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dGen's story
(2018-02)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문학-에세이] 본문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신영복 저, 돌베개, 400쪽.
예전에 주견이형에게 추천받았던 것 같은데, 이제서야 내가 읽을 준비가 되었나보다.
새해를 맞아 신영복 선생님의 글을 읽고 있으니, 새로운 경전을 보는 듯 하다.
글이 참 따뜻하고 아름답다. 미래의 세대에게 고전으로 불릴만하다.
책에서 밑줄 긋기.
사랑이란 생활의 결과로서 경작되는 것이지 결코 갑자기 획득되는 것이 아니다. (…) 부모를 또 형제를 선택하여 출생하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사랑도 그것을 선택할 수는 없다. 사랑은 선택 이전에는 존재하는 않는 것이며 사후(事後)에 서서히 경작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말처럼 쓸데 없는 말은 없다. 사랑이 경작되기 이전이라면 그 말은 거짓말이며, 그 이후라면 아무 소용없는 말이다.
인간을 사랑할 수 있는 이 평범한 능력이 인간의 가장 위대한 능력이다. 따라서 문화는 이러한 능력을 계발하여야 하며, 문명은 이를 손상함이 없어야 한다.
Das beste sollte das liebste sein. 가장 선한 것은 무릇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것이어야 한다. (p.22)
고립되어 있는 사람에게 생활이 있을 수 없다. 생활이란 사람들과의 관계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적·정치적·역사적 연관이 완전히 두절된 상태에 있어서의 생활이란 그저 시간의 경과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시간이 물질의 운동양식이라면 나는 시간의 경과와 더불어 바위처럼 풍화당하는 하나의 물체에 불과하다. (…)
가장 불리하고 약한 입장에서 가장 필요불가결한 것을 획득하기 위한 투쟁이 수인(囚人)들을 강하게 만들어준다. 그리하여 다듬어진 용기와 인내와 지구력…… 이것이 수인의 재산인 것이다. (p.23)
독서는 타인의 사고를 반복함에 그칠 것이 아니라 생각거리를 얻는다는 데에 보다 참된 의의가 있다. (p.24)
세상이란 관조(觀照)의 대상이 아니라 실천의 대상이다. (p.24)
퇴화한 집오리의 한유(閑遊)보다는 무익조의 비상하려는 안타까운 몸부림이 훨씬 훌륭한 자세이다. (p.24)
인간의 적응력, 그것은 행복의 요람인 동시에 용기의 무덤이다. (p.24)
투쟁은 그것을 멀리서 맴돌면서 볼 때에는 무척 두려운 것이지만 막상 맞붙어 씨름할 때에는 그리 두려운 것이 아니며 오히려 어떤 창조의 쾌감 같은 희열을 안겨주는 것이다. (p.24)
혼자라는 느낌, 격리감이나 소외감이란 유대감의 상실이며, 유대감과 유대의식이 없다는 것은 '유대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고독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어차피 인간관계, 사회관계를 분석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p.27)
(…) 그 자리에 땅을 파고 묻혀 죽고 싶을 정도의 침통한 슬픔에 함몰되어 있더라도, 참으로 신비로운 것은 그처럼 침통한 슬픔이 지극히 사소한 기쁨에 의하여 위로된다는 사실이다. (…) 개인의 생명이든 집단의 생명이든 스스로를 지키고 지탱하는 힘은 자신의 내부에, 여러 가지의 형태로, 곳곳에 있으며 때때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믿는다. (p.47)
