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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dGen's story

[Book]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 읽기 본문

Report of Book/인문학

[Book]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 읽기

재도담 2015. 8. 8. 22:13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 읽기

저자
박찬국 지음
출판사
세창출판사 | 2012-10-10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세창명저산책 004.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 읽기 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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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 32 

동헌이와의 8월의 책. 

너무나 읽고 싶었던 책인 '소유냐 존재냐'를 읽기에 앞서, 

그 해설서가 있기에 읽어보게 되었다. 

전에 니체 해설서인 초인수업의 저자, 박찬국 교수의 저서다. 

초인수업과 마찬가지로 쉽게 써 주어서 너무 고맙다. 

하지만, 이 책 역시 요약 하는 것이 너무 벅차, 줄 친 부분을 발췌하는 것으로 요약을 대신한다. 


모두가 더 많이 갖기를 바라는 한, 계급들이 형성되게 마련이고 계급투쟁이 있게 마련이다. 

프롬은 현대자본주의를 규정하고 있는 인간심성을 소유지향적인 것으로 보고 있으며 이러한 심성을 존재지향적인 것으로 변화시키는 것에 의해서만 오늘날의 위기는 극복될 수 있다고 본다. 

프롬이 비판하는 것은 소유에서 행복의 원천을 발견하려고 하는 성격학적인 소유이다. 공복과 같이 육체의 생리에 의해서 일정한 포화점을 지닌 생리적 욕구와는 대조적으로 이러한 성격학적인 소유욕은 포화점이 없다. 왜냐하면 일단 그것을 아무리 충족시켜도 우리가 그것을 통해서 극복하고 싶어하는 내적인 공허감과 권태 그리고 외로움과 우울은 충족되지 않기 때문이다. 
소유와 소비는 우리가 자신을 세계와 대립하는 고립된 자아로 생각하면서 경험하게 되는 불안과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선택한 삶의 방식이지만, 그것은 삶의 불안과 외로움을 해소해주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더욱 심화한다. 그러나 소유지향적인 성격의 사람들은 이러한 불안과 외로움이 아직 더 많이 소유하지 않고 소비하지 않은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면서 보다 더 큰 소유와 소비를 추구하게 된다. 우리의 소유욕과 소비욕은 세계 전체를 자신의 소유와 소비의 대상으로 만들 때까지는 만족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소유지향적인 삶에 머물러 있는 한 벗어날 수 없는 불안과 고독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러한 삶의 전제가 되는 생각, 즉 자신을 세계와 대립하는 고립된 자아로 보는 생각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존재지향적 삶이라는 말로 프롬은 어떤 것을 소유하지도 않고 또 소유하려고 갈망하지 않으면서도 즐거워하고 자기의 재능을 생산적으로 사용하면서 세계와 '하나가 되는' 삶의 양식을 표현하고 있다. 프롬은 인류의 '위대한 교사들'이 이미 일찍부터 '소유지향적인 삶을 버리고 존재지향적 삶을 택할 것을 가르쳐 왔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존재와 소유의 차이는 동서양 어디에서든 볼 수 있는 삶의 양식의 차이일 뿐이다. 존재와 소유는 인간이 자아와 세계와 관계 맺는 근본적으로 다른 두 가지 방색이며 그 어느 쪽이 지배하느냐에 따라 사람의 사고, 감정, 행위의 총체가 결정되는 다른 종류의 성격구조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소유지향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든 산업사회의 특징이 되었으며, 동양이든 서양이든 산업사회에서는 돈, 명예, 권력에 대한 탐욕이 인생을 지배하는 것이 되었다. 따라서 서양인들뿐 아니라 동양인들마저 존재양식을 설파하는 선(禪)과 같은 사상을 이해햘 수 없게 되었다. 

