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redGen's story

(2020-??) 이슬람 전사의 탄생 [역사] 본문

Report of Book/역사

(2020-??) 이슬람 전사의 탄생 [역사]

재도담 2020. 2. 29. 22:17

이슬람 전사의 탄생 

정의길 저, 한겨레출판, 480쪽. 

중동 현대사에 관심 있는 분들에게 짱짱맨이 될 책. 

진짜 최고다. 

매우 재미있고 흡입력도 뛰어나다. 

단, 중동현대사 자체가 너무 복잡하게 얽혀 있으므로 매우 암기력이 뛰어나거나 노트를 할 필요가 있다. 


사우디아라비아 

사우드 가문의 수장인 무함마드 빈 사우드는 이슬람 율법학자 무함마드 이븐 압둘 와하브에게서 중동을 제패할 이론적 배경을 발견하고 서로 연합한다. 일종의 정교 동맹. 정치권력은 사우드 가문이, 종교권력은 와하브 추종자들이 나눠갖는 일종의 권력분점의 동맹. 
아라비아 반도 통일과 이슬람 신정국가 수립을 꿈꾸던 사우드 가문은 영국과 '다린 조약'을 맺고 영국의 지원을 받아, 오스만튀르크와 동맹을 맺고 있는 알라시드 부족과의 전쟁을 치른다. 
영국은 중동 영토를 두고 사우드 가문 뿐 아니라, 사우드 가문의 경쟁자인 하시미테 가문, 프랑스(사이크스-피코 협정), 유대인(벨푸어 선언)과 4중의 중복계약을 맺는다. 
가장 피해를 본 것은 팔레스타인 주민들이었고, 그 다음 피해자가 하시미테 가문이었다. 사우드 가문은 터키군과 직접적으로 싸우지 않고 알리시드 가문과 싸움 끝에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아라비아 반도 내륙의 사막지대를 차지하게 되는데, 이 쓸모없어 보였던 사막은 나중에 세계 최대의 유전지대가 된다. 
사우드 가문은 1924년, 하시미테 가문이 700년간이나 통치해온 성지 메카를 함락하고 아라비아 반도의 상징적인 통치자가 된다. 하시미테 가문은 갈 곳 없는 신세가 되었으나, 대신 큰아들 압둘라는 요르단을, 작은아들 파이살은 이라크를 영국으로부터 할양받게 된다. 
-
오일쇼크 후 갑자기 부자가 된 사우디는 아랍 세계, 더 나아가 이슬람 세계에 대한 종주권을 확보하려는 야망을 갖게 된다. 사우디는 왕정을 위협하는 세속주의 운동을 예방하고 와하비즘을 이슬람의 표준을 삼고자 엄청난 돈으로 전세계에 무슬림세계연맹(MWL)을 통해 이슬람권 각지에 지부를 세우고 모스크를 지었다. 

이집트 

하산 알 반나는 방과 후 학교로 무슬림형제단을 창설한다. 소년들의 모임이었던 이 모임은 소년들의 아버지와 형제들이 찾기 시작하면서 곧 성인 남성을 위한 무슬림 운동 결사체로 바뀌어나가고 이슬람 최대 정치 운동 조직으로 진화한다. 무슬림형제단은 범이슬람 근대주의를 표방하면서 반식민주의, 반서구화를 추구하였고 민족주의에 매몰되지 않았다. 시오니즘을 앞세워 팔레스타인 지역에 밀고 들어온 유대인들은, 기존에 팔레스타인에 살고 있던 아랍인들과 충동을 일으켜 팔레스타인 폭동이 일어났고 이 과정에 무슬림형제단은 범이슬람주의 운동 단체로 거듭났다. 무슬림형제단이 커지고 왕정을 타도하기 위한 쿠데타를 계획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이집트 정부는 무슬림형제단을 해체하고, 하산 알 반나는 정부의 사주로 암살당한다. 
이집트 출신 지식인인 사이드 쿠틉은 반나의 암살과 미국 유학생활을 통해 이슬람의 주적이 서구 현대화 문명의 타락과 오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슬람 세계가 겪는 고통의 원인이 타락한 서방 자본주의를 좇는 것이이라고 생각했다. 쿠틉은 공개적으로 무슬림형제단 활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이슬람 사상가로서 형제단의 이론가들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집트 육군 대령 가말 압델 나세르가 이끄는 군 내 비밀결사단은 무슬림형제단과 협력하여 쿠데타를 일으키고 오스만튀르크 계열인 파룩 왕조를 몰아내고 2500년만에 이집트인에 의한 이집트 정부를 수립했다. 하지만, 두 세력은 화합할 수 없었다. 나세르는 범아랍 사회주의, 현대화, 평등주의, 세속주의, 산업화를 꿈 꾸었으나, 무슬림형제단은 사회 모든 측면에서 이슬람적 가치를 시행하고자 했다. 결국 두 집단은 충돌하고 무슬림형제단은 나세르를 암살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쿠틉은 수감된다. 쿠틉은 옥중에서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에 비견되는, 《진리를 향한 이정표》라는 이슬람주의 무장 운동의 이론적 기원이 되는 저작을 집필한다. 
1966년 쿠틉이 교수형에 처해지고 그의 제자이자 변호사인 마푸즈 아잠이 그의 마지막을 지켰다. 천재소년이었던 아이만 알 자와히리는 큰외삼촌 아잔으로부터 쿠틉의 '순교'에 대해 반복해서 듣고 쿠틉의 결벽적인 혁명성과 고난을 마음의 지표로 삼았다. 
-
나세르는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고 아스완 댐을 건설해 이집트 공업화를 추진하면서 제3세계 전체에서 영웅이 되었으나, 이후 시라이의 쿠데타, 예맨 내전 개입 등으로 입지가 약해졌다. 그러던 중 1967년 이스라엘이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을 상대로 개전하여 6일만에 승리를 이끌었다(6일 전쟁). 대중과 지식인들은 6일 전쟁에서 완패한 나세르 등 세속주의 근대화 지도부 세력에 실망하고 이들의 심적 공백을 이슬람주의 세력이 채우기 시작했다. 이슬람주의 세력은 쿠틉의 지하드 이론을 밀어붙이며 그것을 자신들의 의무로 규정했다. 
아랍 국가들에서 정권을 잡고 있던 세속주의 근대화 지도부들은 대중의 지지를 잃고 독재정권이 되어갔다. 

