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dGen's story
(2016-12) 행복 스트레스 [인문학] 본문
행복 스트레스.
탁석산 저. 창비.
토지·노동·화폐는 분명 상품이 아니다. 매매되는 것들은 모두 판매를 위해 생산된 것일 수밖에 없다는 가정은 이 세 가지에 관한 한 결코 적용될 수 없다. (…) 노동이란 인간 활동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인간 활동은 인간의 생명과 함께 붙어 있는 것이며, 판매를 위해서가 아니라 전혀 다른 이유에서 생산되는 것이다. 게다가 그 활동은 생명의 다른 영역과 분리할 수 없으며, 비축할 수도 사람 자신과 분리하여 동원할 수도 없다. 그리고 토지란 단지 자연의 다른 이름일 뿐인데, 자연은 인간이 생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현실의 화폐는 그저 구매력의 징표일 뿐이며, 구매력이란 은행업이나 국가 금융의 메커니즘에서 생겨나는 것이지 생산되는 것이 아니다. (…) 그러므로 노동·토지·화폐를 상품으로 묘사하는 것은 전적으로 허구이다.
B1폭격기 한대 값(2억8500만달러)이면, 전세계 5억7500만 어린이들에게 수두, 디프테리아, 홍역 등 기본 예방주사를 맞힐 수 있다. 그렇게 하면 매년 2500만명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 여기서 폭격기 한대를 달러로 환산하는 순간, 우리는 그것을 상상할 수 없게 된다. 추상화의 맹점이다. 추상화를 경계해야 한다.
아프리카에까지 가서 우물을 파주는 사람은 훌륭하다. 하지만 아프리카의 빈곤은 자원을 둘러싼 전쟁에서 비롯되며, 전쟁은 선진국이 조장한다는 의심을 거두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서구의 선진국이 전쟁을 조장해서 자원을 확보하고, 전쟁을 일으켜서 무기를 팔고, 전쟁이 끝나면 재건이란 명목으로 건설사업을 한다는 비판도 무시할 수 없다. 이런 구조를 바꾸지 않는다면 아프리카는 전쟁과 빈곤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평등이 이념에 그쳐서는 실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평등은 가까운 사람들에게 적용되어야 한다. 우리의 삶은 결국 가까운 사람들에 의해 지배받는다. 범세계적인 사랑을 외쳐도 내가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은 결국 주위 사람들뿐이다.
여러 인간 관계의 갈등과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평등을 관계의 기본으로 삼아야 한다. 고부, 부모와 자식, 친구 사이가 기본적으로 평등하다는 것을 서로가 인식해야 한다.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역할이 다를 뿐 평등한 사이다. 부모와 자식도 마찬가지다. 부모는 자식을 키우고 돌봐야 하는 역할을 맡았을 뿐 자식 위에 군림하는 존재가 아니다. 부모와 자식은 평등하다. 따라서 서로를 인정해야 하고 역할을 수행해야 하고 약속을 지켜야 한다. 교사와 학생도 역시 평등하다. 가르치고 배우는 역할이 다를 뿐 어느 쪽도 자신의 권리가 앞선다고 주장할 수 없다.
결과주의나 총합주의에서 벗어나 평등과 공동의 부를 가르치는 것이 교육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평등과 공동의 부는 가르치지 않으면 사회에 뿌리를 내릴 수 없다. 현대와 같은 개인주의, 시장주의 그리고 공리주의가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개인적인 이익에 앞서 공동의 부를 형성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평등이 보장되어야 자유가 생겨나며, 평등은 제도에 의해 마련되어야 한다는 것이 교육이 아니라면 퍼져나갈 가능성은 높지 않다. 교육은 신분상승의 기회가 아니라, 모두가 좀더 좋은 삶을 살기 위해서 평등과 공동의 부가 필요하다는 것을 체험하게 하는 토대가 되어야 한다.
현대는 개인주의 시대이기에 개인이 중심이다. 예의란 사회 구성원 모두가 지켜야 할 덕목이나 형식인데 개인주의 시대에는 개인의 마음가짐이나 행위에 더 관심을 갖게 마련이다. 개인주의 시대에는 남의 자유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나의 자유를 구가한다는 명제가 통용될 뿐이다. 서로가 지켜야만 하는 것이 있다는 인식은 그다지 머릿속에 있지 않다.
