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dGen's story
(2016-43) 칼 포퍼의 「열린사회와 그 적들」읽기 [인문학-철학] 본문
칼 포퍼의 「열린사회와 그 적들」읽기.
이한구 저, 세창미디어.
세창미디어에서 나온 세창명저산책 시리즈.
지난 번에 박찬국 교수님이 쓰신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 읽기'를 읽고 좋았던 기억에,
해설서를 읽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칼 포퍼의 「열린사회와 그 적들」을 원문으로 읽기엔 어려울 것 같아, 해설서 시리즈인 이 책을 선택했는데,
하... 해설서마저 왜 이렇게 어렵냐.
칼 포퍼는 과학철학에 있어서도 아주 큰 발전을 이루어냈다. 그 핵심적 이론은 '반증가능성의 원리'다. 반증가능성의 원리는 의미의 기준이 아니라 과학과 과학이 아닌 것을 구별하는 구획의 기준이다. 경험과학의 이론은 경험에 의해서 반박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이론으로 규정할 수 있다. 즉 한 이론이 과학적 자격을 얻기 위해서는 그 이론과 상충되는 관찰을 생각할 수 있고, 그것을 경험에 의해서 반증할 수 있도록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판적 합리주의는 우리의 앎이 이성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이성의 절대성과 무오류 대신 오류 가능한 이성을 주장하며, 동시에 비판과 논증에 의해 우리가 보다 앎으로 접근해 갈 수 있음을 역설한다. 보다 나은 앎으로의 전진은 다른 사람의 이론이나 추측에 대한 비판을 통해서, 그리고 우리 자신의 이론이나 추측에 대한 자기비판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열린사회는 비판을 수용하는 사회이며, 진리의 독점을 거부하는 사회이다. 열린사회는 또한 인간의 존엄성을 추구하는 사회이다. 그러므로 이 사회에서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의 보장이 무엇보다 우선한다.
열린사회는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평등을 최대한 조화시키고자 하는 사회라 할 수 있다. "오직 소수의 사람만이 정치를 이끌어갈 수 있다 해도 우리들 모두는 그것을 비판할 수 있다"는 주장은 정치적 자유주의의 단적인 표현이며, "국가는 강자가 휘두르는 경제적 힘의 오용으로부터 약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주장은 경제적 균형주의를 지향하고 있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강조하는 한에서 '열린사회'는 개인주의에 기초한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진정한 개인주의는 모든 개인을 그 자체 목적으로서 취급할 뿐 다른 사람을 위한 단순한 수단이나 도구로 사용하지 않는다.
역사법칙주의는 전체 역사의 과정이 냉혹한 역사의 법칙에 의해 필연적으로 전개되어 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역사법치주의와 열린사회는 양립할 수 없는데, 역사법칙주의는 존재하지도 않는 역사의 필연적 법칙이나 운명의 틀을 인간에게 뒤집어씌움으로써, 인간의 자유와 이성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점진적 사회공학은 우리가 변화의 기제를 확실하게 아는 범위 안에서, 그리고 통제 가능한 범위 안에서 점진적으로 사회를 변혁시켜 나가자는 주장이다. 점진적 사회공학은 먼저 인류의 역사가 추구해가는 어떤 목적이나 인류 역사 전체를 지배하는 어떤 법칙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인간은 자기 운명의 주인이며, 우리가 지구의 표면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과 같이, 우리는 우리의 목적에 따라 역사의 방향을 바꾸거나 그것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비판적 합리주의의 철학은 윤리적 이념에서는 부정적 공리주의로 나타난다. 부정적 공리주의는 고통의 극소화를 주장한다. 열린사회는 다수의 행복을 위해서 소수의 고통을 요구하지 않으며, 또한 소수의 행복을 위해서 다수의 고통을 요구하지 않는 사회이다. 이런 원리에 따라 사회정책의 방향은 행복한 사람을 더욱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불행한 자들의 고통을 치료하는 데로 향해야 한다. 지금 당장 우리 눈앞에 존재하는 불행과 악의 제거부터 추진해 가야 한다. '최선의 추구 대신에 최악의 제거를 위해서 노력하라'
