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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46) 서양미술사 [예술/대중문화] (E.H.곰브리치) 본문

Report of Book/예술·취미

(2019-46) 서양미술사 [예술/대중문화] (E.H.곰브리치)

재도담 2019. 9. 3. 14:12

서양미술사 

에른스트 H. 곰브리치 저, 백승길┃이종숭 역, 예경, 688쪽. 

 

선사 및 원시 부족들 : 그림에 샤머니즘적인 힘이 있다고 믿음. 

이집트·메소포타미아·크레타 : 각 부분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방향의 조합으로 그림을 그림. 공식대로만 그리고 예외를 허용하지 않음. 

BC7-5세기 (그리스) : 공식이 깨지고 보이는대로, 다양한 표현법이 등장. 감정을 표현하기 시작. 

BC4세기-AD1세기 : 주술적·종교적 연관성 상실. 역동적인 표현, 인물의 표정 묘사가 시작됨. 미술품이 고가로 거래되기 시작. 

AD1-4세기 : 로마에서 토목공학이 발달. 아치를 사용하기 시작함. 기독교 미술이 나타나기 시작. 사실적인 묘사에서 종교적인 가르침을 전달하기 위한 의미 전달로서의 역할이 강조됨. 

5-13세기 (로마·비잔티움) : 종교적 색채가 강해짐. 기원전 5세기의 그리스 미술가들은 아름다운 육체의 이미지를 어떻게 형상화하느냐에 관심을 기울인 반면 고딕 미술가들에게는 이 모든 방법과 기교가 하나의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했으며 그 목적은 성경의 이야기를 한층 더 감동적으로, 그리고 신빙성 있게 전달하는 것이었다. 
조토 디 본도네 Giotto di Bondone 단축법, 입체적 표현법 등을 이용해 평면에서 깊이감을 느끼게 하는 회화를 처음으로 그림. 

14세기 : 회화의 주제가 종교에서 자연으로 확대. 미술가들의 작품을 감상하는 일반 사람들도 자연을 묘사한 화가의 기교나 그의 그림 속에 얼마나 많은 양의 뛰어난 세부 묘사가 들어있는가에 따라 미술가를 평가하기 시작. 

15세기 초 : 필리포 브루넬레스키 Fillippo Brunelleschi 새로운 건축방법의 창조, 원근법의 발견. 
도나텔로 Donatello 웅장하고 사실적인 조각. 
얀 반 에이크 Jan van Eyck 유화 안료를 고안. 사실적이고 세부적인 묘사. 

15세기 후반 (이탈리아) : 화가들과 그 후원자들은 다같이 미술을 성경의 이야기를 감동적인 방법으로 표현하는 데에만 사용하는 게 아니라 현실 세계의 한 단면을 거울처럼 반영하는 데에도 이용할 수 있다는 생각에 매혹되었다. 미술에 있어서 이 거대한 혁명의 가장 직접적인 결과는 모든 곳의 미술가들이 새롭고 놀라운 효과를 얻기 위해서 실험과 탐구를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 모험정신은 중세와의 진정한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중세 말기에 이르러, 시민과 상인들로 구성된 도시가 발전하고 길드가 조직되었고 서로 다른 유파들이 생겨났다. 
15세기 피렌체의 화가나 조각가들은 새로운 고안을 오랜된 전통에 맞도록 조화시켜야만 하는 그런 처지에 놓일 때가 많았다. 새로운 것과 낡은 것, 고딕 전통과 근대적인 양식 사이의 절충은 15세기 중엽의 많은 거장들의 특징이었다. 
로렌초 기베르티 Lorenzo Ghiberti, 프라 안젤리코 Fra Angelico, 파올로 우첼로 Paolo Ucello, 베노초 고촐리 Benozzo Gozzoli, 안드레아 만테나 Andrea Mantegna,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Piero della Francesca, 안토니오 폴라이우올로 Antonio Pollaiuolo, 산드로 보티첼리 Sandro Botticelli 

15세기 북유럽 : 북유럽과 이탈리아의 차이점을 가장 분명하게 보이는 분야는 건축이었다. 이들 나라에서는 15세기 내내 전 세기의 고딕 양식을 계속 발전시켜 갔다. 15세기 중엽 독일에서는 미래의 미술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미술 뿐 아니라 인쇄술의 발명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친 목판화술이 발명되었다. 그리고 뒤이어 세부 묘사를 훨씬 풍부하게 할 수 있는 동판화가 개발되었다. 마르틴 숀가우어 Martin Schongauer. 목판술과 동판술은 순식간에 전 유럽에 전파되었다. 인쇄술의 발명이 사상의 교환을 재촉하여 종교 개혁이 일어났듯이 그림의 인쇄는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의 승리를 보장해주었다. 그것은 북유럽의 중세 미술에 종지부를 찍게 만든 여러 가지 원동력 중의 하나였으며 오직 위대한 거장들만이 극복할 수 있을 미술의 위기를 이들 나라에 초래하게 만든 요인 중의 하나였다. 