사람들은 자신이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 자체에서 충만한 만족을 느끼면서 인간을 비롯한 모든 자연물에 대해서 사랑을 느낀다. 프롬에게 사랑은 인간을 비롯한 자연의 생명과 성장에 대한 우리들의 적극적인 관심과 책임, 그리고 존경이다. 
존경한다는 것은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의 독특한 개성을 아는 능력이다. 이러한 존경은 상대방에 대한 통찰을 전제한다. 사랑은 상대방의 뜻을 다 받아들여 준다는 것이 아니며, 상대방의 왜곡된 심성과 그 원인까지 통찰하고 상대방이 그 왜곡된 심성의 틀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소유양식에서 행복은 타인에 대한 우위 속에, 자기의 힘 속에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정복하고 빼앗고 죽일 수 있는 자신의 능력 속에 있다. 이에 반해 존재양식에서 행복은 사랑, 공유, 그리고 주는 행위 속에 있다. 프롬은 보통 우리 개개인에게 소유지향적인 성향과 존재지향적인 성향이 함께 존재한다고 보며 그 양자는 어느 한쪽이 강화되면 다른 한쪽이 약화되는 관계라고 본다. 
"당신의 '존재'가 희미하면 희미할수록 그리고 당신이 당신의 생명을 적게 표현하면 표현할수록, 당신은 그만큼 더 '소유'하게 되고 당신의 생명은 그만큼 더 소외된다." 

대화가 소유양식에 따라서 이루어질 경우, 중요한 것은 대화의 당사자들이 자신의 의견을 상대방의 논박으로부터 '지키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의견을 바꾸거나 상대방의 의견이 달라지기를 기대하지 않으며 자신의 의견을 강화하기 위해 보다 더 그럴듯한 논거를 발견하는데 열중한다. 이들에게는 자신의 의견이 자신의 소유물이며 따라서 그것을 상실하는 것은 자신의 빈곤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들은 자기 자신의 의견이 변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이 경우의 대화란 사실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대화가 아니며 하나의 논쟁에 불과하다. 
진정한 대화에서는 사람들은 자신의 의견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을 무장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고 개방적인 자세로 대화에 임한다. 그들은 상대방의 말에 자발적이고 생산적으로 반응한다. 그들은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지위에 관해서도 잊어버린다. 그들은 기존의 자신의 자아에 의해서 방해를 받지 않는다. 그들이 상대방의 생각에 충실하게 반응할 수 있고 새로운 관념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은 이렇게 아무것에도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소유양식의 대화에서 사람들은 상대방을 '이김으로써' 자신의 자만심을 충족시키고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자신을 내세우는 데 열중하는 반면에, 존재양식의 대화에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허심탄회하게 고려함으로써 자신을 풍요롭게 하는 데 열중한다. 그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잃을까봐 걱정하지 않으므로 대화할 때 극히 활기를 띤다. 그들의 활기는 전염되기 쉽기 때문에 상대방이 자신의 폐쇄된 에고를 초월하는데 도움이 된다. 

합리적 권위에서는 권위를 갖는 자와 복종하는 자는 본질적으로 평등하며 양자는 단지 특정한 분야에 대한 지식과 능력에서만 구별된다.이에 반해 불합리한 권위에서는 양자는 본질적으로 불평등하고 상이한 가치를 갖는 것으로 간주된다. 비합리적 권위는 힘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그것에 종속된 사람을 착취하는 데 도움이 된다. 비합리적인 권위에 의해서 조직된 계급사회에선느 대부분 권위의 소외과정이 일어난다. 능력이나 인격 대신에 제복이나 칭호가 권위를 대신하게 되는 것이다. 

현대에서 지식은 하나의 정보를 소유하고 있는 상태로 간주되고 있다. 이에 반해 존재적 차원의 인식이란 단순한 정보획득의 차원을 넘어서 인간이 진정한 인간으로 변화되는 과정을 의미한다. 
존재양식에서 인식이 '더 깊이 아는 것'이라면 소유양식에서의 인식은 지식을 '더 많이 소유하는 것'이다. 우리의 교육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더 많은 지식을 소유물로 '갖도록' 훈련하는 데 애쓰고 있으며, 그 지식은 그들이 후일 갖게 될 재산이나 위신의 양과 대체로 비례한다. 