「열린사회와 그 적들」에서 가장 강렬하게 눈에 띄는 것은 인도주의의 정신이다. 특히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하는 것이 국가의 중심적 기능이라고 주장하는 점에서, 그리고 악과 불의에 의한 인간 고통의 구제를 공공정책의 최대의 과제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 점에서, 자유와 평등을 기초로 한 인도주의적 정신은 유감없이 드러난다. 역사란 이성적 존재자인 우리들 개개인의 선택과 결단에 따라 창조되어 간다고 한 점에서, 관용과 상호비판에 기초하여 보다 자유롭고 인간적인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줄기차게 주장한 점에서, 포퍼는 우리 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합리주의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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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법칙주의의 핵심적 원리란, 역사는 특수한 역사적 법칙이나 진화적 법칙에 의해서 지배되며, 우리가 이 법칙을 발견한다면 우리는 인간의 운명을 예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비로운 독재자가 부딪히는 어려움 중의 하나는 그의 조치의 결과가 자신의 선량한 의도와 일치하는지 어떤지를 알아내는 일이다. 그 어려움은 권위주의란 비판을 허용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야기된다. 따라서 자비로운 독재자는 그가 취한 조치에 대한 불평을 쉽게 들을 수 없을 것이다. … 상황은 유토피아적 공학자에게는 분명 더 어려워진다. … 따라서 유토피아적 공학자는 여러 불평들에 귀를 막아야 할 것이다. 사실상 철없는 반대를 억누르는 것이 그의 업무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과 더불어 그는 어쩔 수 없이 합리적인 비판도 또한 억누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유토피아적 공학이란 이름 하에서 그가 비판하는 것은 전체로서의 사회의 재구성, 즉 우리들의 제한된 경험 때문에 그 실제적 결과를 계산하기가 어려운 너무나 전폭적인 변화를 요구한다는 점이다. 현재로는 대규모 공학에 필요한 사회학적 지식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가장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종류의 실험은 한 번에 하나의 사회제도만 바꾸어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제도들이 다른 제도의 구조와 어떻게 조화되는지, 그리고 그 제도들을 우리의 의도대로 작용하게 하려면 어떻게 조정해야 하는지와 같은 것을 단지 이런 식으로밖에 배울 수 없기 때문이다.
유토피아주의에서 플라톤식 접근법의 독특한 특성이며 마르크스가 반대하지 않은 한 요소이자 포퍼가 비현실적이라고 공격한 요소들 중 가장 중요한 요소는 유토피아주의의 전폭성, 즉 돌멩이 하나도 그대로 두지 않고 사회를 전체적으로 다루려는 시도이다. 그것은 사회악을 뿌리째 뽑아버려야 한다는 확신이며, 세상에 어떤 품위 있는 것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비위에 거슬리는 사회제도를 완전히 근절해 버려야 한다는 확신이다. 하지만, 사회는 어떠한 재구성이 행해질 때에라도 그 기능을 계속하여야 한다. 이것이 왜 우리가 사회공학에서 좀 더 많은 경험을 쌓을 때까지 점차적으로 사회제도를 개혁하지 않으면 안되는가 하는 간단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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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적 힘이 모든 악의 뿌리에 놓여 있다는 독단은 없애 버려야 한다. 오히려 모든 악의 뿌리에 놓여 있는 것은 모든 형태의 통제되지 않은 힘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이해하여야 한다. 돈 자체가 특별히 위험한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그것이 위험스러운 것이 되는 것은 돈이 직접 권력을 살 수 있든가, 살기 위해 자신을 파는 경제적 약자를 노예화함으로써 권력을 간접적으로 살 수 있을 때이다.]
그는 '누가 통치자가 되어야 할 것인가'하는 해묵은 물음은 '통치자들을 우리가 어떻게 길들일 수 있을까'하는 보다 실질적인 물음으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주주의에 있어서 지배자-즉 정부-는 피를 흘리지 않고 피지배자에 의해서 교체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권력을 쥔 사람들이 소수에게 평화적 정권교체의 가능성을 확보해 주는 제도적 틀을 잘 지켜주지 않을 때는 그들의 통치는 폭정이다. 민주주의에서 소수의 완전한 보호는 위법자들에게까지 확대되어서는 안된다. 특히 그것은 민주주의를 폭력으로 전복하는 데 타인을 교사하는 사람들에게까지 확대되어서는 안된다.