연말이, 새해가 다가왔다. 유장한 시간의 대하 위에 팻말을 박아 연월을 정분(定分)하는 것은 아마 그 표적 앞에서 스스로의 옷깃을 여미어 바로 하자는 하나의 작은 '약속'인지로 모른다. 그 약속의 유역을 향하여 너도 나도 걸음을 옮기고 있는 것이다. (…)
나는 인간을 어떤 기성의 형태로 이해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 개인이 이룩해놓은 객관적 '달성'보다는 주관적으로 노력하고 있는 '지향'을 더 높이 사야 할 것이라고 믿는다. (p.65)
(…)그렇더라도 저는 아버님으로부터 좀 다른 내용의 편지를 받고 싶습니다. 예(例)하면 근간에 읽으신 서·문(書·文)에 관한 소견이라든가 최근에 겪으신 생활 주변의 이야기라든가 하는 그런 구체적인 말씀을 듣고 싶은 것입니다. '염려의 편지'가 '대화의 편지'로 바뀌어진다면 저는 훨씬 가벼운 마음으로 아버님의 편지를 받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p.73)
하늘의 비행기가 속력에 의하여 떠 있음에서 알 수 있듯이, 생활에 지향과 속력이 없으면 생활의 제측면이 일관되게 정돈될 수가 없음은 물론, 자신의 역량마저 금방 풍화되어 무력해지는 법입니다. (p.95)
인도(人道)는 예도(藝道)의 장엽(長葉)을 뻗은 심근(深根)인 것을, 예도는 인도의 대하로 향하는 시내인 것을, 그리하여 최고의 예술작품은 결국 '훌륭한 인간', '훌륭한 역사'라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 합니다. (p.96)
(타인과의 관계에서는 반드시 요구되는) 인간적 신뢰를 받지 못하면서 단지 '형'이라는 혈연만으로 '형'이고 싶지 않기 때문에 나는 내가 너의 형이 되기를 원하는 한, 나 자신의 도야를 게을리하지 않으리라고 다짐해본다. (p.103)
징역살이 속에는 물론 토요일 오후의 그 상쾌한 여유가 있을 리 없습니다. 그러나 무기징역이라는 길고도 어두운 좌절 속에는 괭잇날을 기다리는 무진장한 사색의 광상(鑛床)이 원시로 묻혀 있음을 발견하였습니다. 저는 우선 제 사고(思考)의 서랍을 엎어 전부 쏟아내었습니다. 그리고 버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아까울 정도록 과감히 버리기로 하였습니다. 지독한 '지식의 사유욕'에, 어설픈 '관념의 야적(野積)'에 놀랐습니다. 그것은 늦게 깨달은 저의 치부였습니다. 사물이나 인식을 더 복잡하게 하는 지식, 실천의 지침도, 실천과 더불어 발전하지도 않는 이론은 분명 질곡이었습니다. 이 모든 질곡을 버려야 했습니다. 섭갹담등(躡屩擔簦) -짚신 한 켤레와 우산 한 자루- 언제 어디로든 가뜬히 떠날 수 있는 최소한의 소지품만 남기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하나씩 조심해서 하니씩 챙겨넣기 시작하였습니다. (pp.104-105)
우리는 거개가 타인의 실수에 대해서는 냉정한 반면 자신의 실수에 대하여는 무척 관대한 것이 사실입니다. 자기 자신의 실수에 있어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처지, 우여곡절, 불가피했던 여러 사정을 잘 알고 있음에 반하여, 타인의 그것에 대하여는 그 처지나 실수가 있기까지의 과정 전부에 대해 무지하거나 설령 알더라도 극히 일부밖에 이해하지 못하므로 자연 너그럽지 못하게 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징역 속의 동거는 타인을 이해하게 해줍니다.