16세기 초 (토스카나와 로마) : 건물을 아름답게 만들고 영원히 남을 훌륭한 작품을 창조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미술가를 확보하고자 경쟁을 벌였던 이들 도시가 가졌던 자부심은 거장들로 하여금 소러 남보다 뛰어나고자 노력하게끔 자극을 주었다. 이탈리아에서는 미술가들이 원근법의 법칙을 연구하기 위해 수학으로 관심을 돌리고 인체 구조를 탐구하기 위해 해부학에 관심을 갖는 위대한 발견의 시대가 도래했다. 그리고 야심을 가진 앞서가는 예술가들은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에 불만을 느꼈다. 르네상스 건축가가 진정으로 열망했던 것은 건물의 쓰임새와 상관 없이 비례의 아름다움과 내부의 공간성 및 그 조화 자체가 만들어내는 장대함만을 위해 건물을 설계하는 것이었다. 도나토 브라만테 Donato Bramante, 레오나르도 다 빈치 Leonardo da Vinci 그는 미술가의 임무는 눈에 보이는 세계를 탐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문제에 부딪치게 되면 권위자들에게 의지하지 않고 언제나 실험으로 해결하였다. 스푸마토(윤곽을 확실하게 그리지 않고 형태를 마치 그림자 속으로 사라지는 것 같이 희미하게 남겨두어 무엇인가 상상할 여지를 남겨놓는 기법)를 개발했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Michelangelo Buonarroti 인체의 신비를 풀기 위해 한 평생을 노력했고, 그가 조각한 인체들은 제아무리 격렬하게 몸을 뒤틀고 돌리고 있다 해도 전체적인 윤곽은 언제나 확고하고 단순하고 안정되어 있다. 라파엘로 산티 Raffaello Santi 미켈란젤로가 인체의 묘사에 있어서 최고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인정되듯이, 라파엘로는 이전 세대의 화가들이 이룩하려고 그처럼 노력했던 것, 즉 자유롭게 움직이는 인물들을 완벽하고 조화롭게 구성해낸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16세기 초 (베네치아와 북부 이탈리아) : 야코포 산소비노 Jacopo Sansovino 산 마르코 성당의 도서관 건축. 조반니 벨리니 Giovanni Bellini 부드럽고 다채로운 색채가 강렬하게 눈에 띈다. 조르조네 Giorgione 사물과 인물을 공간 속에 배치한 것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을 도시나 다리들과 더불어 하나로 생각했다. 티치아노 Tiziano 뛰어난 소묘 솜씨, 전통적인 구도의 파괴, 색채에 의한 통일성. 안토니오 알레그리 Antonio Allegri 후대의 여러 유파의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완전히 새로운 명암법을 만들었다. 

16세기 후반 : 16세기 초반에 회화가 완성의 극에 달해 이 시대 사람들은 앞선 미술가들의 수법만을 모방했다(매너리즘의 시대). 한스 홀바인 Hans Holbein 꾸미지 않은 충실하고 완벽한 구도의 초상화. 네델란드에서는 풍속화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 

17세기 : 바로크 양식. 미술에 대한 논쟁이 처음 생겨남. 안니발레 카라치 Annibale Carracci 매너리즘 화가들이 의도적으로 거부했던 라파엘로의 단순성과 아름다움을 다시 회복하고자 함. 미켈란젤로 다 카라바조 Michelangelo da Caravaggio 그가 원하는 것은 진실, 즉 그가 본 그대로의 진실이었다. 그는 고전적인 규범을 좋아하지 않았고 또 '이상적인 아름다움'이라는 것도 신통치 않게 생각했다. 그는 인습을 타파하고 미술에 대해 아주 새롭게 생각하고 싶어했다. 그는 쏟아지는 비난을 받은 최초의 화가였다. 사람들은 그를 자연주의자라고 비난했다. 클로드 로랭 Claude Lorrain 자연의 숭고한 아름다움에 처음으로 사람들의 눈을 뜨게 만든 화가. 페터 파울 루벤스 Peter Paul Rubens 수많은 화가들을 거느리고 자유자재로 그림을 그렸는데, 역동성, 강한 색감, 관능미를 추구했다. 안토니 반 다이크 Anthony van Dyck, 디에고 벨라스케스 Diego Velazquez, 프란스 할스 Frans Hals. 중세나 르네상스 시대에는 주문을 받아 그림을 그렸는데 17세기의 초상화가들은 그림을 먼저 그려놓고 구매자를 찾아나서야 했다. 이름이 나지 않은 군소 화가가 명성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회화의 특수한 분야, 즉 특수한 장르의 그림을 전문적으로 그리는 것이었다. 렘프란트 반 레인 Rembrandt van Rijn 유럽 미술사에서 가장 위대한 화가이자 판화가 중 한 사람. 자서전과 같은 일련의 자화상을 그림. 

