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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39) 생명을 묻다 [과학] (정우현) ★ 본문

Report of Book/과학

(2022-39) 생명을 묻다 [과학] (정우현) ★

재도담 2022. 9. 27. 12:05

생명을 묻다 

정우현 저, 이른비, 492쪽. 

또 하나의 인생 책. 

읽으면서 너무 유쾌, 상쾌, 통쾌했다. 

평소 내가 생명과 진화론에 대해 가지고 있던 생각과 너무 맞닿아있는 부분이 많아서 

읽으면서 너무 즐거웠다. 

누구와도 나누지 못했던 생각들을 저자와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는 것 같은 행복함을 누렸다. 

 

아래는 책에서 줄 그은 부분. 

우리가 보는 자연은 진정한 전체의 모습이 아니라, 우리가 수행하는 과학적 방법에 의해 노출된 아주 작은 일부분에 불과하다. (...) 과학은 생명을 온전히 설명하지 못한다. 
"자신의 생명이 존귀하다는 것을 자각할 때 삶은 더 큰 환희를 안겨준다." - 괴테 

1장 생명은 우연인가? 

'왜 이 세상에는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니라 무언가가 있는 것일까?' 이것은 어쩌면 모든 철학 중에서 가장 심오한 존재론적 질문일 것이다. 
데카르트 - 기계론적 생명관 
환원주의 - 각 부품을 따로 분해해서 연구하고, 각각의 기능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면 결국 기계 전체를 이해할 수 있게 되리라는 생각 
생물학이 다루는 현상은 이른바 '위계구조hierrachial structure'로 되어있다. 생물을 구성하는 각각의 요소들이 한 단계 높은 차원에서 합쳐지면 하위 단계에서는 보이지 않던 전혀 새로운 속성이 나타나는 현상이 빈번한데, 이를 '창발성emergence'이라고 부른다. 
생명을 생명이게 하는 활력은 과연 어디서 나오는걸까? 생명에는 필연적인 의도가 있다.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한다는 것, 그리고 잘 적응하려 한다는 것이다. 생명이란 자신을 잘 보존하고 복제를 통해 증식하고자 하는 '무의식적인' 의도를 가진 존재이다. 그것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 현상이다. 
많은 과학자들은 생명이나 생명 활동을 설명하는 데 있어 어떤 '목적성'을 언급하는 것을 금기처럼 여긴다. 그러나 목적이라는 개념 없이 생명을 설명하려 한다면 매번 곤혹스러음을 느끼게 된다. 
생명은 합목적성을 가진다. : 신체의 모든 부위는 궁극적으로 생명체 전체의 삶을 보존하기 위한 목적을 가진다. 

2장 생명은 입자인가? 

생명이란 무엇인가? ① 모든 생명체는 생장하고 증식하는 성질이 있다. ② 모든 생명은 예외 없이 DNA나 RNA처럼 핵산의 현태로 이루어진 '유전물질'을 갖고 있다. ③ 생명은 모두 막으로 둘러싸인 '세포'라는 최소 단위로 구성되어야 한다. ④ 생명체는 주변환경으로부터 오는 자극에 반응하는 특성을 보인다. ⑤ 항상 일정하고 안정적으로 일어나는 '물질대사'가 필요하다. 
오늘날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가장 명쾌하면서도 납득할 만한 정의가 있다면 바로 '자기 자신을 스스로 복제할 수 있는 시스템'일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생명이 '어떻게' 스스로 복제할 수 있는지 그 메커니즘을 거의 완벽하게 알아냈지만, '왜' 생명이 그렇게 하는지는 모른다. 

