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dGen's story
[Book] 불안 본문
2015 - 19
동헌이와의 5월의 책.
인데 너무 늦게 읽었다. 벌써 6월 중순으로 넘어가기 직전이라.
5월은 무진장 일이 많고 바쁜 나날들이었는데,
이제 한 숨 고르고, 주위를 정돈하고, 본래의 페이스를 찾아야겠다.
Botton은 불안을 지위의 불안정에서 온다고 보았다.
그래서 다섯 가지의 원인과 다섯 가지의 해법을 제시했다.
불안의 원인.
1. 사랑결핍
다른 사람이 우리를 바라보는 방식이 우리가 스스로를 바라보는 방식을 결정하게 된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느낌은 함께 사는 사람들의 판단에 좌우된다.
2. 속물근성
속물이란 노골적으로 사회적 또는 문화적 편견을 드러내는 사람을 말한다.
속물의 특징은 단순히 차별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직위와 인간의 가치를 똑같이 본다는 것이다.
속물의 일차적 관심은 권력이며, 권력 구조의 변화에 따라 자연스럽게 그리고 순식간에 속물의 존경 대항도 바뀐다.
자신의 자리에 확신을 가지는 사람은 남들을 경시하는 것을 소일거리로 삼지 않는다. 오만 뒤에는 공포가 숨어있다.
눈에 두드러지는 집단의 속물근성은 모든 사람을 사회적 야심의 방향으로 유도할 수도 있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그런 야심을 못마땅해하다가도, 어느새 그것이 사랑과 인정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하게 확실한 수단인 양 쫓아다니게 된다. 무시와 외면은 속물적인 세상이 중요한 상징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에게 내리는 감정적 형벌이다.
3. 기대
실제적 궁핍은 급격하게 줄어들었지만, 역설적이게도 궁핍감과 궁핍에 대한 공포는 사라지지 않았고 외려 늘어났다. 어떤 것-예를 들어 부나 존중-의 적절한 수준은 결코 독립적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준거집단, 즉 우리와 같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조건과 우리의 조건을 비교하여 결정된다. 오직 우리가 함께 자라고, 함께 일하고, 친구로 사귀고, 공적인 영역에서 동일시하는 사람들만큼 가졌을 때, 또는 그보다 약간 더 가졌을 때만 우리는 운이 좋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동등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우리보다 나은 모습을 보일 때 받는 느낌이야말로 불안과 울화의 원천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같다고 느끼는 사람들만 질투한다. 우리의 준거집단에 속한 사람들만 선망한다는 것이다.
가장 견디기 힘든 성공은 가까운 친구들의 성공이다.
"질투심을 일으키는 것은 우리와 다른 사람들 사이의 커다란 불균형이 아니라 오히려 근접 상태다." - 데이비드 흄
중세를 포함한 그 이전세대의 체제는 여러 가지 면에서 정의롭지 못한 부분들이 있었지만, 가장 밑바닥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에게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자유를 주었다. 사회의 많은 사람들의 성취를 비교 기준으로 삼을 필요가 없는 자유였다. 덕분에 그들은 열등감에 시달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
내세에 대한 믿음이 과학적으로 성립할 수 없는 유치한 아편에 불과하다고 해석해 버린다면, 성공하고 자신을 실현하고자 하는 압박은 더욱 강해질 수 밖에 없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기회는 단 한 번이고, 그것도 무시무시할 정도로 짧은 시간 내에 이루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 지상의 성취는 다른 세계에서 실현해야 하는 일의 서곡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것의 총합이 된다.
매스미디어의 발전도 기대를 높이는 데 기여를 했다. 새로운 미디어는 그 내용만이 아니라, 거기에 덧붙여진 광고를 통해 청중의 마음에 갈망을 심었다.
루소의 《인간 불편등 기원론》에 의하면, 부는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과는 관련이 없었다. 부란 우리가 갈망하는 것을 소유하는 것이다. 부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부는 욕망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인 것이다. 우리가 얻을 수 없는 뭔가를 가지려 할 때마다 우리는 가진 재산에 관계없이 가난해진다. 우리가 가진 것에 만족할 때마다 우리는 실제로 소유한 것이 아무리 적더라도 부자가 될 수 있다.