17세기 말과 18세기 초 : 로코코. 바로크 시대의 호방한 취향을 이어받아 들뜬 경박함 속에 표현되는 화려한 색채와 섬세한 장식의 유행. 

18세기 (영국과 프랑스) : 영국에서는 미술이 신처럼 군림한 통치자들의 권력과 영광을 과시하기 위해 이용되지 않았다. 귀족풍의 몽상적인 세계가 퇴조하고, 당대의 보통 사람들에게 눈을 돌리고 이야기르 엮어낼 수 있는 감동적이거나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그리기 시작했다. 장 밥티스트 시메옹 샤르댕. 

18세기 말과 19세기 초 (영국, 미국, 프랑스) : 프랑스 혁명은 이성의 시대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으며 미술에 대한 관념이 변화한 것도 이 시기부터였다. 16세기 이탈리아의 미술가들은 자기들이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학자들과 맞먹는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그들이 모이는 장소를 처음으로 아카데미라 불렀다. 이러한 아카데미가 점차 학생들에게 미술을 가르치는 기능을 맡게 된 것은 18세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이루어졌다. 따라서 과거의 위대한 화가들이 안료를 갖고 윗 사람들을 도와주면서 직업적인 기술을 전수받았던 구식의 방법들은 쇠퇴하고 말았다. 미술이 번창하기 위해서는 왕립 기관에서 미술을 가르치는 것보다 그 시대 미술가들의 그림과 조각을 기꺼이 사려고 하는 구매자들이 많아야 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아카데미에서는 옛 거장들의 위대함을 강조하는 데 역점을 두었는데 바로 이 사실이 후원자들로 하여금 당시 생존해 있는 화가들에게 그림을 의뢰하기보다 거장의 작품을 사게끔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아카데미는 파리에서 처음으로, 그 후 런던에서도 회원들의 작품을 매년 전시하기로 계획하였다. 이것은 실로 엄청나고 획기적인 변화였다. 미술가들은 이제 전시회에서 성공하기 위한 작품을 만들지 않으면 안되었다. 위기가 불러일으킨 영향은 미술가들이 도처에서 새로운 종류의 주제를 찾아냈다는 것이다. 이제 미술가들은 지금까지 오직 시인들만이 누렸던 개인적 환상의 세계를 종이 위에 펼쳐 놓는 자유를 얻게 되었다. 자크 루이 다비드 Jacques Louis David, 프란시스코 고야 Francisco Goya, 윌리엄 블레이크 William Blake 

19세기 : 화가의 선택권이 확대되면 확대될수록 화가 자신의 취향과 대중 취향 간의 간극은 점차 벌어져갔다. 19세기 들어 처음으로, 미술은 미술가의 개성 표현의 완벽한 수단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과거에는 기량이 뛰어나고 가장 중요한 작품의 주문 제작을 받아서 유명해진 미술가들이 그 시대의 지도적인 대가들이었으나, 19세기 들어서는 죽은 뒤 진가를 인정받은 '이단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9세기의 미술사는 용기를 잃지 않고 끊임없이 스스로 탐구하여 기존의 인습을 비판적으로 대담하게 검토하고 새로운 미술의 가능성을 창조해 낸 외로운 미술가들의 역사다. 장-오귀스트-도미니크 앵그르 Jean-Auguste-Dominique Ingres, 외젠 들라크루아 Eugene Delacroix
주제에 관한 인습이 타파되었다. 고상하고 권위를 가진 것들이 회화의 주제였으나 일상적인 삶, 평민들의 모습이 주제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장 프랑수아 밀레 Jean-Francois Millet, 귀스타브 쿠르베 Gustave Courbet
알고 있는 것을 그리는 것에서 보이는 대로 그리는 사조가 생겨났다. 이를 인상주의라 부르는데, 화가가 목격했고 그 순간 보았던 사실을 보증할 수 있는 만큼만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아카데미 파 화가들이 낙선시킨 작품들을 따로 모아 낙선전이라는 특별전시회를 열었다. 에두아르 마네 Edouard Manet, 클로드 모네 Claude Monet,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Pierre Auguste Renoir, 카미유 피사로 Camille Pissarro. 인상주의 그림을 감상할 때 몇 걸음쯤 뒤로 물러나서 보면 이러한 혼란스러운 색점들이 갑자기 우리의 눈 앞에서 제자리를 차지하고 생기를 띠게 되는 기적과 같은 기쁨을 맛보게 된다는 사실을 대중들이 알기까지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이러한 기적을 성취하고 화가가 실제로 겪었던 시각적 경험을 관객에게 전달해주는 것이 인상주의자들의 진정한 목표였다. 
19세기의 이런 변화들을 이끌어 준 두 동력자가 있었으니, 하나는 사진술이었고, 다른 하나는 일본의 채색 목판화였다. 
에드가 드가 Edgar Degas, 오귀스트 로댕 Augeste Rodin,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 James Abbott McNeil Whistler. 