불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깨달아야 하는 한편 자기 안에 있는 힘도 자각해야만 한다. 깨달은 자가 도달하게 된느 마음의 상태인 열반은 무력함과 굴복의 상태가 아니라 인간이 가지고 있는 최고의 힘을 발달시킨 상태이다. 
소유양식의 종교에서는 자신이 신적인 계율이나 명령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고 있을까 두려워하는 비애와 죄악감이 지배적인 반면, 존재양식의 종교에서는 자신의 무한한 힘에 대한 신뢰와 그것을 실현했을 때의 기쁨이 지배적이다. 

소유가 관계하는 것은 '물건'이며, 물건은 고정되어 있어 '기술할 수가 있다.' 그러나 존재가 관계하는 것은 '경험'이며, 인간경험은 원칙적으로 기술할 수가 없다. 완전히 기술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페르소나'이다. 왜냐하면 이 페르소나는 물건이기 때문이다. 
존재는 언어로 전달할 수 없고, 경험을 나누어 가짐으로써만 전달할 수 있다. 소유구조에서는 죽은 언어가 지배한다. 존재구조에서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살아 있는 경험이 지배한다. 존재를 우리는 포착할 수 없고 다만 그것이 드러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는 우리가 안전감을 획득하기 위해서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는 것에 매달리는 소유양식, 즉 비존재의 양식을 포기하는 것, 다시 말해서 자기중심성과 이기심을 버리는 것이다. 

현대인들은 다양한 것을 소유하고 소비함으로써 자신을 보다 풍요롭게 하고 세련될 수 있게 만들 수 있다고 보지만 이는 자신의 자아에 대한 오해에 입각한 것이다. 그것은 자신을 사실은 소유와 소비에 예속시키는 것이다. 현대인들은 소유하거나 소비하지 않고서도 사물들과 교감하는 데서 기쁨과 풍요를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면서 자신을 소비 물자에 의존하는 빈약한 존재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사람은 자라면서 그의 자발적이고 진정한 욕구와 관심 그리고 의지를 포기하고 사회에 의해서 타율적으로 부과된 의지, 욕구, 감정을 택하도록 강요받는다. 사회 및 사회의 대리자로서의 가정은 '한 사람의 의지를 어떻게 하면 그가 모르게 꺾을 수 있느냐' 하는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야만 한다. 그러나 교화, 보수, 징벌, 적당ㅇ한 이데올로기 등의 복잡한 과정을 통해서 이 ㅗ가제는 대체로 아주 잘 해겨되므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자신의 의지대로 살고 있다고 믿고 있으며 그들의 의지 자체가 조작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불교에서는 모든 소유물, 사회적 지위, 가족 그리고 전통적인 모든 사상을 버리고 집착을 갖지 않는 삶을 향해서 나간 부처가 영웅이다. 기독교의 영웅은 예수이다. 그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고 모든 인류에 대한 충만한 사랑에서 행동한 영웅인 것이다. 
가지고 있는 것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위험에서 비롯되는 걱정와 불안은 '존재양식'에는 없다. 여기서 나의 중심은 나 자신에게 있으며 나를 좌우하는 것은 나이기 때문이다. 소유는 사용에 의해 감소되거나 유한한 어떤 것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존재는 우리가 본래 가지고 있는 잠재적인 능력을 발휘함으로써 성장한다. 이성의 힘, 사랑의 힘, 예술적·지적 창조의 힘 등 모든 본질적인 힘은 표현되는 과정에서 성장한다. 존재양식에서 안정에 대한 유일한 위협은 나 자신 속에 있다. 