발전한 사회는 역사적으로 볼 때 전보다 높아진 소득을 제공하기 때문에 우리를 더 부유하게 해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결과를 놓고 볼 때 우리를 더 궁핍하게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무제한의 기대를 갖게 하여 우리가 원하는 것과 얻을 수 있는 것, 우리의 현재의 모습과 달라졌을 수도 있는 모습 사이에 늘 간격이 유지되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에서 우리는 원시의 야만인보다 더 심한 궁핍을 느낄 수도 있다.
우리는 적은 것을 기대하면 적은 것으로 행복할 수도 있다. 반면 모든 것을 기대하도록 학습을 받으면 많은 것을 가지고도 비참할 수 있다.
4. 능력주의
과거에는 낮은 지위의 사람들에게 기운을 북돋을 메세지가 존재했다.
첫째, 그들이 사회에서 부가가치를 창조하는 사람들이고, 그로 인해 존중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
둘째, 세상의 지위는 신이 보기에 아무런 도덕적 가치가 없다는 것,
셋째, 부자는 파렴치하며 정당한 혁명이 일어나면 서글픈 종말을 맞이할 수 밖에 없다는 것.
새로운 성공 이야기는 낮은 지위의 사람들에게 불안을 일으키게 되었다.
첫째, 빈자가 아니라 부자가 쓸모있는 존재들이다. 부를 창조하는 사람들은 빈자가 아닌 부자들이다.
둘째, 지위에는 도덕적 의미가 있다. 높은 지위는 그들의 성실함과 능력의 산물이다.
셋째, 빈자들을 죄가 많고 부패했으며 어리석음 때문에 가난한 것이다.
5. 불확실성
사회가 요구하는 재능은 시시각각 바뀌며, 적당한 시기에 적당한 기술을 갖추고 적당한 일자리에서 일을 하게 되는 것은 상당한 운을 필요로 한다. 또한 조직의 피라미드를 성공적으로 기어 올라가는 당반가는 자신이 맡은 일에서 최고라기보다는, 문명화된 삶에서는 지침을 얻기 힘든 여러 가지 음침한 정치적 기술에 가장 숙달된 사람이다. 본인이 아무리 성실하게 일을 해도 자신을 고용하고 있는 회사가 파산하게 되거나 고용주가 이윤 개선을 이유로 정리해고를 한다던가 세계경제가 불황을 맞는다던가 하는 것등의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우리를 더욱 불안케한다.
불안의 해법.
1. 철학
인간은 타인의 평가에 의해 자신을 평가하기 쉽지만, 철학이라는 도구를 이용해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고 우리 자신에 대해 재평가 할 수 있다. 철학에 의해 우리 자신과 사회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면 우리는 그 대가로 외로움을 얻을 수 있다.
2. 예술
예술가들은 사회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기준들 이외의 다른 지위에 대한 기준을 제시한다. 그리고 능력주의에 대해서도 다른 평가기준을 제시한다. 희극과 비극을 통해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도 그 주인공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능력과 필연으로 결과가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유머를 통해 권력과 명예,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비판하기도 한다.
3. 정치
소스타인 베블런의 《유한계급론》에 따르면, 물자를 아주 많이 소유하는 것은 이 물자가 쾌락을 제공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물론 그럴수도 있지만) 명예를 제공하기 때문에 필수적인 일이 된다. 필수품이라고 할 때는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상품만이 아니라, 나라의 관습에 따라 아무리 계급이 낮다 해도 평판이 좋은 사람으로서 그것이 없으면 품위를 지킬 수 없다고 여기는 모든 것을 가리킨다.
돈을 버는 것은 실제로 종종 인격적인 미덕을 요구한다. 어떤 일자리든 그것을 유지하려면 지능, 힘, 선견지명, 남들과 협동하는 능력이 요구된다. 사실 소득이 많은 일자리일수록 요구되는 능력도 커진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우연이 능력보다 앞서서, 한참 앞서서 행진하는 것을 자주 목도하게 된다.
