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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47)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 [에세이] 본문

Report of Book/에세이

(2021-47)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 [에세이]

재도담 2021. 10. 5. 09:05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 

광화문글판 문안선정위원회, 교보문고 

 

좋은 시란
어린이에게는 노래가 되고
청년에게는 철학이 되고
노인에게는 인생이 되는 시다.
- 괴테 

정현종과 릴케 

과일은 나무에서 따는 순간 썩기 시작하고 물고기는 잡아 올리는 순간 상하기 시작하듯이 말도 발설이 되는 순간 낡아가기 시작한다. 그래서 발화되지 않은 말이 가장 신선하다. 이 당연한 사실을 우리는 흔히 간과하여 서둘러 말하고자 하고 많이 말하고자 한다. 이것은 권력욕과 명예욕에 관련되어 있다. 서둘러 하는 말과 지나치게 큰 목소리로 하는 말, 정신없는 다변은 흔히 오류와 어리석은 제한을 확산시키게 되고, 싫증과 혐오감을 강화시킨다. 

백무산 

씨앗처럼 정지하라. 꽃은 멈춤의 힘으로 피어난다. 
달리기만 하면 타야 할 사람은 탈 수 없고 내려야 할 사람도 내릴 수 없다. 

이준관 

구부러진 길이 좋다.
들꽃 피고 별도 많이 뜨는 구부러진 길 같은 사람이 좋다. 

정호승 

먼 데서 바람 불어와 
풍경 소리 들리면 
보고 싶은 내 마음이 
찾아간 줄 알아라 

< 사람들은 왜 모를까 > 김용택 

이별은 손 끝에 있고 
서러움은 먼데서 온다 
강 언덕 풀잎들이 돋아나며 
아침 햇살에 핏줄이 일어선다 
마른 풀잎들은 더 깊이 숨을 쉬고 
아침 산그늘 속에 
산벚꽃은 피어서 희다 
누가 알랴 사람마다 
누구도 닿지 않은 고독이 있다는 것을 
돌아앉은 산들은 외롭고 
마주보는 산은 흰 이마가 서럽다 
아픈 데서 피지 않은 꽃이 어디 있으랴 
슬픔은 손끝에 닿지만 
고통은 천천히 꽃처럼 피어난다 
저문 산 아래 
쓸쓸히 서 있는 사람아 
뒤로 오는 여인이 더 다정하듯이 
그리운 것들은 다 산 뒤에 있다 
사람들은 왜 모를까 봄이 되면 
손에 닿지 않는 것들이 꽃이 된다는 것을 

< 겨울 들판을 거닐며 > 허형만 

가까이 다가서기 전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어 보이는 
아무것도 피울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겨울 들판을 거닐며 
매운 바람 끝자락도 맞을 만치 맞으면 
오히려 더욱 따사로움을 알았다 
듬성듬성 아직은 덜 녹은 눈발이 
땅의 품안으로 녹아들기를 꿈꾸며 뒤척이고 
논두렁 밭두렁 사이사이 
초록빛 싱싱한 키 작은 들풀 또한 고만고만 모여 앉아 
저만치 밀려오는 햇살을 기다리고 있었다 
신발 아래 질척거리며 달라붙는 
흙의 무게가 삶의 무게만큼 힘겨웠지만 
여기서만은 우리가 알고 있는 
아픔이란 아픔은 모두 편히 쉬고 있음도 알았다 
겨울 들판을 거닐며 
겨울 들판이나 사람이나 
가까이 다가서지도 않으면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을 거라고 
아무것도 키울 수 없을 거라고 
함부로 말하지 않기로 했다 

< 정월의 노래 > 신경림 

눈에 덮여도 
풀들은 싹트고 
얼음에 깔려서도 
벌레들은 숨쉰다 

바람에 날리면서 
아이들은 뛰놀고 
진눈깨비에 눈 못 떠도 
새들은 지저귄다 

살얼음 속에서도 
젊은이들은 사랑하고 
손을 잡으면 
숨결은 뜨겁다 

눈에 덮여도 
먼동은 터오고 
바람이 맵찰수록 
숨결은 더 뜨겁다 

< 연탄 한 장 > 안도현 

또 다른 말도 많고 많지만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 

방구들 선득선득해지는 날부터 이듬해 봄까지 
조선팔도 거리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은 
연탄차가 부릉부릉 
힘쓰며 언덕길을 오르는 거라네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듯이 
연탄은, 일단 제 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 하면 
하염없이 뜨거워지는 것 
매일 따스한 밥과 국물 퍼먹으면서도 몰랐네 
온몸으로 사랑하고 나면 
한 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 게 두려워 
여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도 되지 못하였네 

생각하면 
삶이란 
나를 산산이 으깨는 일 
눈 내려 세상이 미끄러운 어느 이른 아침에 
나 아닌 그 누가 마음 놓고 걸어갈 
그 길을 만들 줄도 몰랐었네, 나는 

< 새해 첫 기적 > 반칠환 

황새는 날아서 
말은 뛰어서 
거북이는 걸어서 
달팽이는 기어서 
굼벵이는 굴렀는데 
한날 한시 새해 첫날에 도착했다 

바위는 앉은 채로 도착해 있었다 

< 백색 왜성의 꿈 > 김용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