슈뢰딩거는 열역학적 개념을 이용해 생명을 "음의 엔트로피를 먹고 사는 존재"라고 정의한다. 
우리 몸을 구성하는 많은 부위가 얼마 전에는 다른 사람의 몸의 일부였을 수도 있지만 아예 생명을 이루지 않는 물질의 일부였을 가능성도 있다. 
우리 몸을 구성하는 물질의 90퍼센트 이상은 6개월 정도 지나면 완전히 다른 물질로 치환된다. 생명은 어떤 '구조'나 '형태'라기보다는, '현상' 또는 '상태'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생명이란 외발자전거가 아니라 그 외발자전거를 타고 넘어지지 않기 위해 균형을 잡으려는 끊임없는 움직임과 조절을 의미한다. 알맹이가 바뀌어도 나라는 정체성에는 변함이 없다고 한다면, 생명은 입자 자체가 아니라 틀림없이 그것이 만들어내는 어떤 흐름이자 상태라 볼 수 있다. 

3장 생명은 물질인가? 

딕 스왑Dick Swaab은 뇌를 인간이 지닌 소유물이라기보다는 인간 그 자체라고 본다. 우리의 '정신'은 수십억 개의 신경세포들이 빚어내는 상호작용의 산물이다. 콩팥이 소변을 생산하듯 뇌는 정신을 생산한다. 

과학의 발전은 천천히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패러다임'의 전환을 통해 혁명적으로 이루어진다. 여기서 패러다음이란 '사물을 보는 방식이나 문제의 해법에 관한 특정 시대 과학자 집단의 공통된 이해'를 뜻한다. 한 시대의 과학을 설명하는 패러다임이란 진리라 볼 수도 없고, 절대적인 가치를 전제하지도 않는다. 
오늘날 과학계를 지배하는 듯 보이는 물질적 생명관은 그것이 생명을 설명하는 최고의 길이며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에 추구되는 것이 아니다. 급격하게 발전된 현대 생명공학 기술에 힘입어 유전자와 뇌를 중심으로 한 물질적 패러다임이 유행했기 때문이다. 이 유행을 현대의 연구자들이 생명을 설명하는 믿을만한 방식으로 받아들이기로 적절히 합의했기 때문이다. 

4장 생명은 어디에서 왔는가? 

세계의 어느 문명이든 인류가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는가에 대해 엇비슷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공통점은 하나같이 인간은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생물속생설biogenesis : 모든 생명은 오직 이미 존재하는 다른 생명체로부터만 만들어진다. 
Omnis cellula e cellula : 하나의 세포가 존재하려면 그 이전 세포가 반드시 존재해야만 한다. 

무기물로만 가득했던 원시 지구의 척박한 환경에서 어떻게 유기물이 생겨났으며, 거기서 어떻게 최초의 생명이 만들어질 수 있었을까? 최초의 생명이 물질로부터 생겨나는 과정을 '화학적 진화'라 부른다. 

원시 지구의 대기가 번개나 태양복사, 또는 우주 방사능 같은 것에 노출되면 생명체를 구성하는 기본적인 유기화합물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가설이 있으나, 지금까지 어떤 실험도 원시수프에서 자기 복제자를 만들어내지는 못했다. 
유전자는 홀로 일하지 못한다. 그 속에 담긴 정보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함께 일할 단백질이 필요하다. 이 단백질들은 또한 자신이 작용할 기질과 정확한 짝을 이뤄 '자물쇠-열쇠'의 관계가 되어야만 한다. DNA는 특정 단백질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자신의 정보를 가진 단백질을 만들 수 없고, 단백질은 자신을 암호화하는 특수한 DNA가 따로 존재하지 않고는 스스로 생성될 수 없다. 그 뿐 아니라, DNA로부터 정확한 단백질이 만들어지려면 또 하나의 중요한 존재인 RNA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안된다. 리보솜은 DNA에 새겨진 암호를 번역해 단백질을 만드는 데 꼭 필요한 고분자 복합체이다. 이것은 생명체마다 매우 잘 보존되어 있어야 할 거대한 RNA 분자가 없이는 결코 생겨날 수 없다. 더구나 이들이 서로를 향해 동시다발적으로 완벽히 작용해야만 한다. 
생명체를 만들 수 있는 유전자의 최소 갯수는 400여개이다. 다시 말해 아무리 간단한 생명체라도 최소 400개가 넘는 유전자가 존재하면서 동시다발적으로 작동하지 않고는 생존할 수 없다는 뜻이다. DNA는 암호에 불과하다. 거기 담겨 있는 암호가 풀려 만들어지는 단백질만이 바로 세포를 위해 일하는 실존적 분자인 것이다. 그런데 아직 존재하지도 않는 단백질을 만들기 위해 생명이 글자를 써 암호를 만들기 시작했다? DNA 암호와 아미노산의 해독 관계는 거의 모든 생명에 보편적이다. 이는 맨 처음 등장한 생명에서부터 이미 고도의 부호화가 이루어져 있었음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최초의 원시세포는 유전정보의 조각들을 얼기설기 이어붙인 어수룩하고 어정쩡한 모습이 아니라, 애초에 엄청나게 지능적이고 고도로 섬세한 존재였음에 틀림없다. 

