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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30) 사이보그가 되다 [사회과학] (김초엽, 김원영) 본문

Report of Book/사회

(2022-30) 사이보그가 되다 [사회과학] (김초엽, 김원영)

재도담 2022. 4. 29. 22:34

사이보그가 되다
김초엽|김원영 저, 사계절, 368쪽.

 

이 책을 읽으며, 장애인과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장애를 바라보는 비장애인의 인식이 흡사 여우를 대하는 두루미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애인들은 그들의 장애를 제거하거나 장애가 없는 세상을 바라기보다(물론 그런 세상이 되면 좋겠지만), 장애를 가지고 있는 채로 불편하지 않은 삶, 낙인을 제거한 시선, 장애를 안고도 온전한 인격과 동등한 개체로 대우받기를 원하고 있지만, 비장애인들은 장애인을 동정과 구제, 또는 함께 하기 불편한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다. 모든 비장애인들은 아직 장애를 갖지 않았을 뿐 언젠가 장애를 갖게 될 사람들이다. 신체의 노화가 진행되면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이 모두 둔해지고 모든 근골격계의 근력도 떨어지며 관절들도 닳아서 사용하기 힘들어진다. 비장애인들은 자신들의 시선으로 장애를 마음대로 재단하지 않고, 비장애인들에게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물어봐야 한다. 그것은 곧 자신의 미래와 대화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 아주 조금은 이 책이 불편한 지점도 있었다. 기술의 개발과 비장애인을 위한 서비스를 보며, 장애인을 고려하지 않은 것에 대한 불만이 나에게는 약간 숨막히게 느껴지기도 했다. 예를 들어 내가 음식을 파는 조그만 가게를 운영하는 사람인데, 내 가게가 계단이 있는 2층에 위치하고 있고, 다양한 시각/청각적 서비스를 제공하지 못하고, 점자로 된 메뉴판을 제공하지 못한다면, 나는 장애인들에게 비난을 받아 마땅한가, 하는 생각이 들어 갑갑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쉽지 않은 지점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조금이라도 노력하고 배려하려고 신경쓰는 것, 그 한 걸음 한 걸음이 중요하지 않을까. 처음부터 완벽하지 않겠지만, 조금씩 노력하다보면 시간이 흘러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지도. 



발문 :

1. 김초엽 작가는 원기능을 회복하고자 하는 사고에서 벗어나, 다른 기능을 활용함으로써 장애의 한계를 극복하는 발상의 전환을 갖는다(청각장애인이 '들을 수 있는 기능을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문자언어로 의사소통함으로써). 그런 예에는 또 어떤 것들이 있을까?

2. 1, 2장을 읽고, 다음의 질문에 대해 생각해보자.
1) 순수한 사람과 사이보그의 경계는 어디일까?
2) 로보캅처럼 뇌를 제외하고 모든 몸이 기계로 대체된 사람도 '나'를 '나'로 볼 수 있을까? '나'의 경계는 어디인가? 자아와 타자의 경계는 어디인가?
3) 신체화 된 기계에 대한 손상의 어디까지를 ‘부상’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인가?

3. 장애는 극복해야 할 대상인가? 수용해야 할 대상인가? 

4. 6장을 읽고, 아름다움은 무엇일까? 인간은 왜 어떤 것을 아름답다고 느끼고, 어떤 것을 추하다고 느낄까? 아름다움은 학습될 수 있는가? 보편적이지 않은 신체를 보고 아름답지 않다고 느끼는 것은 잘못인가? 

5. 때로 새로운 기술의 발전은 그 기술을 습득하지 못한 사람이나, 새로운 기술에 적응하기 어려운 사람을 소외시키기도 한다. 신기술과 그에 따른 윤리적 기준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나? 새로운 기술에 따른 소외의 대상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는 그만큼 많은 비용과 노력이 소요되는데 그 비용을 부담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어떻게 경쟁할 수 있나? 

6. 8장을 읽고, '치료'와 '증강'이 갖다고 생각하는가? 다르다고 생각하는가? 그 둘에 대한 도덕적 평가는 같은가, 다른가? 