같은 방에서 아침부터 밤까지, 하루 24시간, 1년 365일을 꼬박 마주앉아서 심지어 상대방의 잠꼬대까지 들어가며 사는 생활이기 때문에 우리는 오랜 동거인에 관한 모르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성장과정, 관심, 호오(好惡), 기타 사소한 습관에 이르기까지 손바닥 보듯 할 뿐 아니라 하나하나의 측면들을 개별로서가 아니라 인간성이라는 전체 속에서 파악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도시의 아스팔트 위 손 시린 악수 한두 번으로 사귀는 커피 몇 잔의 시민과는 거리가 멉니다. 우리는 오랜 시간과 노력으로 모든 것을 열어놓은 자기 속으로 타인을 받아들이고 모든 것이 열려 있는 타인의 내부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타인을 자신만큼 알기에 이릅니다. 우리는 타인에게서 자기와 많은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남는 차이를 이해하게 됩니다. 이 '차이'에 대한 이해 없이 타인에 대한 이해가 충분한 것이 될 수는 없으며, 그 사람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없이 그의 경험을 자기 것으로 소화할 수는 없다고 생각됩니다. (p.115)
나더러 역마살이 들었다던 친구들이 생각납니다. 역마살은 떠돌이 광대넋이 들린 거라고도 하고 길신[道神]이 씌운 거라고도 하지만, 아직도 꿈을 버리지 않은 사람이 꿈 찾아나서는 방랑이란 풀이를 나는 좋아합니다. 하늘 높이 바람 찬 연을 띄워놓으면 얼레가 쉴 수 없는 법. 안거(安居)란 기실 꿈의 상실이기 쉬우며 도리어 방황의 인고 속에 상당한 분량의 꿈이 추구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보헤미아의 맑은 수정'은 멀고 먼 유랑이 키워낸 열매라고 믿고 싶습니다. (p.117)
며칠 전에는 1885년에 아메리카의 한 인디언이 미국 정부에 보낸 편지를 읽었습니다. 그 속에는 이런 구절들이 있습니다.
"당신(백인)들은 어떻게 하늘을, 땅의 체온을 매매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땅을 팔지 않겠다면 당신들은 총을 가지고 올 것입니다. …… 그러나 신선한 공기와 반짝이는 물은 기실 우리의 소유가 아닙니다."
"갓난아기가 엄마의 심장의 고동소리를 사랑하듯 우리는 땅을 사랑합니다."
어머니를 팔 수 없다고 하는 이 인디언의 생각을, 사유와 매매와 소비의 대상으로 모든 것을 인식하는 백인들의 사고방식과 나란히 놓을 때 거기 '문명'의 치부가 선연히 드러납니다. (p.132)
현묵자의 「순오지」에 소개된 건강법에는 일견 건강과는 무연한 양생법(養生法)이 대부분입니다. 이를테면 물욕을 탐하지 말라, 머물 줄 알고, 남 모르게 남을 도우며, 생물을 살해하지 말라는 구절들이 그런 것입니다.
이는 대체로 건강의 개념을 안정, 온화, 평정 등의 정신적 고지에다 세워, 무병, 정력 등의 신체적인 건강의 개념을 그 하위에 두거나 그것만으로서의 독립된 의미를 배제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따라서 영양상태가 양호하다든가 탄력 있는 근육을 단련하는 대신에 욕심을 줄이는 것이 제일이라고 가르치며 각종의 냉난방 설비 대신에 춥지 않을 정도록 따뜻이 하고 한서에 순응함으로써 자연의 리듬과 조화를 이루도록 가르칩니다. (p.134)
절실한 일이 없으면 응달의 풀싹처럼 자라지 못하며, 경험이 편벽되면 한쪽으로만 굴린 눈덩이처럼 기형화할 위험이 따릅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 살면서 성격의 굴절을 막고 구김살 없이 되기란 무척 어려운 것 같습니다.
물론, 개개인이 각자 자기 완결적인 덕성을 도야해가는 개인주의적 결벽성보다는 나는 이것을, 너는 저것을 갖추어 혼자로서는 비록 인격적으로 빈곳이 많을지라도 서로가 서로의 부족한 점을 채워, 연대성의 든든한 바탕에 인격의 뿌리를 내림으로써 사회적 미덕 속에서 개인적 덕성을 완성해가는 쪽이 더욱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개인의 성격적 결함을 두호(斗護)하는 근거가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p.136)
기쁨과 마찬가지로 슬픔도 사람을 키운다는 쉬운 이치를 생활의 골목골목마다에서 확인하면서 여름 나무처럼 언제나 크는 사람을 배우려 합니다. (p.138)
대개의 책은 실천의 현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너무나 흰 손에 의하여 집필된 경험의 간접 기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나마 객관적 관조와 지적 여과를 거쳐 현장인들의 체험에 붙어다니기 쉬운 경험의 일면성, 특수성, 우연성 등의 주관적 측면을 지양하여 고도의 보편성을 갖는 체계적 지식으로 정리되기는커녕, 집필자 개인의 관심이나 이해관계 속으로 도피해버리거나, 전문분야라는 이름 아래 지엽말단을 번다하게 과장하여 근본을 흐려놓기 일쑤입니다.
