경에 의해 자연스럽게 갖게 되는 것이다. (…) 무상교육이 실현된 나라의 구성원들이 형성한 교육자본에는 '나의 것'인 동시에 아주 일부분이라도 '사회의 몫'이 들어 있다. 한국에선 그 누구의 교육자본에서도 한국사회의 몫을 기대할 수 없다. 치열한 경쟁을 통해 자격을 획득한 사람은 나고, 공교육비뿐만 아니라 사교육비를 처들였기 때문에 나의 교육자본은 철저하게 내 것이다. 당연히 사회에 환원한다는 생각은 생기지 않는다. (p.172) 

정치 혐오는 실상 혐오스런 정치를 계속 혐오스런 상태로 있게 하는 강력한 정치적 힘이다. 젊은이들이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혐오스러운 정치를 바꾸지 않는다면 누가 바꿀까. 우리가 바라는 사회를 남이 대신 만들어주지 않는다. 젊은이들의 정치 혐오나 탈정치는 이 간단명료한 명제조차 인식하지 못할 만큼 주체적 시민의식이 부족하다는 점을 드러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무지와 무관심은 그 자체로 죄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몰상식의 자양분이며 영악한 자들이 뻔뻔하게 군림하는 토양이 된다. (p.182) 

시민사회의 발전 단계는 대중이 무지와 무관심 단계에서 벗어나 얼마나 시민의식이 성숙했는가에 의해 규정된다. 또한 시민사회의 발전 단계는 시민의식이 광신과 극단주의, 사익추구 자체에 내장하고 있는 열성과 집요함에 얼마나 맞서고 있는지, 권력과 돈이 가진 힘을 얼마나 제어할 수 있는지에 달려 있다. (p.185) 

괴물이 없지는 않다. 그렇지만 진정으로 위험한 존재가 되기에는 그 수가 너무 적다. 그보다 더 위험한 것은 평범한 사람들이다. 의문을 품어보지도 않고 무조건 믿고 행동하는 기계적인 인간들 말이다. (p.192) 

광주 항쟁은 '민주화운동'으로 기념되고 학살 책임자들은 사면되었다. 학살 책임자들이 참회하지도 않았고 용서를 구하지도 않았는데 용서와 화해가 주장되었다. 나로선 그게 어떻게 가능한 일인지 알 수 없었고, 힘이 약한 정의가 힘을 키워가며 강한 불의의 힘에 정면으로 맞서기보다 스스로 주저앉으며 그럴듯한 수사를 붙인 것으로밖에는 설명되지 않았다. (p.193) 

자본의 그악스런 속성은 끊임없이 사람과 사람을 이간질하고 끊임없이 자본주의적 심성을 주입하면서 인간정신을 물질에 종속시켰다. 그리고 '나만은' 강자의 대열에 낄 수 있다는 배타적 성공이 부끄러움 없이 자릴르 잡아갔다. 효율과 경쟁을 저해한다고 짐작되는 가치들은 눈치꾸러기가 되어 가차 없이 퇴출되었다. 자본의 광기에 홀린 듯 사람들은 허접한 껍데기만으로 행복한 삶을 설계하려는 게임에 전력 질주하고 있다. (p.201) 

그러나 지난 시절, 세상의 끝일 것만 같은 광란의 역사를 만든 것도 인간이었지만, 성찰의 자세를 보여준 것도 인간이었다. 그들에게 주어진 과제는 '더 인간적인 사회'로 가기 위한 채찍질에 있다기보다 '더 비인간적인 사회'로 가려는 강력한 힘에 안간힘으로 맞서는 데 있었다. 나는 젊은이들이 이 점을 인식하기를 바란다. 단 한 사람이라도 좌절, 절망, 한탄의 과정을 거쳐 비인간적인 사회의 거대한 흐름에 휩쓸리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들 덕분에 이나마 올 수 있었다'라고 말해야 한다. (p.203)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줍니다". (…) 인간의 저급한 속성을 겨냥한 그런 광고에 대부분의 사회구성원들은 거부감이나 위화감을 느끼지 않는다. 그런 광고를 일상적으로 보면서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어떤 가치관을 가질 것인지에 대한 문제제기조차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이 사회의 물신주의는 강력하며 공격적이다. (…) 가난한 사람, 쪽방촌에 사는 사람에게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줍니다"라는 말은, 그 자체로 저급한 폭력이며 야만이다. 물질적 소유에 대한 선망에 빠져 인간성이 훼손된 것조차 인식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p.204) 

공익적 가치가 실종되고 사회적 연대의식이 싹틀 수 없는 사회는 '나 먼저 살고 보자', '내 것은 무조건 지키고 보자'는 이전투구의 풍토를 만들어냈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야 한다. 우리의 것과 내 것을 함께 지키고 기름진 생존을 넘어 인간적 삶을 되찾기 위해. (p.220) 

그래서 지금 젊은이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무엇보다 이 사회를 지배하는 물신에 저항할 수 있는 인간성의 항체를 기르라는 것이다. 그대의 탓은 아니지만 우리 사회의 인간성은 너무 오염되었다. 자기성숙의 모색을 게을리 하지 말라. 자아실현을 위한 능력을 갖추기 위해서다. 그리고 성찰 이성의 성숙 단계가 낮은 사회에서 그대는 자칫 의식이 깨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인간에 대한 연민에 앞서 오만함으로 무장하기 쉽다. 만약 그대가 진정한 자유인이 되려고 한다면 죽는 순간까지 자기성숙의 긴장을 놓지 않아야 한다.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모두 쉬운 길을 택한다. 그러나 삶은 단 한 번 밖에 오지 않는다. (p.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