나세르가 1970년 심장마비로 사망하고, 부통령인 안와르 사다트가 대통령직을 계승했다. 단명이 예견된 그는 이슬람주의자들에게 관용적인 태도를 취하고 은밀히 무기도 제공해주었다. 이슬람 그룹은 이집트 대학들을 급진화시키고 완전히 장악했다. 자와히리는 카이로 의과대학에 진학해 본격적인 지하드주의 단체, '알 지하드'를 탄생시켰다. 

1973년 이집트는 시리아와 이스라엘을 전면 침공하지만(4차 중동전쟁), 이스라엘의 반격에 밀리면서 휴전하게 된다. 이 와중에 미국은 이스라엘에 대한 공개적인 군사 지원을 밝히고 아랍권은 격앙한다. 이런 조처에 대응해, 석유수출국기구(OPEC)은 유가를 인상하고 미국에 대한 석유 금수를 단행한다. 공황에 준하는 경제 위기가 전 세계를 덮친다. 미국은 금 태환제를 전격 폐지한다. 유가 폭등은 산유국들, 특히나 사우디아라비아에 오일달러 세례를 퍼부었다. 

이란 

1951년 이란에서는 민족주의자이자 의회주의자이고, 철저한 세속주의 근대화론자인 모하마드 모사데크가 총리로 선출됐다. 그는 당시 유럽도 머뭇거리던 복지와 국민권리 확대 정책을 취하고, 석유산업 국유화를 추진했다. 이런 석유 자원을 지배하던 영국의 '앵글로-이란 오일 컴퍼니(AIOC)'를 국영화했다. 영국은 이란의 석유 수출을 막고 경제에 타격을 주려고, 이란에 대한 봉쇄 조처를 취했다. 미국은 처음에 영국의 입장에 반대하고 두 나라를 중재하려 했으나,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입장을 바꿨다. 한국전쟁등으로 소련과의 대결이 고조되던 시기, 영국(처칠)은 이란이 소련의 영향권으로 들어간다고 미국을 자극했던 것이다. (실상 모사데크는 평소 공산주의를 반대하고 혐오했다.) 미국은 '아약스 공작'을 통해 모사데크를 미치광이로 선전하고 무슬림 지도자들과 모사데크 사이를 이간질했다. 결국 폭력사태와 항의소동으로 모사데크는 물러나고 죽을 때까지 자택에 연금됐다. 
오일 쇼크 후, 팔레비 왕조는 시민들을 강압적으로 통제했고, 이에 대항하는 반정부활동이 왕성해졌다. 이란의 반정부 지식인들은 미국의 카터 행정부가 인권외교를 표방하자 이에 고무되어 반정부 활동을 하며 '테헤란의 봄'을 맞았다. 구심점이 없던 대중을 시아파 이슬람 성직자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이끌며 본격적인 샤 체제 타도 대중 운동이 펼쳐진다. 호메이니는 신정 공화국 수립과 종교와 정치의 일원화를 추구했으나, 반정부 운동의 확장을 위해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세속주의 사회주의자들을 끌어들여 팔레비를 이란에서 몰아냈다. 하지만 이란을 장악한 호메이니는 미국으로 시선을 돌리며(미국 대사관 인질사건) 반대파들을 숙청했다. 

시리아 

6일 전쟁 후, 바스주의자들이 득세했다. 바스당은 국가를 찬양하는 사회주의에 아랍민족주의가 결합된 것이었으나, 점차 진보적 성향은 희미해지고 국가주의만 강화됐다. 

이라크 

마찬가지로 바스당이 권력을 잡았다. 그가 바로 사담 후세인이다. 

팔레스타인 

6일 전쟁 후, 이스라엘군이 이스라엘 접경 요르단의 팔레스타인 난민촌을 공격, 팔레스타인해방기구는 필사적으로 항전했다. 이스라엘은 군사적으로는 승리했지만, 국제적 비난 여론에 시달리고, 팔레스타인해방기구는 정치적 승리를 얻었다. 무장 투쟁 노선을 천명한 파타 그룹 지도자 야세르 아라파트가 의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팔레스타인해방기구를 과감한 테러가 결합된 무장 투쟁으로 이끌어갔다. 

요르단 

이스라엘 건국 전까지 팔레스타인과 요르단은 지리적 구분조차도 희미했다. 팔레스타인해방기구는 요르단을 팔레스타인의 일부로 접수하자는 말을 공공연히 했고 팔레스타인과 요르단의 갈등은 커져가, 요르단 국왕은 통치권의 위협을 느꼈다. 1970년 요르단에 계엄령이 선포되고, 요르단군이 암만의 팔레스타인 난민 캠프를 공격했다. '검은 9월'이라고 불리는 요르단 내전이었다. 수천 명의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사망했다. 이스라엘보다 같은 아랍 민족들의 손에 더 많은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죽었다. '검은 9월'은 아랍의 분열을 극명하게 보여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