그래서 책에서 얻은 지식이 흔히 실천과 유리된 관념의 그림자이기 쉽습니다. 그것은 실천에 의해 검증되지 않고, 실천과 함께 발전하지도 않는 허약한 가설, 낡은 교조에 불과할 뿐 미래의 실천을 위해서도 아무런 도움이 못되는 것입니다. (…) 책에서 무슨 지식을 얻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지식인 특유의 지적 사유욕을 만족시켜 크고 복잡한 머리를 만들어, 사물을 보기 전에 먼저 자기의 머리 속을 뒤져 비슷한 지식을 발견하기라도 하면 그만 그것으로 외계의 사물에 대치해버리는 습관을 길러놓거나, 기껏 '촌놈 겁주는' 권위의 전시물로나 사용하면서도 그것이 그런 것인 줄을 모르는 경우마저 없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것을 지식이라 불러온 것이 사실입니다. (p.139)
겨울 밤 단 한 명의 거지가 떨고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에겐 행복한 밤잠의 권리는 없다던 친구의 글귀를 생각합니다. 우리들의 불행이란 그 양의 대부분이 가까운 사람들의 아픔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라 믿습니다. (p.149)
무심한 일상사 하나라도 자못 맑은 정성으로 대한다면 훌륭한 '일'이란 우리의 징심(澄心) 도처에서 발견되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p.154)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 주관의 양을 조금이라도 더 줄이고 객관적인 견해를 더 많이 수입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의 바닥에는, 주관은 궁벽하고 객관은 평정한 것이며, 주관은 객관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객관은 주관을 기초로 하지 않는다는 잘못된 전제가 깔려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각자가 저마다의 삶의 터전에 깊숙히 발목 박고 서서 그 '곳'에 고유한 주관을 더욱 강화해가는 노력이야말로 객관의 지평을 열어주는 것임을 의심치 않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 가장 중요한 것은 그 '곳'이, 바다로 열린 시냇물처럼, 전체와 튼튼히 연대되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사고의 동굴을 벗어나는 길은 그 삶의 터전을 선택하는 문제로 환원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p.155)
연식이위기 당기무 유기지용
挻埴以爲器 當其無 有器之用
흙을 이겨서 그릇을 만드는 경우, 그릇으로서의 쓰임새는 그릇 가운데를 비움으로써 생긴다.
'없음'으로써 '쓰임'으로 삼는 지혜. 그 여백 있는 생각, 그 유원한 경지가 부럽습니다. (p.174)
"나는 들판을 기웃거리다가 전에는 미처 몰랐던 것을 놀라움으로 깨달았다. 사람에게 봄기운을 먼저 가져오는 것은 거루고 가꾸어준 꽃나무보다 밟고 베어냈던 잡초라는 것을. 들풀은 모진 바람 속에서도 잔설을 이고 자랄 뿐 아니라 그렇게 자라는 풀잎마다 아쉬운 사람들이 나물로 먹어온 것도……." (p.175)
독서가 남의 사고를 반복하는 낭비일 뿐이라는 극언을 수긍할 수야 없지만, 대신 책과 책을 쓰는 모든 '창백한 손'들의 한계와 파당성(派黨性)은 수시로 상기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p.188)
영위하는 일상사와 지닌 생각이 한결같지 못하면 자연 생각이 공허해지게 마련이며 공허한 생각은 또한 일을 당함에 소용에 닿지 못하여 한낱 사변일 뿐이라 믿습니다. 저희들이 스스로를 통찰함에 특히 통렬해야 함이 바로 이런 것인즉, 속빈 생각의 껍질을 흡사 무엇인 양 챙겨두고 있지나 않는가 하는 점입니다. 문자를 구하는 지혜가 올바른 것이 못됨은, 학지어행(學止於行), 모든 배움은 행위 속에서 자기를 실현함으로써 비로소 산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항시 당면의 과제에 맥락을 잇되, 오늘의 일감 속에다 온 생각을 가두어두지 않고 아울러 내일의 소임을 향하여 부단히 생각을 열어나가야 함이 또한 쉽지 않음을 알겠습니다. (p.190)