루소는 역사가 꼭 진보해왔다고만은 보지 않았다. 그는 우리의 요구를 정확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던 특권적 상태로부터 우리 자신의 인격과는 거의 관련이 없는 생활 방식들에 선망을 느끼는 상태로 퇴보해왔다고 말한다. 루소는 과거의 사람들이 자신을 더 쉽게 이해했으며, 만족스러운 삶의 핵심적인 특징을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고 상상한다. 즉 가족을 사랑하고, 자연을 존중하고, 우주의 아름다움에 경외감을 느끼고, 다른 사람들에게 호기심을 품고, 음악과 소박한 오락을 즐기는 것이 그런 특징이었다.
유럽의 상인은 인디언의 내부에서 욕망을 길러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인디언 역시 심리적 구조가 다른 인간과 다를 것이 없었기 때문에 근대 문명의 시시한 장신구들의 유혹에 굴복했으며, 공동체 생활의 소박한 즐거움과 어스름녘 텅 빈 협곡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는 조용한 목소리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인디언의 삶의 양식을 찬미하는 사람들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인디언들에게 강요가 없었다고 주장한다. 인디언은 자발적으로 소박하고 건전한 생활을 떠났다.
인생은 하나의 불안을 다른 불안으로 대체하고, 하나의 욕망을 다른 욕망으로 대체하는 과정으로 보인다.
우리는 어떤 직업이 주는 매력도 오해하는 경향이 있다. 과정이 아니라 결과만 눈에 보이는 것이다.
우리의 자아상을 진실되고 폭넓게 규정한다면, 물질적 축적은 우리 삶의 방향을 규정하는 여럿 가운데 하나에 불과할 것이다.
존 러스킨은, 친절, 호기심, 감수성, 겸손, 경건, 지성-그는 이런 일군의 특징을 단순하게 "삶"이라고 불렀다-에서 부유해지기를 바랐다. 그래서 그는 《이 최후의 사람에게》에서 부에 대한 일반적인 금전적 관점을 버리고 "삶"에 기초한 관점을 채택하라고 호소했다. 이에 따르면 이 세상에서 부유한 사람은 상인이나 지주가 아니라, 밤에 별 밑에서 강렬한 경이감을 맛보거나 다른 사람의 고통을 해석하고 덜어줄 수 있는 사람이다. 삶, 즉 사랑의 힘, 기쁨의 힘, 감탄의 힘을 모두 포함하는 삶 외에 다른 부는 없다. 고귀하고 행복한 인간을 가장 많이 길러내는 나라가 가장 부유하다. 보통 부유하다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은 사실 그들의 금고 자물쇠만큼이나 부유하지 못하다. 그들은 본질적으로 그리고 영원히 부유할 수가 없다.
사회의 목소리 큰 사람들이 선험적 진리로 여기는 견해들이 사실은 상대적인 것이고 연구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비로소 정치적 의식이 깨어난다. 이데올로기적 진술이란 중립적으로 말하는 척하면서 교묘하게 어떤 편파적인 노선을 밀어붙이는 진술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모든 시대의 지배적 관념은 늘 지배계급의 관념이다." 이데올로기적인 진술의 핵심은 높은 수준의 정치적 감각이 없으면 그 편파성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갓 태어난 정치적 정신은 예의와 전통을 벗어버리고, 거리낌 없이 반대의 입장에 서서, 아이처럼 순수하게 그러나 법정에선 변호사처럼 완강하게 묻는다. "꼭 이래야 하는가?"
관념이나 제도가 "자연스럽다"고 생각할 때는 고통의 책임을 아무에게도 묻지 못하거나 고통을 겪은 당사자에게 묻게 된다. 그러나 정치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가 아니라 관념이 문제일지도 모른다고 상상하게 된다.
