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dGen's story
(2018-30) 삶은 왜 짐이 되었는가 [인문학-철학] 본문
삶은 왜 짐이 되었는가
박찬국 저, 21세기 북스, 264쪽.
박찬국 교수님의 하이데거 강의록.
박찬국 교수님은 나같은 철알못도 쉽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정말 쉽게 강의를 해주신다.
이래서 박찬국 교수님의 팬이 될 수 밖에 없다.
1. 현대사회에서 인간은 모든 것들을 에너지원으로만 바라본다. 강은 수력에너지, 파도는 조력에너지, 바람은 풍력에너지, 심지어 인간마저도 인적자원(에너지)으로 여긴다.
현대는 국경과 문화를 넘어 모든 인간과 사물을 계산 가능하고 변환 가능한 에너지로 환원시켜나가는 어떤 익명의 힘이 지배하고 있다. 이 익명의 힘을 '지배에의 의지'라고 부르는데, 이는 인간을 둘러싼 자연 전체를 효율적으로 지배할 수 있는 에너지원으로 변환시키고 남용하려는 광기 어린 의지이다. '지배에의 의지'를 '의지에의 의지'라고도 부르는데 '지배에의 의지'는 자신을 맹목적으로 강화하고 증대하는 것 외의 다른 목적을 전혀 갖지 않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은 자신들이 이러한 '의지에의 의지'의 소유자이자 주체라고 여기지만, 하이데거는 오히려 현대인들은 '의지에의 의지'에 사로잡혀 있고 그것에 의해 끊임없이 내몰리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자신의 탐욕의 주체라고 생각하고 이러한 탐욕을 언제든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우리는 탐욕의 노예이다.
하이데거는 스탈린이나 히틀러 같은 이른바 지도자들을 전쟁의 주체로 여기지 않고, 그들 역시 자신들이 통제하지 못하는 '지배에의 의지'의 하수인이라고 보았다. 모든 것을 에너지원으로 전락시키는 탐욕스러운 광기는 자본주의 체제든 사회주의 체제든 아니면 파시스트 체제든 이 시대의 모든 사회체제를 근저에서 규정하는 근본적인 힘이다. 그것들은 에너지를 최대한 발휘하도록 조직하는 방식들 간의 차이만 있을 뿐 개개인을 에너지원으로 보는 시각은 똑같다.
하이데거는 현대기술문명에서 전쟁 상태와 평화 상태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고 본다. 무력에 의한 전쟁은 아니라도 경제 전쟁이 일어나고 있고, 각국이 그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자연과 인간의 에너지를 최대한 뽑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2. 하이데거는 과학과 기술이 도구를 넘어서 현대인들의 종교가 되었다고 본다. 중세에 신관에 의해 세계를 해석하고 받아들였던 것처럼, 현대는 과학과 기술에 의해 세계를 해석하고 이해한다. 신만이 진리를 드러내고 신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는 과학만이 진리를 드러내고 과학을 응용한 기술만이 인간의 삶을 안전한 토대 위에 올려놓을 수 있다고 믿는다.
특정 종교에 대한 믿음은 이성적인 논리와 설득으로 극복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가 과학기술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 그것에 대한 자유로운 관계를 회복하려면 일종의 종교적 회심이 필요하다. 인간을 비롯한 살아 있는 생명들보다는 정교하고 깔끔한 인공물에 더 의지하고 그것들을 더 좋아하는 성향을 에리히 프롬은 '네크로필리아'라고 일컬었다.
하이데거는 인간은 노동하는 동물이 되어버렸고 노동의 대가로 갖가지 향락 물자를 제공받으며 그것에 탐닉하는 존재가 되어버렸다고 말한다. 이 시대의 위기를 극복하려면 무엇보다도 이 시대가 위기의 시대임을 깨달아야 한다. 하지만 하이데거는 이 시대의 위기를 사람들이 깨닫지도 느끼지도 못한다는 것 자체가 바로 오늘날의 위기가 갖는 심각성이라고 보았다. 이를 '위기 상실의 위기'라고 부른다.
