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redGen's story

(2021-13) 어린이라는 세계 [에세이] (김소영) ★ 본문

Report of Book/에세이

(2021-13) 어린이라는 세계 [에세이] (김소영) ★

재도담 2021. 3. 4. 17:40

어린이라는 세계 

김소영 저, 사계절, 260쪽. 

듣똑라를 통해 알게 된 <어린이라는 세계> 

김소영 작가님의 인터뷰를 듣다가, 아, 이건 꼭 읽어야 해!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읽으면서 소리내어 웃게 되다가, 감동을 받기도 하고, 코끝이 찡해지는 순간도 있었는데, 

매순간 느꼈던 감정은, 가슴이 훈훈해지는 것. 

이 책을 딱 한 마디, 아니 두 마디로 정의한다면 "배려"와 "따뜻함"이 아닐까 싶다. 

 

책에서 건진 문장들. 

어린이에게 '착하다'는 말을 잘 쓰지 않는다. 착한 마음을 가지고 살기에 세상이 거칠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렇기 때문에 착한다는 말이 약하다는 말처럼 들릴 때가 많아서이기도 하다. 더 큰 이유는 어린이들이 '착한 어린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 두려워서다. 착하다는게 대체 뭘까? 사전에는 '언행이나 마음씨가 곱고 바르며 상냥하다'고 설명되어 있지만, 실제로도 그런 뜻으로 쓰인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보다는 어른들의 말과 뜻을 거스르지 않는 어린이에게 착하다고 할 때가 더 많은 것 같다. 그러니 어린이에게 착하다고 하는 건 너무 위계적인 표현 아닌가. 
'착하다'는 게 나쁘다는게 아니다. '착한 어린이'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어른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는 어린이를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 부모를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착한 어린이가 되려고 애쓰다 멍드는 어린이가 어딘가에 늘 있다. 

나는 어린이들이 좋은 대접을 받아 봐야 계속 좋은 대접을 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 안하무인으로 굴기를 바라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내 경험으로 볼 때 정중한 대접을 받는 어린이는 점잖게 행동한다. 또 그런 어린이라면 더욱 정중한 대접을 받게 된다. 어린이가 이런 데 익숙해진다면 점잖음과 정중함을 관계의 기본적인 태도와 양식으로 여길 것이다. 점잖게 행동하고, 남에게 정중하게 대하는 것. 그래서 부당한 대접을 받았을 때는 '이상하다'고 느꼈으면 좋겠다. 사실 내가 진짜 바라는 것은 그것이다. (p.41)

나는 어린이의 품위를 지켜 주는 품위 있는 어른이 되고 싶다. 어린이 앞에서만 그러면 연기가 들통나기 쉬우니까 평소에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p.45)

어른들이 어린이에게 해 줄 일은 무서운 대상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마주할 힘을 키워 주는 것 아닐까. 자연스러운 성장 과정을 응원하고, 부드러운 손길로 다독이면서. (p.53)

정말 소득이 없을까? 그때그때 필요한 규칙을 만들고 고치고 응용하면서 배우는 것이 없을까? 여럿이 어울려 놀다가 억울한 처지가 되어 보고, 박수도 받아 보고, 믿기지 않는 승리나 아까운 패배를 경험하는 것은 어떤가. 같은 편이 되고 싶지 않던 아이와 한편이 되어 보고, 힘을 합치고, 의외로 손발이 맞아 가까워졌다가 다시 실망하고 다시 기대하는 것도 소득이 아닐까? 복잡한 감정들을 곱씹으며 집에 갔다가 다음 날이면 모든 것을 깨끗이 잊고 어린이는 다시 놀이터로 달려 나간다. 나는 이런 순간들이 어린이가 성장하는 데 꼭 필요한, 다른 것으로 대신할 수 없는 자양분이 된다고 믿는다. 무엇보다 지금이 몇 시인지도 모르고 여기가 어디인지도 잊고 자기가 완전히 소진될 때까지 노는 그 순간이 어린이의 현재를 빛나게 한다. '놀기'에는 아주 큰 소득이 있다. (p.61)

어린이는 부모로부터 받은 것과 스스로 구한 것, 타고난 것과 나중에 얻은 것, 인식했거나 모르고 지나간 경험이 뒤섞인 존재다. 어른이 그렇듯이. (p.90)

나도 TV가 환상을 판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 화려한 것을 보여 줘야 한다면 차라리 세계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 주면 좋겠다. 어느 집 넓은 거실보다는 그쪽이 더 좋은 환상 아닐까. (p.102)

어린이에게는 어른들이 환경이고 세계다. (p.146)