기부나 자선이 좋은 것은 맞지만, 사회 경제 구조의 치명적 결함을 호도하는 도구가 되기도 하고 가난한 사람에게 굴욕을 안길 수도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공중도덕은 공동체의 질서에 관한 것이 아니다. 즉 국가나 사회질서 유지를 위해 요구되는 것이 아니다. 국가주의가 공중도덕이나 질서를 내세워 개인을 탄압한 시대가 있었기에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으나 그것과는 관계가 없다. 공중도덕은 개인과 개인이 좋은 관계를 맺도록 도와주는데 그 목적이 있다. 예의란 그런데 쓰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지금 바로 앞에 있는 낯선 사람과 어떻게 지내야 하는가?' 이런 질문에 답하는 것이다.
우리는 감사의 마음을 간직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기는 때가 많은 것 같다. 하지만 고마움에 구체적으로 답을 할 때에야 비로소 진짜 관계가 성립된다. 관계란 상대가 존재해야 하고 그리고 구체적인 행위가 있어야 한다. 앞서 언급한 공중도덕은 특별한 관계맺기는 아니었다.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좋은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일이었다. 그에 반해 답례는 관계 맺기의 핵심이다. 단순히 감사하는 마음만 가져서는 안되고 반드시 상대방에게 구체적인 혹은 물질적인 감사를 표현해야 한다. 이런 답례는 가까운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유지하는 데 필수다. 가족, 친구, 동호회에 예외 없이 해당된다.
앞서 말한대로 가족은 평등을 기초로 한다. 모두 기본적으로 평등한데 역할이 다를 뿐이다. 부모의 역할이 있고 자식의 역할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역할만으로는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 역할에 충실할 뿐 아니라 서로가 고맙다는 표시를 해야만 한다.
고마운 마음만 먹어서는 안된다. 필요한 장소에 나타날 줄 알아야 하고 필요한 때 적절한 위로를 할 줄 알아야 한다. 꼭 물질적인 형식이 아니더라도 어떤 형태로든 서로가 서로에게 답례한다는 마음이 없다면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
시장주의에 맞서기 위해서는 개인과 사회 사이에서 완충작용을 하는 관계망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그리고 돈으로 평가될 수 없는 것들이 바로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기에 돈으로 거래가 되지 않는 영역이 많이 존재할수록 좋은 삶에 가까이 갈 수 있다.
고립, 즉흥적 쾌락, 가짜 관계, 행복에 대한 집착, 상품화, 추상화 등 민주주의, 개인주의, 시장주의 그리고 공리주의가 낳은 폐해를 가까운 사람들을 통해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은 평등, 공중도덕, 예의다.
행복이라는 단어는 너무 추상적이고 모호해서 좀 더 소박하고 명료한 단어를 쓰는 것이 좋다. 즉, 가까운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 흐뭇할 것이고, 기쁠 것이고, 든든할 것이고, 마음에 항상 가득 찬 느낌이 들 것이고, 따뜻할 것이다. 행복을 원한다면 행복이라는 말 대신 이같은 구체적인 말들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 또끄빌이 지적한 민주주의 시대의 특징, 즉 일반적인 관념을 선호하는 현상은 행복을 방해하는 근본적인 원인이다. 일반적인 관념은 추상적이고 구체성이 결여되어 있고 보통 공허하다. 행복이라는 추상명사에서 빠져나와 구체적인 기쁨의 언어를 찾아야 한다.
권위에 대한 복종과 동조 압박감은 학살 같은 특수한 상황에만 적용되지 않는다는 데 무서움이 있다. 그것은 일반적인 현상이다. 사람의 마음은 권위에 대한 복종과 동조 압박감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이것을 혼자서 깨고 나가는 것은 고립을 자초하는 것이기에 위험하고 불안하다. 사회생활을 하는 한 조직의 논리와 조직의 요구를 혼자서 거부하기는 실제로 매우 어렵다.
유학자들은 마음이 쉽사리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마음은 마음먹은대로 되지 않으며 내부로부터의 각성이 마음에 미치는 영향이 크지 않음을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그들이 제시한 방법은 예禮였다. 예로써 마음을 바꾸게 하고, 마음이 바뀜으로써 수신이 가능하게 하여, 여기에서 제가, 치국, 평천하로 나아가려 했던 것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기후, 경제, 그리고 뇌는 복잡계의 대표적 영역이다. 아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은 영역이다. 자신이 마음의 주인이 아니라면 자신의 의지대로 마음을 바꿔 인생을 변화시키는 것은 별로 가능해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마음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개인적인 것도 아니다.