과학과 기술이 인간을 비롯한 모든 존재자를 한갓 에너지원으로 남용하는 이 시대의 위기를 극복하려면 과학과 기술이 전제하고 있는 세계이해와는 전적으로 다른 세계이해가 필요하다.
3. 존재자에게서 존재가 빠져 달아나버렸다. 인간과 자연, 그리고 모든 사물에게서 그들이 가진 고유하고 성스러운 성격, 성스러움이 사라져 버렸다. 우리가 존재자를 에너지원으로 간주할 때 존재자가 갖는 성스러운 성격은 은폐된다. 존재자를 성스러운 것으로 경험할 때 우리는 '존재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해 경이로움을 느낄 수 있다. 하이데거는 우리가 비교의식에 사로 잡혀 늘 열등감이나 우월감을 느끼고 일상적으로 격차에 대한 우려에 사로잡혀 있다고 말한다. 이렇게 비교의식이 일상을 지배함에 따라 타인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자신의 권태를 메우는 수단이 되거나 다른 사람의 흠을 들추어 그들보다 자신이 우월하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한 호기심이 되기 쉽다. 또한 타인에 대해 우리가 하는 말 역시, 그 사람에 대한 아무런 애정이나 진실성이 깃들어 있지 않은 잡담이 되곤 한다. 이렇게 호기심에 사로잡힌 상태에서는 그 어느 것에도 깊은 애정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도처에 있으면서도 아무 데도 없고, 그 어디에도 깊이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모든 것을 항상 피상적으로 스쳐 지나간다. 이렇게 호기심에 사로잡힌 삶은 '고향을 상실한 무정주성無定住性'의 성격을 갖는다. 호기심과 잡담에는 우리가 존중해야 할, 어떠한 비밀스럽고 신비로운 차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들은 나름의 흥분과 긴장을 제공하기 때문에 우리는 잡담과 호기심을 통해 자신이 진정으로 생생한 인생을 살고 있다고 착각하게 된다.
우리가 때떄로 호기심과 잡담에서 벗어나 호젓한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이제껏 평범하게 느껴졌던 것들이 갑자기 경이롭게 느껴질 때가 있다. 우리가 경이를 느낄 때 그것들은 신비로운 빛을 발하고 이러한 빛을 감지하면 우리는 그것이 '존재한다'고 말하게 된다. 존재자들이 갖는 이러한 고유한 존재를 경험하는 것을 '존재 경험'이라고 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인간은 근본적으로 자신들이 관계하는 존재자들의 고유하고 성스러운 존재를 경험할 경우에만 자신의 삶을 충일한 것으로 느낄 수 있다.
4. 대부분의 기분은 특정 사정에서 비롯되고, 그 사정의 변화와 함께 사라지는 변덕스러운 성격을 갖고 있는 반면, 특정 사건과는 상관없이 세계 전체를 그 이전과를 완전히 다르게 개시開示하는 기분이 있는데 이를 '근본기분'이라고 한다. 근본기분에는 불안, 경악, 그리고 경이 같은 것들이 있다. '경이'라는 근본기분 속에서 우리는 세상에서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광채를 보게 된다. 이러한 광채를 '존재의 빛'이라고 한다. 이러한 존재는 어떤 구체적인 의미가 결여된 공허하고 추상적인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규정할 수 없는 무한한 의미로 충만한 존재다. 하이데거는 경이와 같은 근본기분을 통해서 우리를 엄습해오는 인간과 세계의 진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을 '경건한 사유'라고 일컫는다. 또 그는 인간과 세계 전체의 진리를 '존재의 진리'라고 부른다. 이러한 존재의 진리는 우리를 호기심이나 잡담에서 벗어나 침묵 속에 빠져들게 하면서 자신의 '고요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한다. 세계와 사물을 경이라는 근본기분 속에서 경험하라는 하이데거의 말은 일종의 종교적 회심을 촉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5. 인간이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사물이 자신의 고유한 존재를 드러내도록 돕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하이데거는 인간을 '현-존재'라고 부른다. 