7. 책을 읽으면서 드는 여러가지 의문이나 궁금증들을 이야기해 보자. 

8. 돌봄과 자율성. 나는 반려동물을 키우면서 개의 건강에 유익하다는 음식만 먹인다. 그래서 우리집 개는 평생을 같은 사료만 먹는다. 모든 영양소가 적절하게 공급된 비빔밥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누군가 나에게 평생 그 비빔밥 하나만 먹인다면? 건강에 좋지 않은 모든 음식(콜라, 술, 과자, 담배, 등?)을 다 법으로 금지한다면? 때로 사람에게 유해하다고 판단되는 것조차 금지하지 않고 자율적인 판단으로 선택하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녀에게 게임이나 소셜미디어를 금지하는 것은 옳은 일일까, 그렇지 않은 것일까? 

9. 돌봄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들의 고충과 고민을 나누고, 그들에게 위로와 안락함을 제공하는 모임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책에서 건진 문장들. 

20세기 후반 장애권리운동이 세계적으로 전개되었고, 한국 사회에서는 2000년대 초중반에 이르러 폭발적으로 대중화되었다. 나와 김초엽은 모두 장애권리운동과 장애학의 자장 안에서 성장했다. 이 말은 우리가 장애로 인해 일상에 불편함을 겪더라도 "일어나 걸어라"보다는 "(걷지 않아도 좋으니)네 방식대로 일어나라"는 주장이 합당한 경우가 더 많다고 생각한다는 뜻이다. 장애가 있다고 규정된 우리의 몸을 쉽게 부정하고 치료하고 구원하겠다는 주장을, 그것이 설사 과학적 의견에 토대를 두고 있더라도, 우리는 신중하고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과학 지식을 신뢰하고 기술의 효용에 기대를 걸지만, 첨단 지식과 기술의 발전이 언제나 인간의 문제를 매끄럽게 해결하지는 않는다는 점에도 주목한다. 지금 이곳의 삶을 소외시키거나 나 자신을 온전하지 못한 존재로 규정할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를 우리는 우려한다. (p. 10 ~ p. 11)

나에게는 말소리를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정보로 전환해주는 과정이 필요했다. 다시 말해서 먼 미래에 도래할 완벽한 보청기나 청력 치료제에 대한 약속이 아니라, 새로운 방식의 의사소통과 그런 소통 환경을 가능하게 하는 기술이 내 삶을 실제로 개선했다. 그 기술은 먼 미래가 아니라 현실과 가까운 곳에 줄곧 있었는데, 오랫동안 나에게 선택지로서 주어지지 않았을 뿐이다. (p. 35 ~ p. 36)

주의를 기울이느냐 아니냐의 문제이고, 우선순위의 문제이다. 흔히 사람들은 장애를 치료할 과학기술과 의학의 '위대한' 발전에 기대를 걸지만, 그렇게 멀리 가지 않더라도 장애인들의 삶을 실질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선택지들이 있다. 그러나 그 대부분은 여전히 접근이 불가능한 상태다. (p. 36)

치료와 회복만이 유일한 길처럼 제시될 때 장애인들의 더 나은 삶은 끝없이 미래로 유예된다. (p. 38)

살아가는 동안 누구나 어떤 시기에는 정상성의 범주에서 밀려난 존재가 된다. 단지 그것을 상상하지 않으려 애쓸 뿐이다. 그래서 나는 장애인 사이보그를 이야기하는 것이나 기술과 취약함, 기술과 의존, 기술과 소외를 살피는 것이 결국 모든 이들의 문제이기도 하다고 말하고 싶다. 독립적이고 유능한 이상적 인간과 달리, 현실의 우리는 누구도 취약함에서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p. 40)

우리가 장애인의 경험을 '사이보그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고 말할 수 있다면, 보장구는 우리 몸의 '결핍감'을 더 선명하게 만들기를 멈추고 우리의 신체를 재구성할 가능성이 될지도 모른다. (p. 55)