포퍼는 이제 '누가 국가권력을 행사하느냐'하는 물음은 '어떻게 권력이 행사되느냐'하는 질문과 '얼마만큼 권력이 행사되느냐'는 질문에 비해서 별로 문제가 안된다는 것을 우리가 배워야 할 때가 왔다고 말한다.
자본의 축적은 ⒜ 생산성의 증가, 부의 증가, 소수의 손으로의 부의 집중, ⒝ 빈곤과 비참의 증가를 의미한다. 노동자들은 겨우 목숨을 유지하거나 굶어죽을 정도의 임금밖에 못 받는데, 그것은 주로 '산업예비군'이라고 불리는 잉여노동자들이 임금을 그렇게 최저 수준에 머물게 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잉여가치론은 노동가치설의 범위 앙ㄴ에서 '자본가가 어떻게 자기의 이윤을 만들어 내는가?' 하는 질문에 답하려는 하나의 시도이다. 노동자가 생산한 모든 가치를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그의 임금과 동등한 가치와 잉여가치라고 부르는 그 나머지 가치가 그것이다. 이 잉여가치는 자본가에 의해 점유되는데, 그것이 자본가의 이윤의 기초이다.
우리가 꼭 기억해 두어야 할 것은 생산성의 증가가 바로 자본주의적 착취의 기초라는 점이다. 즉 노동자가 자기 자신과 그 가족이 필요한 것 이상으로 생산할 수 있을 때만, 자본가는 잉여노동을 빼앗아가질 수 있다.
마르크스 시대의 경제에 대한 마르크스의 처절한 묘사는 너무나 진실할 뿐이다. 그러나 비참이 축적과 함께 증가한다는 법칙은 타당치 않다. [마르크스 시대 이후에 생산수단과 노동생산성은 그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되어 왔다. 그리고 어린아이의 노동, 노동시간, 일의 고통, 노동자의 생존의 불안정 등은 증가하지 않고 오히려 줄어들었다.]
[예언자로서의 그의 실패의 이유는 전적으로 역사법칙주의 그 자체에 있다. 즉 우리가 역사적 추세같이 보이는 것을 오늘 관찰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내일에도 같은 현상으로 나타날 것인지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다가오는 사태에 대한 도덕적 비판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 사태가 도덕적 표준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과학적 사상, 특히 사회적이며 정치적인 문제에 대한 사상은 진공 속에서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결정되는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것은 대부분 무의식 혹은 잠재의식적 요소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포퍼가 참된 합리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소크라테스의 합리주의를 말한다. 그것은 자신의 한계에 대한 인식이다. 인간이 얼마나 오류를 잘 범하는 존재인가? 그리고 이렇게 오류를 범하는 존재라는 것을 아는 데에서도 우리가 얼마나 타인의 힘을 빌리고 있는가를 깨닫는 사람들의 지적 겸손이 바로 참된 합리주의다.
그가 거짓 합리주의라고 하는 것은 그가 비판하는 플라톤적 지적 직관주의다. [그것은 자신의 우월한 지적 자질에 대한 뻔뻔스러운 확신이며, 확실성과 권위를 가지고 무엇을 안다고 주장하는 자만이다. 의견은 모든 사람이 가질 수 있으나, 이성은 오직 극소수의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권위주의적 주지주의는 오류를 범하지 않는 발견의 방법과 도구를 가지고 있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이 인식하는 모든 것은 타인에게 크게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이러한 거짓 합리주의를 흔히 합리주의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는데 그것은 내가 합리주의라고 부르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인류의 구체적 역사라는 의미에서의 보편적 역사와 같은 것은 정말 없는 것인가? 도저히 있을 수 없다. 포퍼는 이것이 모든 인도주의자의 답변이며 특히 모든 기독교인의 답변일 수밖에 없다고 확신한다.
[우리는 우리 시대에 해결하려고 선택하는 문제들을 눈여겨 보며 역사를 해석할 수 있다. 역사가 그 자체로 목적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우리는 이러한 목적들을 역사에 부여할 수 있다. 그리고 역사가 자체로 의미를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우리가 역사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포퍼는 사실과 결정의 이러한 이원론은 근본적인 것이라고 믿는다. 사실 자체는 아무 의미도 가지고 있지 않다. 사실은 우리의 결정을 통해서만 의미를 가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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