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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초인수업 본문

Report of Book/인문학

[Book] 초인수업

재도담 2015. 4. 9. 21:18



초인수업

저자
박찬국 지음
출판사
21세기북스 | 2014-10-20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안일함을 탐하는 ‘말세인’으로 살 것인가! 고귀하고 기품 있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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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 15  

'지대넓얕'의 카페 회원들에게 니체의 책 입문서를 추천해 달라고 했는데, 「초인수업」을 추천받았다. 

그런데 며칠 뒤, 주견이형이 「초인수업」을 읽어보라고 빌려주는 것이 아닌가. 

이런 동시운명성이라니! 읽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주 쉽고 편하게 씌어 있어 금방 읽을 수 있었다. 



운명과 대결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보다 강하고 깊은 존재로 고양시킬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서 우리는 이 가혹한 운명을 오히려 아름다운 것으로 사랑할 수도 있게 된다. 니체는 인간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안락과 길고 긴 연명이 아니라 자신이 고양되고 강화되었다는 느낌이라고 보았다. 

안락한 삶을 추구하는 인간을 경멸하라. 
우리는 이 세계를 벗어나서 다른 세계를 경험할 수 없기에 이 세계가 선한지 악한지를 평가할 수 없다. 니체는 인간을 짧게 그리고 험난하게 살더라도 자신의 힘, 다시 말해 자신의 생명력이 고양되었음을 느끼고 싶어하는 존재라고 본다. 인간이 무엇인가 위대한 것을 성취하면서 자신이 고양되었다고 느끼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자신과 싸우면서 스스로를 극복하는 것이다. 우리는 안일함을 추구하려는 자기의 성향과 투쟁하면서 자신에 대해서 승리를 거두어야 한다. 니체는, 아름다움이란 우리 인간이 자신의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을 세계에 나눠주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인생, 의미를 찾지 않을 때 의미 있는 삶이 된다. 
인생의 의미에 대한 물음은 어떤 이론적인 답을 통해서도 해결될 수 없고, 그런 물음 자체가 일어나지 않는 상태로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으로만 해결 가능하다. 니체는 영원불변한 세계는 생성 소멸하는 현실을 흔쾌하게 짊어지지 못하는 허약한 인간들이 만들어낸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면서 이른바 영원불변한 참된 세계를 제거해버린다. 

위험하게 사는 것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다. 
가혹한 시련은 나를 단련시키는 최고의 친구다. 마쓰시타 고노스케는 가난하게 태어났기 때문에 부지런히 일하는 습관을 익혔고, 허약하게 태어났기 때문에 건강의 소중함을 깨닫고 부지런히 몸을 단련하여 나중에는 건강하게 태어난 사람들보다도 더 건강해졌으며, 초등학교 4학년을 중퇴했기 때문에 상대가 초등학생이라도 무엇인가 배울 점이 있음녀 배우려고 한 덕분에 많은 지식과 지헤를 쌓을 수 있었다. 

당신의 적을 경외하라. 
경쟁과 투쟁은 내가 겨루어야 할 상대가 나와 비등하거나 나보다 더 우월한 존재여서 나 자신을 위험에 처하게 할 때만 정당화된다. 이 경우에만 경쟁과 투쟁은 서로가 서로를 강화하고 고양시키는 계기로 작용할 수 있다. 니체는 투쟁과 경쟁은 불가피하고, 그것이 불가피한 이상 어떤 형태의 투쟁과 경쟁이 바람직한지를 생각하면서 그것을 발전시켜나가자고 이야기한다. 교회가 제시하는 처방과 치료법은 '거세'다.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망을 승화시키지 않고 악으로 단죄하면서 거세하려고 했다고 본다. 관능에 대한 가장 심한 독설은 성적으로 무능력한 자들이나 금욕주의자들로부터 나오지 않고, 금욕주의자가 될 필요가 있었지만 금욕주의자가 될 수 없었던 자들로부터 나왔다. 거세라든가 근절과 같은 것은 의지가 너무나도 약하고 너무나도 퇴락하여 스스로 절도를 지킬 수 없는 사람들이 욕망과 싸울 때 본능적으로 택하는 방법이다. 

당신을 위한 신은 어디에도 없다. 
니체는 제도화된 그리스도교의 가르침과 예수의 가르침을 서로 구별하고 있다. 니체는 예수를 부처와 거의 동일한 인물로 보았으며, 양자가 지향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동일하다고 생각했다. 예수의 정신과 불교의 정신은 동일한 생리적인 조건에서 비롯된 것이고, 내면적인 평화로 도피해 들어가려는 정신이라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같다는 것이다. 종교란 결국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고 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하며, 인간을 성숙시키고 발전시키는 데 기여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은 니체와 에리히 프롬의 공통점이다. 권위주의적인 종교를 믿으면 믿을수록 사람들은 자신들만의 절대적 진리를 믿고 있다고 생각하는 오만한 인간이 되며 다른 종교나 사상은 모두 허위 내지 이단이라고 배격하는, 배타적이고 독선적이며 편협한 인간이 된다.권위주의적 종교는 그것이 종교라는 형태로 나타나든 정치적 이데올로기라는 유사종교의 형태로 나타나든 모두 구복주의적 성격을 띈다. 인본주의적 종교의 경우 그것을 믿을수록 사람들은 사랑과 성숙한 지혜에 가득 찬 존재가 된다. 이러한 인본주의적 종교에서 신이란 존재는 인간이 지향하는 이상적인 덕성인 사랑과 자비 그리고 지혜를 완전히 구현한 존재를 상징한다. 초인은 강한 긍지와 용기 그리고 민활한 지혜를 갖추고 있으면서 자신보다 강한 자에 대해서는 의연하고 도전적이지만 패자에 대해서는 관용과 자비를 베풀 줄 아는 자를 가리킨다. 