프롬은 쾌락을 인간의 성장을 저해하는 욕망의 만족이라고 본다. 
기쁨은 생산적 능동석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그것은 갑자기 최절정에 이르렀다가 소멸해버리는 '절정경험'이 아니라 오히려 그 사람의 본질적인 인간능력의 생산적 표현에 수반되는 감정 상태이다. '교접 뒤의 동물은 슬프다'는 격언은 이러한 현상을 사랑이 없는 섹스와 관련해서 표현하고 있다. 섹스의 기쁨은 육체적 접촉이 동시에 사랑의 접촉일 때에야 비로소 경험되는 것이다. 

프롬은 죄라는 것을 흔히 어떤 권위에 대한 불복종으로 이해하는 통상적인 견해에 반대하여 죄를 참된 인간성의 실현을 방해하는 행위로 본다. 
죽음에 대한 공포란 사실은 죽음 자체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잃는 데 대한 공포'이기 때문에 우리가 소유양식 속에 살고 있는 한,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해야 한다. 그것은 나의 육체를 잃는 두려움, 내 자아, 내 소유물, 내 동일성을 잃는 데 대한 공포이다. 그러나 우리가 모든 형태의 소유에 대한 갈망과 자아에 대한 집착을 버릴수록 죽음에 대한 공포는 더욱 약해진다. 

절대적인 평등을 내세우는 사람들은 사실은 소유에 대한 강한 열망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그들은 소유에 대한 욕망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들보다도 더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질시와 원한에 가득 차 있다. 이러한 사실이 다만 엄격한 평등이란 신조에 의해서 표면상 부인되고 있을 뿐이다. 

존재양식은 '지금, 여기'에만 존재한다. 존재는 물론 시간 밖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시간이 존재를 지배하는 것은 아니다. 화가는 물감, 캔버스, 붓과 씨름해야 하며, 조각가는 돌, 끌과 씨름해야 한다. 그러나 창조행위, 그들의 창조하려는 것의 '비전'은 시간을 초월한다. 그것은 산순간에 혹은 여러 순간에 일어나지만 그 비전 속에선 시간이 경험되지 않는다. 
존재양식에서 시간은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소중한 시간이다. 존재양식에서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죽음에 의해서 한정되어 있는 유일회적인 소중한 시간으로 자각하면서, 그러한 시간을 소유와 소비를 늘리기 위해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참된 인간성을 온전히 구현하는 데 사용한다. 

인간이 자신의 삶에 방향과 의미를 제시해주는 세계상을 갖지 못하고 방황하는 상태는 보통 니힐리즘이라고 불리는데, 이러한 니힐리즘의 상태야말로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상태들 중의 하나인 것이다. 
지향체계와 헌신의 대상에 대한 욕구는 인간의 욕구 중 가장 큰 욕구이다. 인간들의 일차적인 욕구는 참된 세계상과 헌신의 대상을 갖는 것보다는 진실이든 허위이든 상관없이 일단은 하나의 지향체계와 헌신의 대상을 갖고자 하는 것이다. 
프롬은 사회경제적 구조와 사회적 성격구조 그리고 종교적 구조는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프롬은 사람들의 의식적으로 신봉하는 제도상의 종교보다도 그 사람들과 사회의 성격을 지배하고 형성하는 실제적인 종교를 더 중시한다. 만일 공공연한 종교체계가 지배적인 사회적 성격과 일치하지 않고 그것이 사회적 생활관습과 모순을 빚고 있다면 그것은 그 사회의 진정한 모습을 은폐하고 미화하는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시장적 성격의 퍼스낼리티는 자신이 집착할 만한 자아조차 전혀 '가질' 수 없다. 그는 '나는 당신이 원하는 바로 그 사람이오'하고 이야기 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자신을 변형시킨다. 시장적 성격을 가진 사람은 단지 최대의 능률을 가지고서 움직이고 일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목적도 갖지 않는다. 그들은 인간은 '왜' 사는가, '왜' 다른 방향으로 가지 않고 이 방향으로 가는가 하는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물음에는 거의 관심이 없다. 그들은 항시 변하는 자아를 가지고 있지만 아무도 진정한 자기(self), 핵심, 정체성을 갖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어느 누구와도 친밀하지 않으며 자기 자신과도 친밀하지 않다. 그들은 자신이 구입한 물건 자체에도 아무런 애착을 갖지 않는다. 이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그 물건이 주는 위신이나 위안일 뿐이며 그것은 전적으로 소비의 대상일 뿐이다. 그리고 이는 친구나 애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어느 누구와도 물건과의 유대 이상으로 깊은 유대를 가질 수 없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친구나 애인도 소비의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취미의 상실은 행복의 상실이다. 

