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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42) 나는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 [인문학/에세이] (알버트 아인슈타인)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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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42) 나는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 [인문학/에세이] (알버트 아인슈타인)

재도담 2022. 10. 7. 16:27

나는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 

알버트 아인슈타인 저, 강승희 역, 호메로스, 212쪽. 

우리가 꿰뚫어 볼 수 없는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생각, 그리고 가장 단순한 형태로 나타나는 심오한 이치와 눈부신 아름다움에 대한 인식, 바로 이런 인식과 감정이 참으로 종교적인 태도다. (…) 생명의 영원성이라는 신비, 그리고 실재하는 세계의 놀라운 구조에 대한 어렴풋한 이해, 자연에 드러나 있는 이치의 한 부분이라도 이해하려는 혼신의 노력, 그것으로 내게는 충분하다.

나는 뭔가 발전을 꾀할 만한 할 일을 줌으로써 간접적으로 향상의 기회를 주는 것이 사람들을 위한 최선의 봉사라고 생각한다. 한 인간을 향상시키고 그의 본성을 고양시키는 것은 과학 연구의 결과물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이해하고자 하는 의지이다.

우리의 삶과 노력들을 곰곰이 살펴보면 모든 행동과 욕망이 다른 인간의 존재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금방 깨닫게 된다. 우리의 본성은 사회적 동물의 특징을 닮았다. 우리는 다른 이들이 키운 음식을 먹고, 다른 사람이 만든 옷을 입으며, 다른 사람이 지은 집에서 산다. 대부분의 지식과 생각은 누군가가 창조한 언어라는 매개체를 통해 다른 사람들로부터 전달받았다. 언어가 없다면 우리의 정신 능력은 고등 동물 정도로 보잘 것 없을 것이다. 개인은 나름의 개체이며 저마다의 가치를 지닌다. 다만, 개체로서의 특성 때문이 아니라 위대한 인간 사회의 일원으로서 가치를 지닌다. 이 점이 바로 요람에서 무덤까지 한 인간의 물적, 영적 존재를 이끄는 힘인 것이다. (…) 공동체의 자양분 없이 개인의 인격 성장을 기대할 수 없는 것처럼, 창조적이면서 독립적인 사고와 판단력을 가진 개인이 없다면 사회의 진보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사회의 건강을 위해서는 사회 구성원 간의 긴밀한 정치적 결합만큼이나 개인의 독립이 중요하다.

세상의 어떤 부도 인류를 향상시키는 데 기여할 수 없다고 나는 확신한다. 인류 향상에 누구보다 헌신적인 사람 손에 들어갔다 해도 마찬가지다. 본보기가 되는 위대하고 순수한 인격만이 훌륭한 생각과 고귀한 행동을 낳는 밑거름이다.

★ 종교와 과학

인간을 종교적 사고와 광의의 신앙으로 이끈 감정과 욕망은 무엇인가? 조금만 생각해 봐도, 상황에 따라 급변하는 종류의 감정이 종교적 사고와 경험을 관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원시인에게 종교적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무엇보다 굶주림, 사나운 짐승, 질병, 죽음 등에 대한 공포이다. 존재의 단계가 여기에 머물러 있을 때는 인과관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그래서 인간은 엇비슷한 존재를 머릿속에서 스스로 창조하고는 공포를 주는 사건들이 그 존재의 의지와 행동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이제 그의 자비를 구하는 것이 목표가 되고, 대를 이어 전해진 전통에 따라 의식을 행하고 희생물도 바치면서 그것이 가상의 존재를 달래거나 인간에게 동정심을 갖게 해 주리라 믿는다. 이것이 바로 내가 말하는 공포의 종교이다. 성직자들이 만들어 낸 것은 아니지만, 그들 특수 계급이 형성되면서 공포의 종교는 상당히 안정화 된다. 그들은 사람들과 공포의 대상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자임하면서 이를 근거로 주도권을 장악한다.

사회적 감정은 종교를 형성하는 또 다른 원천이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보다 큰 공동체의 지도자들은 하나같이 유한한 인간이며 실수도 저지른다. 이끌어 주고, 사랑해 주고, 지지해 주기를 원하는 인간은 그래서 사회적, 혹은 도덕적 개념에서 신을 만들어 낸다. 모든 것을 주관하는 신은 우리를 보호하고, 알 맞은 곳에 쓰고, 상을 내리거나 벌하기도 한다. 신은 믿는 자의 세계관의 폭에 따라 한 종족의 삶을 사랑하기도 하고, 전 인류를, 혹은 말 그대로 생명을 사랑하고 아끼기도 한다. 신은 슬픔과 채워지지않은 갈망을 위로하고 죽은 자의 영혼을 영원히 지켜 준다. 이것이 사회적, 혹은 도덕적 개념이다. 

공포의 종교에서 도덕 종교로 발전하는 것은 한 민족의 삶에서 위대한 도약이다. 하지만 원시 종교와 문명화된 종교 모두 공포와 도덕 종교가 어느 정도 혼재되어 있다. 

세 번째 단계의 종교는 ‘우주적 종교 감정’이다. 한 인간이 욕망과 목적의 공허함, 그리고 자연과 사유의 세계에 드러나는 숭고함과 놀라운 질서를 느낀다. 그는 개별 존재를 일종의 감옥이라 여기고 거대한 하나의 완전제로 우주를 경험하고자 한다. 우주적 종교 감정은 종교 발전의 초기 단계에서 이미 싹트고 있다. 예를 들면, 다윗의 시편 여러 곳과 예언서 일부에서 볼 수 있다. 쇼펜하우어의 뛰어난 저술을 통해 알 수 있 는 것처럼, 불교는 이런 요소를 훨씬 강력하게 담고 있다.

모든 시대에 걸쳐 신앙심 깊은 천재란 이러한 우주적 종교 감정이 두드러지는 사람들이었다. 그 감정에는 교리도 없고 인간의 형상을 한 신도 없기에, 그것에 기댄 교회도 있을 수 없다.

그래서 가장 높은 경지의 종교 감정으로 충만한 사람은 어느 시대에나 이단자들 속에서 발견된다. 그들은 대개 동시대인들로부터 무신론자로 치부되거나 때로는 성자로 여겨지기도 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데모크리토스, 아시시의 프란체스코, 스피노자 같은 사람들은 서로 매우 유사하다.

신이라는 개념이나 신학이론도 없는데 어떻게 우주적 종교 감정을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 있을까? 능히 감당할 수 있는 사람들 마음속에서 이 감정을 깨우고 살아 있게 하는 것이 예술과 과학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 기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