19세기 후반 : 폴 세잔 Paul Cezanne, 빈센트 반 고흐 Vincent van Gogh, 폴 고갱 Paul Gauguin. 
세잔은 원색을 써서 표현하면서도 현실감을 잃지 않는 화풍을 만들어냈다. 형태와 색채 사이의 관계를 탐구하고자 했고 자신의 특수한 실험에 필요할 때에만 '정확한 원근법'을 포기했다. 균형과 질서의 감각을 추구했다. 
고흐의 작품은 그의 심리 상태를 표현한다. 그는 자신이 그린 사물들에 해해 스스로 느꼈던 감정을 다른 사람도 느낄 수 있도록 전달하기 위해 색채와 형태를 사용했으며 그가 '입체경적 현실감'이라고 한 것, 말하자면 자연을 사진처럼 정확하게 그리는 것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는 정열을 추구했다. 
고갱은 강렬하고 예리한 감성과 그것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법을 추구했다. 그는 자신이 '야만인'이라고 불리는 것을 자랑스러워 했다. 그는 보다 솔직한 어떤 것을 열망했고 그것을 원시인들 속에서 발견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이 세 사람의 화가가 모색했던 제각각의 해답은 세 가지 현대 미술 운동의 이념적 바탕이 되었다. 세잔의 해결방법은 결국 프랑스에 기원을 둔 입체주의(cubism)을 일으켰고, 반 고흐의 방법은 독일 중심의 표현주의(Expressionism)을 일으켰다. 고갱의 해결 방법은 다양한 형태의 '프리미티비즘(primitivism)'을 이끌어냈다. 

20세기 : 20세기에 들어 건축은 예술에 속한다는 관념에서 벗어나 그 목적에 비추어 새롭게 보자는 운동이 일어났다. 이른바 '유기적 건축(Organic Architecture)'. 건축물이 거주하는 사람의 요구와 지방의 특색에 따라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발생하고 성장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장식과 기교는 사라지고 실용성이 중요시되었다. 독일 바우하우스(Bauhaus)의 기본 이념은 '기능주의(functionalism)'이다. 이러한 양식으로 지어진 최고의 걸작은 그것이 기능에 맞게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기능이라는 목적을 충조시키면서도 그것을 '보기좋게' 만들 수 있는 기술과 취향을 지닌 사람들에 의해 설계되었기 때문에 아름답다. 
에드바르드 뭉크 Edvard Munch, 케테 콜비츠 Kathe Kollwitz, 에른스트 바를라흐 Ernst Barlach, 오스카 코코슈카 Oskar Kokoschka. 
바실리 칸딘스키 Wassily Kandinsky. 색채로 표현된 음악을 최초로 시도. 추상미술의 시작. 
지나치게 세련된 미술의 치밀함을 버리고 솔직하고 단도직입적으로 형태와 색채를 다루고, 섬세한 묘사를 거부하고 강렬한 색채와 대담하고 '야만적'인 조화를 추구했던 화가들을 레 포브 Les Fauves, 즉 '야수' 또는 '야만'이라고 불렀다. 앙리 마티스 Henri Matisse, 파블로 피카소 Pablo Picasso 
파울 클레 Paul Klee, 라이오넬 파이닝어 Lyonel Feininger, 콘스탄틴 브랑쿠시 Constantin Brancusi
피에트 몬드리안 Piet Mondrian, 벤 니콜슨 Ben Nichols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