무리하게 변화를 시도하면 자칫 교(巧)로 흘러 아류가 되기 쉽고, 반대로 방만한 반복은 자칫 고(固)가 되어 답보하기 쉽다고 생각됩니다. 교(巧)는 그 속에 인생이 담기지 않은 껍데기이며, 고(固)는 제가 저를 기준삼는 아집에 불과한 것이고 보면 '윤집궐중(允執厥中)' 역시 그 중(中)을 잡음이 요체라 하겠습니다만, 서체란 어느덧 그 '사람'의 성정이나 사상의 일부를 이루는 것으로 결국은 그 '사람'과 함께 변화, 발전해감이 틀림없음을 알겠습니다. (p.191)
버섯이 아무리 곱다 한들 화분에 떠서 기르지 않듯이 욕설이 그 속에 아무리 뛰어난 예능을 담고 있다 한들 그것은 기실 응달의 산물이며 불행의 언어가 아닐 수 없습니다. (p.209)
경험이 비록 일면적이고 주관적이라는 한계를 갖는 것이긴 하나, 아직도 가치중립이라는 '인텔리의 안경'을 채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는 나는, 경험을 인식의 기초로 삼고 있는 사람들의 공고한 신념이 부러우며, 경험이라는 대지에 튼튼히 발 딛고 있는 그 생각의 '확실함'을 배우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추런적 지식과 직관적 예지가 사물의 진상을 드러내는 데 유용한 것이라면, 경험 고집은 주체적 실천의 가장 믿음직한 원동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몸소 겪었다는 사실이 안겨주는 확실함과 애착은 어떠한 경우에도 쉬이 포기할 수 없는 저마다의 '진실'이 되기 때문입니다. (p.213)
다른 사람과 조금도 닮지 않은 개인이나 탁월한 천재가 과연 있는가. 물론 없습니다. 있다면 그것은 외형만 그럴 뿐입니다. 다른 사람과 아무런 내왕이 없는 '순수한 개인'이란 무인도의 로빈슨 크루소처럼 소설 속에나 있는 것이며, 천재란 그것이 어느 개인이나 순간의 독창이 아니라 오랜 중지(衆智)의 집성이며 협동의 결정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잊고 있는 것은 아무리 담장을 높이더라도 사람들은 결국 서로가 서로의 일부가 되어 함께 햇빛을 나누며, 함께 비를 맞으며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화폐가 중간에 들면, 쌀이 남고 소금이 부족한 사람과, 소금이 남고 쌀이 부족한 사람이 서로 만나지 않더라도 교환이 이루어집니다. 천 갈래 만 갈래 분업과 거대한 조직, 그리고 거기서 생겨나는 물신성(物神性)은 사람들의 만남을 멀리 떼어놓기 때문에 '함께' 살아간다는 뜻을 깨닫기 어렵게 합니다. (p.219)
마을의 선한 사람들이 좋아하고 마을의 불선한 사람들 또한 미워하지 않는 사람은 그의 행(行)에 필시 구합(苟合)이 있으며, 반대로 마을의 불선한 사람들이 미워하고 마을의 선한 사람들 또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그의 행(行)에 실(實)이 없다 하였습니다.
구합은 정견 없이 남을 추수(追隨)함이며, 무실(無實)은 선자(善者)의 편이든 불선자의 편이든 자기의 입장을 갖지 못함에서 연유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 불편부당이나 중립을 흔히 높은 덕목으로 치기도 하지만, 바깥 사회와 같은 복잡한 정치적 장치 속에서가 아니라 지극히 단순화된 징역 모델에서는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싸울 때의 '중립'이란 실은 중립이 아니라 기회주의보다 더욱 교묘한 편당(偏黨)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p.255)
* 구합 : 구차스레 남의 비위에 맞게 행동함.