신념은 삶을 짓누르는 짐이다.
토론의 기쁨과 의의는 상대방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게서 무언가를 배우고 자기가 옳다고 믿었던 견해의 문제점을 발견하는 데 있다. 수단으로서의 확신! 많은 것이 확신에 의해서만 달성된다. 위대한 정열은 확신을 이용하며 확신을 다 사용해버리고 확신에 굴복하지 않는다. - 그것은 자신을 자신의 주인으로 생각한다. 특정한 종교적인 이념이나 정치적 이념에 독단적으로 사로잡힌 사람들은 하나의 군중을 형성하면서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수많은 사람들을 죽일 수 있다. 

예술은 삶의 위대한 자극제다. 
근대 과학이 파악하는 세계는 아무런 목적이나 의미 없이 물리화학적인 원소들이 서로 인과적인 작용을 하는 세계이다. 진화론은 살아 있는 개체들의 모든 활동은 맹목적인 생존의 욕망과 종족보존의 욕망에 의해 규정되어 있다고 본다. 인간들의 삶이 단순히 자신과 종족을 보존하기 위해서 온갖 노고를 다하다가 죽어가는 것 외에 다른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본다. 따라서 이 이론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게 된다면 사람들은 결국 허무주의에 빠질 수 밖에 ㅇ벗으며, 이러한 허무주의는 불가피하게 염세주의로 귀결될 수 밖에 없다. 니체에 따르면 근대 과학이 인간에게 제공하는 것은 세계의 실상에 대한 진정한 인식이 아니라 인간의 생존에 필요한 정보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근대 과학이 인간의 생존을 확보하려는 의지와 관점에 의해서 규정되고 있다고 본다. 인간이 목표하는 것이 단순히 생존이나 종족보존이라면 그렇게 생존하기 위해 그리고 종족을 보존하기 위해 발버둥치다가 죽어가는 인생 앞에서 허무를 느낄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오래 연명하는 것이 아니라 짧게 살더라도 충만하게 사는 것이다. 니체는 인간의 삶에 이렇게 충만함을 부여하는 것은 과학이 아니라 예술이라고 본다. 니체는 '오직 예술을 통해서만 삶은 정당화된다'라고 말한다. 그는 예술을 낳을 수 있는 충동을 가상에의 충동(아폴론적 예술)과 도취에의 충동(디오니소스적 예술)로 나눈다. 니체는 힘의 고양과 충일함으로부터 분리된 '아름다움 그 자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생이 몰락하지 않기 위해서 예술이 필요하다. 삶의 예술가란 매 순간 도취라는 고양된 기분 속에서 삶과 세계를 아름답고 충만한 것으로 경험할 수 있는 사람이다. 니체의 고민은 궁극적으로 과학에 의해 '신이 살해된' 이 세계에서 생은 어떻게 긍정될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절정이다. 
떠나는 자가 아직 살아 있는 동안에 작별을 고하는 것이 가능한 죽음, 또한 생전에 성취한 것과 원했던 것에 대한 진정한 평가와 삶에 대한 총 결산이 가능한 죽음이 품위있는 죽음이다. 

너만의 꽃을 피워라. 
니체는 인간을 교육하는 방법을 길들이는 방식과 길러내는 방식의 두 가지로 크게 나눈다. 길들이는 방식은 인간을 특정한 틀에 맞추도록 강요하는 것인데, 이런 방식은 인간을 병들게 만들고 위축되게 만든다. 이에 반해 길러내는 방식은 인간의 타고난 소질과 성향을 긍정적으로 발전시키는 방식이다. 
나를 따르지 말고 너 자신을 따르라! 너 자신을! 우리의 삶도 우리 스스로에 대해 권리를 지녀야 마땅하다! 우리도 또한 자유롭고 두려움 없이, 순진무구한 자기 안에서 자기 자신으로부터 성장하고 꽃을 피워야 한다. 

감정을 다스리는 것을 넘어 몸을 다스려라. 
신체를 완전히 우리의 지배 아래 둘 수 있을 때에야 우리는 본능까지 건강하고 기품 있는 자가 될 수 있다. 우리가 고귀한 인간이 되려면 보는 법과 생각하는 법, 말하고 쓰는 법을 배워야 한다. '보는 법을 배우는 것'은 '눈에 평정과 인내의 습관을 부여하는 것'이다. 보는 법을 배우게 되면 사람들은 대체로 서두르지 않게 되고, 쉽게 믿지 않게 되며, 낯설고 새로운 것을 접하더라도 우선은 적의를 품은 평정과 함께 그것을 대하게 된다. 생각하고 쓰는 법은 '무용을 배우듯' 배워야 한다. 우리가 사유하고 글을 쓸 때에는 사물들이 갖는 섬세한 뉘앙스를 느낌녀서 그것을 표현할 줄 알아야 한다. 
내 활동을 키워주지도 않고 내게 직접 활력을 불어넣지도 않으면서 단지 나를 가르치려고만 하는 모든 것을 나는 증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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