과학의 발전은 분명 장애가 있는 사람의 삶의 질을 높이고 고통을 줄여나가고 있다. 나는 이러한 과학적 발견과 기술의 응용을 지지한다. 그러나 과학이 장애에 관한 정체성 물음을 '장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네가 인간이며, 조만간 그 장애는 극복될 것이므로 너는 더 '온전한' 인간 공동체에 포함될 수 있다고 전제하는 이상, 장애 그 자체의 의미를 규정하지dentily 않는다는 점을 성찰해야 한다. (p. 60)

시혜는 위계를 만든다. 누군가 나에게 따뜻한 도움을 베푼다고 주장할 때 그것이 정말 도움이 되는지, 다른 문제를 가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따져 묻기란 쉽지 않다. 온도를 조금 낮추어 생각해보자. '따뜻한 기술'은 그 수혜자로 설정된 장애인들에게 정말로 따뜻하기만 할까? 언젠가는 기술이 장애인을 걷게 하고, 듣게 하고, 말하게 할 테니 모두가 그 따뜻한 기술의 실현을 기다리고 있으면 되는 것일까? (p. 72)

질병과 장애를 치료하려는 시도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누군가는 장애를 가진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장애를 치료하기를 원할 수도 있다. 문제는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더 나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손상'을 제거해야 한다는 생각이 사회의 지배적인 관점이라는 것이다. 치료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관점은 현실에서 장애인들이 지금보다 더 잘 살아갈 수 있는 다양한 가능성을 지워버린다. (p. 81 ~ p. 82)

장애를 가진 채로도 잘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자는 주장과, 기약은 없지만 언젠가 나올 치료법에 희망을 걸자는 주장 중에서 지나치게 후자에만 무게가 실려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 사회에는 장애인을 기술과 의학으로 교정하려는 정상성 규범이 굳건하게 자리잡고 있어 장애인의 현실을 개선하자는 목소리가 발 붙일 곳이 없다. (p. 84)

어떤 기술도 완전무결한 해답이 될 수는 없다. 기술 낙관론자들이 약속하는 기술 유토피아는 결코 그런 방식으로 이곳에 도래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불완전한 기술과 불완전한 인간의 몸으로 지금 이 세계를 바꾸어나가야 한다. 언젠가 나타날 기적의 과학기술에 이른 찬사를 보내는 대신, 이미 현실에서 기술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이보그들의 구체적인 경험에 주목해야 한다. (p. 88)

하이테크 문화에서 "인간과 기계의 관계에서는 누가 생산자이고 누가 생산물인지 불확실하다. 코딩 작업으로 구성되는 기계에서는 무엇이 정신이고 무엇이 육체인지 분명치 않다." 이 시대에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이보그, 하이브리드, 모자이크, 키메라임을 깨닫게 된다." 정보과학과 커뮤니케이션학이 고도로 발달한 세상에서는 기계와 유기체, 기술적인 것과 유기체 적인 것 사이에 근본적인 분리는 없다는 것이다. (p. 103)

장애의 가시성과 비가시성, 장애 당사자가 그중에서 무엇을 선택하고 어디까지 드러낼 것인가 하는 문제는 아주 복잡하다. 장애에 대한 낙인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장애를 공개적으로 드러낸다는 것은 단순히 개인의 특성 하나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장애는 그 자체로 개인의 다른 특성을 모두 지우는 부정적 정체성으로 여겨진다. (p. 125)

세 명의 이야기에는 공통점이 있다. 당사자가 아닌 주위 사람들에게 '걷기'가 가장 좋다는 정상성 규범을 강요받는다는 것, 걸을 수 없다면 걷기와 가장 유사한 의족 보철물이나 목발이 사회적으로 선호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당사자들은 일상의 수많은 상황과 환경 속에서 무엇이 자신에게 가장 적절한 장치인지를 경험으로 터득한다. (p. 132)

인공 보철 디자인은 패션과 디스크레션discretion(주목받지 않게 겸양되고 화려하지 않고 단정한, 소위 '꾸미지 않은 듯 꾸민' 스타일) 사이의 긴장 속에서 발전했다. (p. 156)