즐거운 마음으로 무엇을 궁리해가며 만들어내는 과정을 살펴보면, 우선 그 즐거움은 놀이이며, 궁리는 학습이고, 만들어내는 행위는 곧 노동이 됩니다. 이러한 생활 속의 즐거움이나 일거리와는 하등의 인연도 없이 칠판에 백묵으로 적어놓은 것이나 종이에 인쇄된 것을 '진리'라고 믿으라는 '요구'는 심하게 표현한다면 어른들의 폭력이라 해야 합니다. (…) 창의성 있고 개성 있는 어린이, 굵은 뼈대를 가진 어린이를 알아보지 못하고 도리어 불량학생이란 흉한 이름을 붙여 일찌감치 엘리트 코스에서 밀어내 버리고, 선생님 말 잘 듣고 고분고분 잘 암기하는 수신형의 편편약골을 기르고 기리어 사회의 동량의 자리를 맡긴다면 평화로운 시기는 또 그렇다 치더라도 역사의 격동기에 조국을 지켜나가기에는 아무래도 미덥지 못하다 생각됩니다. (…) 소년을 보살피는 일은 천체망원경의 렌즈를 닦는 일처럼 별과 우주와 미래를 바라보는 일이라 생각됩니다. (p.271)
물론 어떤 사상체계에 있어서 개인의 역할과 창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개인은 언제나 시대와 사회라는 시공적 상황 속에 갇혀 있기 때문에 개인이 자유롭게 결정했던 일들에 있어서마저도 나중에는 그것에 일관된 방향을 부여한 사회경제적 법칙이 스스로 윤곽을 드러내는 에를 허다히 보게 됩니다.
심지어는 어느 개인의 독창이라고 일컬어지는 사상이나 업적도 대개는 그 개인의 정신세계 내에서 굴절, 추상, 재편된 상황 그 자체인 경우가 많습니다. (p.275)
징역살이에서 느끼는 불행 중의 하나가 바로 이 한 발 걸음이라는 외로운 보행입니다. 실천과 인식이라는 두 개의 다리 중에서 '실천의 다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실천활동을 통하여 외계의 사물과 접촉함으로써 인식을 가지게 되며 이를 다시 실천에 적용하는 과정에서 그 진실성이 검증되는 것입니다. 실천은 인식의 원천인 동시에 그 진리성의 규준이라 합니다. 이처럼 '실천→인식→재실천→재인식'의 과정이 반복되어 실천의 발전과 더불어 인식도 감성적 인식에서 이성적 인식으로 발전해갑니다. 그러므로 이 실천이 없다는 사실은 거의 결정적인 의미를 띱니다. 그것은 곧 인식의 좌절, 사고의 정지를 의미합니다. 흐르지 않는 물이 썩고, 발전하지 못하는 생각이 녹슬 수밖에 없는 이치입니다.
닦아도 닦아도 끝이 없는 생각의 녹을 생각하면서 깨달은 사실은 생각을 녹슬지 않게 간수하기 위해서는 앉아서 녹을 닦고 있을 것이 아니라 생각 자체를 키워나가야 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요컨대 일어서서 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p.277)
자기 짐이 많은 사람은 남의 일손을 도울 겨를이 없습니다. 많이 가진 사람은 도리어 적게 가진 사람의 도움을 받습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빈손이 일손입니다. 적게 가지고 살기 위해서는 아낌없이 버려야 하는데 작은 것 하나 버리는 데도 매우 큰 용기각 필요합니다. (p.281)
그 사람의 삶의 조건에 대하여는 무지하면서 그 사람의 사상에 관여하려는 것은 무용하고 무리하고 무모한 것입니다. 더욱이 그 사람의 삶의 조건은 그대로 둔 채 그 사람의 생각만을 다른 것으로 대치하려고 하는 여하한 시도도 그것은 본질적으로 폭력입니다. 그러한 모든 시도는 삶과 사상의 일체성을 끊어버림으로써 그의 정신세계를 이질화하고 결국 그 사람 자체를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 열악한 삶의 존재 조건에서 키워온 삶의 철학을 부도덕한 것으로 경멸하거나 중산층의 윤리의식으로 바꾸려는 여하한 시도도 그 본질은 폭력이고 위선입니다.