경제에서는 노동은 타락이 아니라 존엄의 근원이며, 어떤 인간도 자기의 복리와 무관한 어떤 목적을 위해 이용되어서는 안되며, 정의(正義)가 임금과 가격을 결정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소유양식에 입각한 자본주의사회에 대한 이들의 비판적 사상을 프롬은 급진적 휴머니즘(radical humanism)이라고 부르고 있다. 급진적 휴머니즘이라는 말로 프롬은 근대가 이룩한 기술적 진보는 계속 유지하면서도 인간의 소외와 기계에의 종속 그리고 비인간화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새로운 세계를 모색하는 사상을 가리키고 있다. 
프롬은 마르크스의 사상에서 무엇보다 취약한 것이 인간의 본질과 인간성의 변화에 관련되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마르크스는 비인간적인 소외현상들이 주로 사회적 환경에서 비롯된다고 보았기 때문에 사회구조의 변혁에만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는 생산수단이 자본가의 손에 있든 국가에 있든 그것만으로는 노동자의 현실에는 큰 변화가 일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천박한 공산주의'는 소유권의 변화, 즉 사유재산의 폐지만을 목표하는 공산주의를 의미한다. 소유의 평등을 사회주의와 동일시하는 천박한 공산주의는 선망과 질시에 바탕을 둔 평균화에 불과하다. 마르크스가 생산수단의 사회화를 주장하면서 자본주의의 사유재산제도를 전도한 것이 사회주의라고 정의를 내릴 때, 그는 소유권과 재산권 등 순전히 경제적인 요인이 인간의 행복에서 갖는 중요성을-그가 비판하는 부르주아들과 마찬가지로- 지나치게 과대평가하고 있다. 

프롬은 마르크스와 슈바이처를 비롯한 모든 급진적 휴머니스트들의 공통된 이상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1. 생산은 경제체제의 요청에 따라서느 안되며, 인간의 현실적인 요구에 봉사해야 한다. 
2. 인간과 자연 사이에 새로운 관계가 맺어져야 한다. 즉 착취가 아닌 협동관계를 확립해야 한다. 
3. 서로의 대립을 연대의식으로 바꾸어 놓아야 한다. 
4. 모든 사회적 제도의 목표는 인간의 복리와 불행의 방지에 두어져야 한다. 
5. 최대한의 소비가 아니라 복리를 조장하는 건전한 소비가 추구되어야 한다. 
6. 개인이 사회생활에 수동적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프롬은 현대산업사회의 병폐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인간 개개인이 소유지향적인 삶을 버리고 존재지향적인 삶을 지향하는 정신혁명을 추구하는 것 이외에 사회구조의 근본적인 변혁이 필요하다고 본다. 프롬은 자신이 지향하는 사회를 인본주의적이고 공동체주의적인 사회주의(Humanistic Communitarian Socialism)라고 부르고 있다. 

프롬은 자신이 지향하는 인본주의적인 사회주의는 모든 사적인 소유를 폐지하고 소유를 평등하게 하는 게 아니라 모든 노동자들이 산업과 정치에 능동적으로 책임 있게 참여하게 하는 것을 목표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사유재산과 공유재산을 추상적으로 대립시키고 모든 문제를 재산권의 문제로 환원시키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의 경영참여와 공동경영, 권한의 분산, 노동과정에서의 인간의 구체적 기능에 초점을 맞추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하고 있다. 노동자들이 이렇게 경영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기 위해서 프롬은 다른 무엇보다도 노동자들의 책임감과 노력이 필요하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