오늘날 세상은 거대한 시장이다. 모든 것을 사고팔고 가격을 매기고 자신의 더 큰 이익을 위해 애쓰는 시대다. 개인이 이런 흐름을 저버리고 마치 외부에서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마음을 다스려서 자기로부터의 혁명을 꾀하는 것이 과연 현실성이 있는가? 우리는 마음의 준인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손님도 아니다. 따라서 마음을 바꿔서 인생을 바꿔야 한다거나 마음이 시키는대로 살아야 한다는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 받아들인다고 해도 조건이 필요하다.
긍정적 눈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이 긍정적으로 보이고 긍정적으로 보이면 밝은 마음이 들어서 행복하다고 한다(물이 절반 차 있는 컵의 비유).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순환논리에 빠져 있다. 밝은 마음이 있어야 물이 반이나 남았다는 긍정적 생각을 하게 되고, 긍정적 생각을 하면 밝은 마음이 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부정적으로 보면 자신의 마음도 부정적으로 변할 수 있는데 누가 그러고 싶겠는가. 문제는 어떻게 밝은 마음을 갖게 되는가이다.
있는 그대로 본다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더울 때 덥다고 느끼는 것이 정상이다. 이럴 때 긍정적으로 생각하여 덥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효과가 있을까. 모든 것이 정신에 달려 있다는 말이 통할까, 아닐 것이다. 배가 고프면 먹어야 한다. 추우면 불을 지펴야 한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토대로 무엇인가 해야 하는 것이 상식이다. 억지로 훈련해서 긍정적으로 보는 것은 별로 효과가 없다. 그렇게 해도 여전히 세상은 그대로이고 그대로인 세상을 그대로 보지 못하면 아무런 발전도 기대할 수 없다.
우리가 관점을 바꾼다고 알고 있는 것은 흔히 말하듯 부정에서 긍정으로 생각을 바꾼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주목하지 못했거나 안 했던 면을 끄집어낸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관점의 변화는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보고 그 안에서 발견한 여러가지 사실 중 어느 것을 택하느냐와 관련된 문제라는 의미이다. 관점을 바꾸는 것은 마음속에서 일어나야지, 마음 밖의 세계에 새로운 사실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다. 미처 주목하지 못했던 점을 발견하는 것이다. 물론 새로운 관점의 발견이 놀라운 마음의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그리고 못 봤던 것을 다시 보게 된 것을 관점의 변화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세상은 관점의 변화와 상관없이 여전하다. 세상에 변화가 생긴 것은 없다는 뜻이다.
좋은 사람의 정의는 어렵지만 더 나은 사람은 남과 자신에게 전혀 낯설지 않다. 어제보다 더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해 우리는 수행을 한다. 수행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모른다. 있다면 마지막 날 역시 그 전날보다 나은 인간이면 되는 것이다. 수행의 목표는 더 나은 인간이 되는 것이지 무엇을 완료하거나 무엇에 성공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수행은 소리 없이 내면에서 진행된다. 지금이 어떤 시대인지를 읽고 그에 대처한다. 머리도 함께 움직이는 것이다. 상품화, 추상화, 고립, 즉흥적 쾌락, 행복에 대한 집착, 가짜 관계 등에 대해 무엇이 문제이고 원인이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우리의 마음에 짐이 되고 더 나은 인간이 되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들의 본질에 대해 성찰을 거듭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과정이 고행처럼 겉으로 드러날 리가 없다. 생각이 진행되고 고민이 깊어지고 다시 출구를 모색하고 이런 과정은 내부에서 소리 없이 힘들지만 한걸음 한걸음씩 진행된다. 때로는 뒤로도 가고 비틀거리기도 하며 주저앉기도 하지만 다시 일어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수행이다.
행복의 구성 단위는 개인(자신), 이웃(가까운 사람들), 사회이다. 자신, 가까운 사람, 어려운 사람들에게 3분의 1씩 나누라. 이것이 3분의 1 원칙이다. 개인에게는 수행,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예의, 사회에는 평등과 공동의 부가 필요하다. 우리 삶의 목표는 행복이 아니라 좋은 삶이어야 한다. 좋은 삶이란 3분의 1 원칙을 따르는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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