우리가 훌륭한 사상을 갖기가 어렵다고 하는 까닭은 그 사상 자체가 무슨 난해한 내용이나 복잡한 체계를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사상이란 그것의 내용이 우리의 생활 속에서 실천됨으로써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생활 속에 실현된 것만큼의 사상만이 자기 것이며 그 나머지는 아무리 강론하고 공감하더라도 결코 자기 것이 아닙니다. 자기 것이 아닌 것을 자기 것으로 하는 경우 이를 도둑이라 부르고 있거니와, 훌륭한 사상을 말하되 그에 못미치는 생활을 하고 있는 경우 우리는 이를 무어라 이름해야 하는지... (pp.297-298)
나무의 나이테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나무는 겨울에도 자란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겨울에 자란 부분일수록 여름에 자란 부분보다 훨씬 단단하다는 사실입니다. 햇빛 한 줌 챙겨줄 단 한 개의 잎새도 없이 동토에 발목 박고 풍설에 팔 벌리고 서서도 나무는 팔뚝을, 가슴을, 그리고 내년의 봄을 키우고 있습니다. (p.315)
세모에 지난 한 해 동안의 고통을 잊어버리는 것은 삶의 지혜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잊지 않고 간직하는 것은 용기입니다. (p.316)
중요한 것은 우리들의 소위(所爲) 가운데 필연적으로 존재하게 마련인 '작은 실패'를 간과하지 않는 자기비판의 자세입니다. 실패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실패의 발견이 필요한 것이며, 실패가 값진 것이 아니라 실패의 교훈이 값진 것이라 생각합니다. 실패와 그 실패의 발견, 그것은 산에 나무가 있고 땅 속에 바위가 있듯이 우리의 삶에 튼튼한 뼈대를 주는 것이라 믿습니다. (p.334)
추위는 흡사 '가난'처럼 불편할 따름입니다. 그리고 불편은 우리를 깨어 있게 합니다. (p.338)
감기가 허락하는 며칠간의 게으름만은 무척 흐뭇하게 생각합니다. 넘어진 김에 쉬어가자는 배짱으로 책은 물론 자잘한 일상적 규칙이나 이목들도 몰라라 하고 편한 생각들로만 빈둥거리는 며칠간의 게으름은 여간 흐뭇한 것이 아닙니다. 징역살이에는 몸 아플 때가 제일 서럽다고 하지만 내 경우에는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감기 핑계로 누리는 게으름은 도리어 징역 속의 긴장감을 상당히 느꾸어줍니다. 특히 회복기의 얼마 동안은 몸 구석구석에 고였던 나른한 피로감 대신 생동하는 활력이 차오르면서 머리 속이 한없이 맑은 정신 상태가 됩니다. 이 명쾌한 정신 상태는 그동안의 방종을 갚고도 남을 사색과 통찰과 정돈을 가능케 해줍니다. (p.379)
상책은 역시 싸움에 잘 지는 것입니다. 강물이 낮은 데로 흘러 결국 바다에 이르는 원리입니다. 쉽게 지면서도 어느덧 이겨버리는 이른바 패배의 변증법을 터득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사실 진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이기기보다 어렵습니다. 마음이 유(柔)해야 하고 도리에 순(順)해야 합니다. 더구나 지면서도 이길 수 있기 위해서는 자신이 경우에 어긋나지 않고 떳떳해야 합니다. 경우에 어긋남이 없고 떳떳하기만 하면 조급하게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할 필요도 없고, 옆에서 보는 사람은 물론 이긴 듯 의기양양하던 당자까지도 수긍하지 않을 수 없는 완벽한 승리가 되어 돌아옵니다. 그러나 이것도 싸우지 않는 것만은 못합니다. (p.392)
* Special chapter : 과거의 추체험(p.273), 관계의 최고형태(p.311), 노소(老少)의 차이(p.321), 여름 징역살이(p.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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