지구상에 현존하는 모든 생물은 필수적인 구성 요소와 생명현상을 유지하는 기본 메커니즘이 거의 동일하다. 
자연에 의해 선택될 수 있는 진화의 기회는 반드시 생존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변이 개체와 잉여의 생산력이 제공될 떄만 생겨날 수 있다. 
모든 생명현상은 그 현상을 발생시키는 앞선 생명현상 없이는 탄생될 수 없다. 

5장 생명은 어떻게 진화하는가? 

생식세포 뿐 아니라 우리 몸을 구성하는 모든 세포 하나하나가 다 똑같은 DNA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유전자가 설계도일 뿐 아니라 세포 각각의 생존을 위해 항상 사용해야 하는 일종의 가이드북으로서도 필요함을 말해준다. DNA 구조는 유전자의 비밀을 밝힐 중요한 기계론적 실마리를 제공해주었다. 
지구상의 모든 생물에게 에너지를 제공해주는 고마운 태양은 동시에 가장 강력한 '돌연변이원'으로 작용한다. 우리 몸의 모든 세포는 DNA를 복제할 때마다 낮은 확률이긴 하지만 염기서열을 똑같이 복제하지 못하고 다른 문자를 집어 넣는 오류를 범한다. 발생과 분화 단계에서 일어나는 돌연변이의 대량 축적으로 인해 우리 몸은 전혀 단일하지 않다.. 이곳저곳 누더기처럼 기워진 '유전체 모자이크'현상을 보인다. 돌연변이는 어디에나 있다. 돌연변이라는 운명의 장난은 사실 우연을 가장한 필연인지도 모른다. 돌연변이는 암을 일으키거나 퇴행성 유전질환의 원인이 되는 불행으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그에 앞서 우리에게 더없이 소중한 유산을 남기기도 했다. 그것은 바로 생명의 '진화'와 '종 다양성'이다. 유전자에서 끝없이 일어나는 돌연변이는 진화의 원동력이다. 
한 생물 집단의 진화는 환경을 적극적으로 변화시키고, 이어 이와 관련된 다른 생물 집단의 진화를 유발할 수 있다. 이것을 '공진화'라고 부른다. 
유성생식을 하는 고등생물은 자손을 만들 때 서로 다른 두 가지 성이 접합함으로써 유전자가 섞이에 되는데, 이 때문에 무성생식을 하는 생물에 비해 훨씬 빠르고 효과적으로 유전적 다양성을 얻는다. 그리하여 유성생식은 기생 생물에 대응할 수 있는 면역성을 빠른 시간 내에 성공적으로 확보할 수 있게 된다. 

