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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27)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문학-소설] (마쓰이에 마사시) 본문

Report of Book/문학

(2025-27)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문학-소설] (마쓰이에 마사시)

재도담 2025. 11. 20. 12:29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마쓰이에 마사시 저, 김춘미 역, 비채, 432쪽. 

화자인 사카니시 토오루는 대학에서 건축을 전공하고 갓 졸업한 청년이다. 
평소 존경하던 건축가 무라이 슌스케의 설계 사무소에 큰 기대감 없이 입사원서를 냈는데 
몇년간 신입사원을 뽑지 않던 그곳에서 그를 깜짝 채용한다. 
무라이 설계 사무소는 1년에 여름의 두 달 정도를 기타아사마 아오쿠리마을의 여름 별장에서 합숙을 하며 보내는 전통이 있다. 
사카니시가 채용된 해에 무라이 사무실에는 아주 중요한 사건이 있었는데, 
'국립 현대 도서관'의 설계 공모전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무라이 설계 사무소에는 사무장 이구치를 비롯해, 미남 베테랑 고참인 고바야시와 치프 가와라자키
중고참 격인 사사이, 교육담당인 우치다, 화자의 3년 선배인 나카오 유키코가 있고, 
선생님의 조카이자 비서 역할을 담당하는 무라이 마리코가 함께 한다. 
소설의 대부분은 여름 별장에서의 2-3달의 합숙과정을 묘사하고 있고, 
마지막 2챕터(전체는 26챕터로 이루어져 있다)는 25년 후인 현재 시점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소설은 전체적으로 매우 조용하고 잔잔하고 서정적이다. 
너무 고요해서, 큰 소리라도 내면 분위기가 흐트러질 것 같은 느낌이다. 
여름 별장 주위의 풀, 나무, 새, 꽃, 활화산, 구름 등의 묘사와, 
설계 사무소의 여름 별장에서 각자 자기의 역할을 묵묵하게 열심히 해 나가는 인물들의 묘사가 매우 뛰어나다. 

건축을 동경했던 나에게 무라이 슌스케의 건축 철학과, 제자들을 향한 교육철학은 어떤 울림이 있었다. 
설계 사무소에서 일하고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캐릭터에서 나와 닮은 모습을 찾는 재미도 있었다. 
가끔 소설을 읽다보면, 수많은 종류의 새이름, 꽃이름, 나무이름, 풀이름을 알고 있는 작가의 지식에 놀라게 된다. 

무라이 선생님이 갑자기 쓰러지고 후지사와 기누코와 연락이 닿지 않는 장면에서는 상당히 가슴이 먹먹해졌다. 
사실 이 소설은 대단한 사건이나, 클라이막스 같은 것이 없다. 
하지만, 물에 번진 수채화를 보는 것 같이, 또는 진한 인센스 향을 맡은 것 같이, 강한 여운을 남긴다. 
시간, 공간, 그리고 기억... 
우리의 젊은 날은 훗날 어떻게 기억될까. 


인상적인 구절들. 

"잘된 집은 말이야, 우리가 설명할 때 했던 말을 고객이 기억했다가 자신의 집에 찾아온 손님들에게 그대로 전달하게 되지. 우리 건축가들의 말이 어느 틈엔가 거기 사는 사람들의 말이 되어 있는 거야. 그렇게 되면 성공인 거지." 

가만히 보면 선생님과 우치다 씨는 확실한 공통점이 있었다. 관념적인 말, 추상적인 말은 사용하지 않았다. 둘 다 어디까지나 구체적이고자 노력했고, 고객을 전문용어로 얼떨떨하게 만드는 일 따위는 결코 하지 않았다. 

중간에 끼어들어 이쪽 의도를 설명하는 짓은 금물이다. 이론만 따져서 설명하면 '당신은 무식해'라고 지적하는 것이나 매한가지라 고객은 상처입고 화를 내기 시작한다. 역시 첫번째로 해야 하는 일은 경청이다. 

오전오후 합해서 최대 열 자루 정도 연필을 쓰는 것이 일의 정확성도 지켜지고, 연필도 정성껏 다루게 된다고 설명해주었다. 그보다 더 깎아야 하는 것은 필압이 너무 강하거나 너무 난폭하거나 너무 서두르거나 그중 하나로, 즉 아무 생각 없이 일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덧붙였다. 선을 계속 긋고 있으면, 어느 지점부터 의식이 흐트러지는 때가 있다. 그 틈을 노려서 실수가 미끄러져 들어오니까 연필이 어떻게 닳는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먹고 자고 사는 곳이라고 한 것은 참 적절한 표현이야. 이들은 뗄 수 없는 한 단어로 생각해야 돼. 먹고 자는 것에 관심 없이 사는 곳만 만들겠다는 것은 그릇만 만들겠다는 얘기잖아? 그러니까 나는 부엌일을 안 하는 건축가 따위 신용하지 않아. 부엌일, 빨래, 청소를 하지 않는 건축가에게 적어도 내가 살 집을 설계해달라고 부탁할 수는 없어." 

"불탄 들판에, 외롭게 자기 집만 남아 있는 광경을 상상해봐. 주위 사람들은 많이 죽었어. 이쪽은 인명은 물로 가재도구도 전부 무사해. 이건 말이야, 견디기 어려운 광경이야. 그런 사태를 사람이 견뎌낼 수 있을까? (...)" 

아무것에도 쫓기지 않아도 되는 많은 시간과 엄청나게 많은 재력으로 사람을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게 하는 공간이 있었기 때문에 영국에서는 박물학과 생물학이 발달했다고 대학 강의에서 들은 것이 생각난다. 

일은 사무소 안에는 없고, 여러분의 손안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