정치적 관점이 추구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이데올로기에 대한 이해다. 분석을 통하여 이데올로기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님을 밝혀 그 뇌관을 제거하는 것이다. 정치적 어려움을 이해하는 것은 기후 위성으로 기상 상태의 위기를 파악하는 것과 같다. 그것이 늘 문제를 막아주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거기에 접근하는 최선의 방법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유용한 것을 가르쳐준다.
4. 기독교
기독교라고 표현했지만 사실 내세와 대자연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맞을 듯 하다.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면, 우리가 원하는 본질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
당장 1-2년 후에 내가 죽음을 맞게 되어도 내가 지위의 상승을 위해 악착같이 노력하고 있을까?
근시안적으로 보면 사람 사이의 차가 커 보여도, 대자연 앞에 선 우리는 한없이 작아 보이고, 그 차이는 실로 미미하다.
자신이 하찮은 존재라는 생각 때문에 느끼는 불안의 좋은 치유책은 세계의 거대한 공간을 여행하는-실제로 또는 예술작품을 통하여- 것일 수도 있다.
기독교는 신의 사랑의 범위 바깥에 있는 인간은 없다고 주장하면서, 상호 존중이라는 관념에 신의 권위를 부여한다.
우리의 약점에는 늘 두 가지 요소가 있다. 공포와 사랑에 대한 욕정이다.
사회적인 명성을 얻고자 하는 욕망은 평범해지는 것에 대한 공포감 때문에 더 커진다.
평범한 삶이 모욕적이고, 천박하고, 초라하고, 추하다고 생각할수록, 그 삶으로부터 멀어지고자 하는 욕망도 강해진다.
공동체가 부패할수록, 개인적 성취의 유혹도 강해진다.
평범하다는 것이 존엄과 안락에 대한 중간적인 요구도 충족시키지 못하는 삶을 영위한다는 의미일 때는 높은 지위에 대한 욕망이 강렬해질 수밖에 없다. 모든 인간이 귀중하다는 인식을 회복할 수 있을 때,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그런 인식을 유지할 수 있는 공간과 태도를 조성할 수 있을 때, 사람을은 평범한 삶을 어둡게 보지 않는다. 기독교는 위계의 개념을 없앤 것이 아니라, 성공과 실패를 윤리적이고 비물질적인 방식으로 재규정했다.
5. 보헤미아
보헤미아는 마음의 태도다. 보헤미아는 '품위'라는 부르주아적 개념에 들어맞지 않는 광범위한 사람들과 관련되어 사용되었다. 보헤미아와 부르주아지를 궁극적으로 갈라놓는 것은 누가 높은 지위를 얻을 자격이 있고 그것은 어떤 이유에서인가 하는 문제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월든》에서, 대부분의 사치품, 그리고 이른바 생활에 편리한 물건들은 필요불가결한 것이 아닐 뿐 아니라, 인류의 향상에 장애가 되고, 사람은 없이 살 수 있는 것이 많아질수록 행복해진다, 영혼에 필요한 것을 사는 데 돈은 필요하지 않다고 했다.
주류 문화와 갈등하면서도 자신 있게 살아가려면 우리의 직접적인 환경에서 작동하는 가치 체계, 우리가 사교적으로 어울리는 사람들, 우리가 읽고 듣는 것이 중요하다. 보헤미안들은 대도시에 살면서 지위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을 피하고 대신 진정한 친구들과 매일 접촉할 수 있는 동네에 모여 살았다. 보헤미아의 역사에는 그들의 우정으로 유명해진 장소와 이름들이 찬란하게 빛난다. 몽파르나스, 블룸스베리, 첼시, 그리니치빌리지, 베니스 비치.
랄프 왈도 에머슨의 《자립》 왈, "나는 내가 관심을 가지는 일을 하지, 다른 사람들이 요구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 지위에 대한 불안은 성공적인 삶과 성공적이지 못한 삶 사이의 공적인 차이를 인정할 경우 치를 수 밖에 없는 대가다. 지위에 대한 요구는 불변이라 해도, 어디에서 그 요구를 채울지는 여전히 선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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