과학기술학Science and Technology Studies(STS)은 과학과 기술, 사회, 문화를 분리된 것이 아니라 상호 관련된 복합적 맥락의 총체로 바라본다. 과학과 기술 지식은 문화, 정치, 경제적인 맥락 속에서 생산되고 구성되며, 그렇게 생산된 지식은 또 다른 질문과 문제를 만들어낸다. 과학기술학자들은 과학과 기술이 중립적이고 객관적이라는 오랜 통념을 깨뜨리며 기술 지식의 생산에 관여하는 권력을 해부해 보였다. 과학기술학이 하는 일은 과학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과 기술 지식이 생산되고 이용되는 방식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것이다. (p. 180)

장애인의 신체가 기술 및 의학과 맺고 있는 관계는 단순하게 정리할 수 없다. 하나의 기술이 장애인의 일상을 개선하는 데에 도움을 주면서, 동시에 다른 방식으로 고통을 가하기도 한다. 장애나 질병을 가진 사람이 생명을 유지하거나 고통을 줄이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기술들이 있지만, 그런 유용한 기술들도 언제나 '좋은' 방식으로만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장애인의 신체는 이미 기술과 밀접하고 복잡한 방식으로, 때로는 간접적인 방식으로 얽혀 있는데, 이 관계를 '좋은 것' 또는 '나쁜 것'으로만 규정지을 수는 없다. 그렇다면 필요한 것은 기술이 장애인을 억압한다거나 혹은 장애인에게 혜택만을 가져온다는 이분법적인 관점이 아니라, 기술과 장애의 관계를 장애 중심적으로 재해석하고 다시 쓰는 새로운 관점이다. (p. 184)

크립crip은 성소수자들이 자신을 퀴어queer로 지칭하는 것과 개념적으로 유사한 단어다. 무언가를 ‘크리핑cripping’한다는 것은 비장애중심주의와 정상성 규범에 적극적으로 저항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장애를 단순한 결함이 아닌 어떤 가능성과 다양성의 자원으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p. 185 ~ p. 186)

장애인을 위한 기술이 비장애인 혹은 노약자들에게도 도움이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보편적 설계의 가치 자체는 여전히 유효하다. 스펙트럼의 양쪽 극단을 모두 고려한 접근성 설계는 그 중간 어디쯤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도움이 된다. 보편적 설계를 지향하되 장애 정의와 접근성 실현을 설계의 중심에서 제외하지 않고, 장애인이 지식 생산의 주체가 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p. 205)

▶ 장애는 사회적 장애물과 사회적 억압의 문제이지, 손상의 문제가 아니다. 
▶ 우선순위는 구조적인 변화에 있으며, 개인을 사회적 규범에 맞추도록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 치료 담론은 손상을 개인화하고 병리화하는데, 손상은 결함이 아니라 차이라는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장애를 무리하게 치료하고 극복하려는 태도에서 자유로워지고, 나아가 자신의 모습을 당당히 수용하고 몸과 정신의 다양성을 긍정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노력. 이것이 20세기 후반 내내 세계적으로 확산된 장애권리운동의 이념이었다. (p. 227)

사람들의 일상생활과 사회 조직을 이음새 없이 직조하는 '심리스-스타일'의 밑바탕에는 그 '매끄러움'을 유지하기 위해 수많은 '덜컹거림'을 수선하고 버티는 손길이 촘촘히 닿아있음도 잊어서는 안된다. 과학학자 하대청은 이 손길을 '돌봄 노동'이라고 표현한다. (p. 241)

의식적인 개입이 최소화될수록 우리는 '삼매경'에 빠진다. (p. 248)

매끄럽게 설계된 세계 어딘가에 적응하지 못한 장애인이 출현하는 것은 지루하고 의미 없는 유튜브 영상 한가운데 배터리가 5퍼센트 남았음을 알리는 사인처럼 이음새를 만든다. 그 틈새에서 우리는 넋 놓고 지켜만 보던 세계에서 빠져나와 비로소 우리 자신에게 시선을 돌린다. 우리가 지금 더 나은, 더 필수적인, 더 절실한 목표를 향해 나아가며 테크놀로지를 활용하고 경험하고 있는지를 비로소 점검할 기회가 생긴다. (p. 249)