인간은 사물들의 고유한 존재가 자신을 드러내는 장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일상적인 삶은 항상 타인과의 비교의식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사람들은 자신을 생각과 행위의 주체로 생각하지만, 하이데거는 여기에 의문을 던진다. 우리가 타인과 자신을 비교할 때 그 척도가 되는 것은 부나 명예와 같이 사회가 우리에게 주입한 가치들이다. 이러한 가치들은 우리 자신이 주체적으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어릴 적부터 사회를 대신하여 가정이나 학교가 우리에게 주입해온 것들이다. 하이데거는 비교의식이 지배하는 삶에서 우리는 자기 삶의 주체로 사는 것이 아니라, '익명의 타인들'에게 예속된 채 그들의 자의와 변덕에 따라 휘둘리고 있다고 얘기한다. 일상적인 삶의 자아란 사실은 '세상 사람das Man으로서의 자기'이다. 우리는 '세상 사람'으로서의 삶에서 벗어나야 한다. 왜냐하면 아무리 바르게 살려고 해도 이러한 삶은 비교의식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과는 다르게 장미는 사람들의 시선에 개의치 않고 그저 호젓하게 피어있다. 어떻게 하면 비교의식에서 벗어나 장미처럼 존재한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 기쁘게 살수 있을까? '경이'라는 기분 속에서 세계와 사물의 신비를 경험할 때 가능하다. 이 때 우리는 모든 비교가 만들어내는 마음의 시끄러움에서 벗어나 고요한 평정을 되찾을 수 있다.
6. 인간은 자신의 존재에 있어서 자신의 존재를 문제 삼는다. 인간의 이러한 독특한 존재 성격을 '실존實尊'이라고 한다. 이반 일리치는 죽음을 대면하기 전까지 자신의 고유한 삶을 살지 못하고 세상이 시키는 대로 살았다. 이런 삶의 방식을 '비본래적' 실존이라고 부른다. 이 경우 삶의 주체는 나 자신이 아니라 사실은 익명의 '세상 사람'이다. 이러한 삶의 방식에서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자를 우리가 추구하는 목적에 적합한 도구인지 아닌지로 판단한다.
죽음을 통해 '불안'이라는 근본기분 속에서 그간 세상이 시키는 것을 좇았던 사람은 허무함을 느끼게 된다. 죽음에 대한 불안에 엄습될 때 죽음은 우선 우리를 위협하는 낯선 힘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우리는 자신의 존재를 죽음에 직면해 있는 낯선 것으로 경험하게 된다. 그런데 이는 '세상 사람'이 제시하는 세간적인 가치에 대한 집착에서 우리가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명한 것으로 여겨왔던 일상적인 세계가 불안이라는 기분 안에서 붕괴되면 '세상 사람'이 제시하는 가치와 나의 존재, 그리고 이 세계가 허망하게 느껴진다. 우리는 죽음에 대한 불안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세상이 제시한 삶의 방식에 더욱 몰두하게 된다. 하지만 죽음에 대한 불안에서 도피하지 않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인수引受할 때, 즉 지금까지의 삶이 기만적이었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세간적 가치들에 대한 집착과 자기중심적인 자아에서 완전히 벗어났을 때 비로소 우리는 세계를 경이로운 것으로 경험할 수 있다.
불안이 우리를 본래적인 실존의 문턱으로 이끄는 기분이라면, 불안을 적극적으로 인수하며 죽음에로 선구하는 것은 '본래적인 실존에로 비약하는 것'을 의미한다. 불안이라는 기분이 기쁨에 찬 경이라는 기분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경이 안에서 모든 존재자의 고유한 존재가 자신을 드러내는 근원적인 세계가 열리는데 이를 하이데거는 존재의 '열린 터Lichtung'라고 부른다.
하이데거는 죽음이라는 무의 심연에서 도피하여 기만적이고 세간적인 가치들에서 삶의 안전을 도모하려는 경향을 '퇴락'이라고 부르며, 우리가 빠져드는 그 가치들을 '우상'이라고 말한다. 우상에 대한 숭배, 그리고 우상이 제공하는 사이비 위로에서 벗어나려면 죽음에 대한 불안의 소용돌이에 자신을 내맡겨야 한다. 하이데거는 죽음에 대한 불안을 통해 우리가 존재자들의 신비스러운 충만한 존재를 경험할 것을 촉구한다. 이러한 존재의 신비를 경험하는 것만이 현대의 기술문명이 초래한 위기에서 우리가 벗어날 수 있는 길이라고 본다.