제일 자주 발견하는 건 역시 지우개다. 왜 그런지 어린이가 두고 간 지우개에서는 나름의 역사 같은 게 느껴진다. 아무렇게나 닳아 있고 별 특징이 없는데도 그렇다. 손에 쥐면 따뜻하다. (p.166)

대부분의 양육서들이 공통으로 강조하는 것은 '아이의 개성을 존중해라'인데, 어째서 부모의 개성은 존중하지 않는 걸까? (p.177)

어린이는 공공장소에서 예의를 지켜야 한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 어디서 배워야 할까? 당연하게도 공공장소에서 배워야 한다. 다른 손님들의 행동을 보고, 잘못된 행동을 제지당하면서 배워야 한다. 좋은 곳에서 좋은 대접을 받으면서 그에 걸맞은 행동을 배워야 한다. 어린이가 어른보다 빨리 배운다는 것은 우리 모두 아는 사실이다. (p.213)

사회가, 국가가 부당한 말을 할 때 우리는 반대말을 찾으면 안 된다. 옳은 말을 찾아야 한다. 우리가 사회에 할 수 있는 말, 해야 하는 말은 여성을 도구로 보지 말라는 것이고, 아이를 낳고 키우기 좋은 세상을 만들라는 것이다. 우리 각자의 성별이나 자녀가 있고 없고가 기준이 될 수 없다. 우리가 어린이를 위해서 목소리를 내는 것은 어린이 스스로 그렇게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약자에게 안전한 세상은 결국 모두에게 안전한 세상이다. 우리 중 누가 언제 약자가 될지 모른다. 우리는 힘을 합쳐야 한다. 나는 그것이 결국 개인을 지키는 일이라고 믿는다. (p.219)

어린이를 사랑한다고 해서 꼭 어린이를 존중한다고 할 수는 없다. 어른이 어린이를 존중하지 않으면서 자기중심적으로 사랑을 표현할 때, 오히려 사랑은 칼이 되어 어린이를 해치고 방패가 되어 어른을 합리화한다. 좋아해서 그러는 걸 가지고 내가 너무 야박하게 말하는 것 같다면, '좋아해서 괴롭힌다'는 변명이 얼마나 많은 페단을 불러왔는지 생각해 보면 좋겠다. 어린이를 감상하지 말라. 어린이는 어른을 즐겁게 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어른의 큰 오해다. (p.227)

"만약에 통일이 된다면, 그때는 지금 어린이들이 커서 어른이 되어 있을 텐데 그때 가서 문제가 발견되면 어떡해요? 좋은 점만 알고 대비를 못 했다가 '아, 이건 아니다' 하고 없었던 일로 할 수는 없잖아요. 그때 가서는 저희가 해결해야 될 텐데, 왜 어린이 한테는 의견을 안 물어봐요?" (p.231)

그렇게 생각하니 1960년, 어른들도 좀체 나서지 않는 이 대규모 시위에 어린이들이 왜 나갔을지 어렴풋이 짐작이 되었다. 이 어린이들은 국민이 주인이 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어쩌면 어른들보다 잘 알지 않았을까? 학교에서 배운 것이 있고, 세상에서 본 것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려 보았을지 모른다. 민주주의 국가가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하는지를. 그 그림은 이전의 어느 세대도 그려 보지 못한 것이다. 들은 적도 없었으므로. (p.234)

전한승 어린이가 사망한 뒤 수송초등학교 어린이들이 시위에 나설 때 4학년 강명희 어린이는 이런 시를 썼다고 한다. 
...... 나는 알아요 우리는 알아요 
엄마 아빠 아무말도 안 해도 
오빠와 언니들이 
왜 피를 흘렸는지를...... (p.235)

"어린이를 재래의 윤리적 압박으로부터 해방하여 그들에게 대한 완전한 인격적 예우를 허하게 하라." (『색동회어린이 운동사』) (p.238)

어린이들에게는 서운한 말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어린이날이 어린이의 소원을 들어주는 날에 그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보다는 어린이가 '해방된 존재'가 맞는지 점검하는 날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해방된 사람들답게 자유로운지, 안전한지, 평등한지, 권리를 알고 있으며 보장받고 있는지 어린이와 어른이 함께 점검하고 잘못된 것을 고쳐나가는 날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려면 어린이 날은 지금보다 훨씬 거창한 하루가 되어야 한다. (p.239)

나는 이제 어린이에게 하는 말을 나에게도 해 준다. 반대로 어린이에게 하지 않을 말은 스스로에게도 하지 않는다. (p.253)

어린이가 가르쳐 주어서 길을 아는 게 아니라 어린이에게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지 고심하면서 우리가 갈 길이 정해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린이를 가르치고 키우는 일, 즉 교육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몫이 된다. 가정과 학교는 교육의 출발점일 뿐 결국 책임은 사회가 져야 한다. (p.2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