인간과 다른 지각 세계를 가진 동물들을 이야기할 때 움벨트umwelt라는 말을 쓴다. 객관적인 현실이 아니라 하나의 생물체가 주관적으로 인지하는 세계, 그 개체가 살아온 또한 지각하는 환경을 일컫는 말이다. 외계까지 갈 것도 없이 이 행성 지구에는 다른 감각을 가진 생명체들이 아주 많다. (p. 255)

장애를 외계성으로 비유하는 것이 항상 적절하지는 않겠지만, 이 비유에서 적어도 한 가지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하나의 행성이든 우주선이든 어떤 공간을 공유하며 살아가야 하는 외계 종족을 만났을 때 함께 살아 가기 위해 그들을 무작정 인간과 같아지도록 교정하는 것은 가장 폭력적인 해결책이 되리라는 것이다. 인류가 그보다 현명하다면, 다른 존재로서 서로를 조금씩 불편하게 만들고 또 서로 적응해가며 같이 살아가는 법을 찾으려 할 것이다. 인간으로의 일방적인 동화를 요구하는 대신 이 사회 속에 다른 존재들의 자리를 만드는 방식으로 비록 픽션에서조차도 그 과정은 험난한 가시밭길이지만, 그럼에도 언제나 가볼 만한 가치가 있는 길이다. (p. 275)

어쩌면 미래의 기술, 미래의 과학은 장애인들에게 지금보다 더 많은 선택지를 제공해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 발전은 분명히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것이 '장애의 종식'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결함 없는 완전한 기술을 거머쥘 수 없고, 불멸에 도달할 수도 없다. 대신 우리는 다른 대안을 생각해볼 수 있다. 바로 능력차별주의를 끝내는 것. 그것은 손상과 취약함, 의존에 대한 우리의 근본적인 태도를 바꾸는 것이다. (p. 278)

이제 나는 우리가 다른 미래에 도달하는 상상을 한다. 그 미래는 건강하고 독립적인 존재들만의 세계가 아니라 아프고 노화하고 취약한 존재들의 자리가 마련된 시공간이다. 그리고 서로의 불완전함, 서로의 연약함, 서로의 의존성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세계이다. 그곳에서는 삐걱대는 로봇도, 허술한 기계 부품을 드러낸 사이보그도 완전한 타자가 아닐 것이다. 그들은 이미 미래의 일부일 것이다. (p. 282 ~ p. 283)

한편 돌봄자를 돌보는 기술도 매우 중요하다. 누군가를 장기간 돌보는 사람의 심리상태를 체크하고, 서로 시간이 될 때 돌봄 노동을 나누는 사회적, 기술적 플랫폼을 정교하게 설계할 수도 있다. 휠체어를 타는 사람도 아이를 돌보거나, 나이든 부모님을 모시고 '보호자'로서 얼마든지 병원에 갈 수 있는 시스템을 고민해볼 수도 있다. 중증장애인이 로봇의 지원을 받아 고양이를 돌보고, 그 고양이는 비장애인 가족을 정서적으로 도우며, 비장애인 가족은 중증장애인을 지원하는 장면을 상상해보라. 이 돌봄의 순환 속에서는 중증의 장애를 가진 사람을 포함해 누구도 일방적으로 돌봄을 제공하거나 받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다. (p. 305)

장애인 인권운동가 김도현은 장애인운동의 목표란 자립이 아니라 연립을 기본적인 삶의 조건으로서 지향하는 것이라면서, 이때 자기결정권(자율성)이란 “여러 주체들이 상호 의존적 관계 속에서 서로의 의견과 판단을 소통하고 조율해가며 실현할 수밖에 없는 권리”임을 강조한다. 나는 연립이라는 삶의 조건을, 지금 여기를 사는 사람들의 협력과 연대, 연결을 넘어 언제 등장할지 모르는 '타자'와도 잇닿는 삶이라고 말하고 싶다. (p. 3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