7. 모든 인간은 고독감, 무력감, 허무감을 느낀다. 삶에 대한 우리의 고뇌는 우리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느끼고 있는 고독감과 무력감 그리고 허무감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에 대한 고뇌이다. 고독감과 무력감 그리고 허무감을 극복하려는 인간의 행위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 무력감을 극복하기 위해서 약자를 괴롭히거나 타자를 정복하거나 갑질을 하는 형태로 자신의 힘을 느끼는 사람이 있는 반면, 무력한 사람을 돕고 다른 사람과 공감하면서 자신이 고양되는 느낌을 받으며 무력감을 극복하는 사람이 있다.
8. 세계와 사물 사이의 내밀한 관계로서의 존재는 우리가 세계와 사물을 지배하려는 의지에서 완전히 벗어날 때 자기를 드러낸다. 존재가 이렇게 스스로를 드러내는 상태를 "존재가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다"고 한다. 시는 항상 어떤 근본기분에 입각해 있고 그러한 근본기분으로부터 발한다. 따라서 시를 이해한다는 것은 단순히 그 시를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지배하는 근본기분에 사로잡히면서 그 시에서 발해지는 존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훌륭한 시는 우리를 어떤 근본기본으로 끌어들이는 강력한 힘이 있으며, 이를 통해 독자로 하여금 세계와 사물을 그전과는 완전히 달리 보게 한다.
하이데거는 존재를 인간에게 말을 걸어오는 정적의 소리로 본다. 존재는 인간에게 말을 걸어오면서 세계와 사물을 근원적으로 드러낸다. 그리고 인간은 존재의 이러한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을 자신의 언어속에 깃들게 함으로써만 참된 인간으로 존재한다. 존재와 인간 사이의 이러한 내밀한 관계 속에서 존재는 비로소 존재로서, 그리고 인간은 비로소 참된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있다.
우리가 마침내 존재자들과 세계에 대한 지배 의지를 완전히 버릴 때, 존재자들에게서 빠져나갔던 고유한 존재는 다시 존재자들에게 깃들고 근원적인 세계도 다시 열리게 된다. 존재자들의 지배자가 아닌 존재의 파수꾼이 되라.
9, 하이데거는 사람들이 소유와 향락에 대한 욕망 때문에 소박한 자연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데서 현대문명의 불행이 비롯되었다고 생각했다
[ 인간은 자연 속을 조용히 걷는다. 경건한 마음으로 그루터기를 태우고 나무들 속에서 예배하자. 그러나 그 사이에도 기독교도들인 파괴자들이 집회소와 마구간을 많이 만들고, 난로에 땔 장작을 얻으려고 숲의 사원을 황폐하게 만든다. (…) 이 호수들은 너무 순수하기 때문에 그 가치를 측정할 수 없다. 이들에겐 더러운 것이라고는 전혀 없다. 이 호수들은 우리의 인생보다 얼마나 더 아름다우며 우리의 인격보다 얼마나 더 투명한가! (…)자연은 도시에서 멀리 떨어져 홀로 활짝 피어난다. 자연을 놓아두고 천국을 이야기하다니! 그것은 지구를 모독하는 짓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 자연을 들여다보는 자연이 되고 싶다. ] - H.D.Thoreau
하이데거와 소로는 사물들은 일차적으로 과학적인 측정이 가능한 대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으로 본다. 이들은 현재 인류가 마주하고 있는 생태 위기는 인류가 사물들이 걸어오는 말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고 그것들을 한갓 실험과 조작의 대상으로만 보고 있다는 데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하이데거와 소로는 세계와 사물이 우리에게 하는 말을 들을 수 있는 감응력의 회복을 주창한다.
하이데거가 기술문명을 비판한다고 해서 기술문명 자체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는 오늘날 우리의 삶에서 무엇이 주가 되고 무엇이 종이 되어야 하는지를 분명히 하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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