자연의 진화는 창조의 개념과 충돌하지 않는데, 그것은 진화가 일어나려면 먼저 존재들이 어떻게든 창조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다. 사람들은 종교와 과학을 흔히 갈등과 대립의 틀로 바라보는 데 익숙해져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절대적인 구도가 아니고 언제든지 해석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문제이다. 
최초의 생명이 어떻게 생겨났느냐의 문제는 생명의 진화와 전혀 관계없는 일이다. 진화는 과학이지만 최초의 생명에 대한 이론은 추측이자 믿음이다. 

정글 같은 세계에 선의의 규칙을 세운 것이 철학이며 종교다. 진리를 추구하고자 하는 이런 노력들은 기본적으로 분쟁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생겨난 것이다. 필요하기에 만들어졌고, 유익하기에 남아있다. 오늘날 과학이 종교를 내쫓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일부의 분위기는 이해하기 어렵다. 과학은 인간에게 진보다 행복을 약속하지 못한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도 말해주지 못한다. 과학적 방법론에 의한 인간 이해가 현재로서는 불완전할 수 밖에 없음을 겸손히 인정하고, 더 의미있게 살아갈 수 있는 법을 다채롭게 모색하려는 자세가 우리에게 더 필요하지 않을까. 

6장 생명에 우열이 있는가? 

진화에는 방향이 없다. 당연히 도달해야 하는 목표도 없다. 사회진화론은 분명히 '진화'라는 개념을 채택했지만, 실제로는 이상적인 방향으로 '진보'하는 사회를 추구했다. 다윈은 진화를 결코 진보의 의미로 생각한 적이 없다. 
'우월한 유전자'나 '열등한 유전자'라는 개념은 완전한 허상이다. 특별한 환경이 만들어낸 임시적인 기준에 따른 것일 뿐이다. 우리는 유전자에 대한 운명론적인 사고를 경계해야 한다. 
일본유전학회는 최근 '우성'과 '열성'으로 표현해왔던 유전형질을 '현성', 즉 '드러난 성질'과 '잠성', 즉 '잠재된 성질'로 새롭게 표현하기로 했다. 틀림없이 실보다 득이 많은 훌륭한 시도라 본다. 

철학이 없는 생물학은 위험한 도구에 불과하다. 
생명이란 무엇일까를 생각해본다는 것은 단지 생물학이라는 과학의 한 분야에 대한 지식을 습득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삶을 대하는 하나의 방식을 선택하는 것이다. 

7장 생명에 법칙이 있는가?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멘델의 유전법칙은 우리에게 '스위치 사고'식으로 유전학을 오해하게끔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유전자 하나의 작동 여부에 따라 형질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어떤 형질을 만드는 유전적 영향력은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충분히 고려해야만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멘델의 유전법칙은 시대에 뒤떨어진 '유전자 결정론'을 담고 있다. 

연속성을 가지는 어떤 개념에서 특정 시점이나 경계를 딱 잘라 규정하기가 쉽지 않음을 '무더기의 역설'이라 부른다. 인생은 생명을 얻는 첫 날부터 잃는 마지막 날까지 모든 순간이 연속적이다. 과학이 발전할수록 인간이 언제 영혼을 갖게 되는지, 언제 감각을 느끼기 시작하는지, 어느 순간부터 인간으로서의 자격이 생기는지 구별하기는커녕 생명의 모든 순간은 구분할 수 없이 연속적이라는 사실만을 깨닫게 된다. 생명이 언제 생명으로 인정받게 되는가의 딜레마는 해결하기 쉽지 않다. 

생명이라는 현상, 또는 질병이라는 현상은 순수하게 과학적인 사실로, 혹은 수치로 환원될 수 없다. 여기에는 '가치'의 문제가 개입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신체의 이상에 대해 말하고 인식하기 시작하는 것은 그것이 통계적 일탈을 보일 때가 아니다. 해롭거나, 기능을 수행할 수 없거나, 고통을 유발하거나, 어쩌면 돌이킬 수 없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생겨날 때이다. 이는 물리적인 방법으로 포착되지 않는다. 
생명체를 규정하는 본질들이 규정되어 있지 않은데 어떻게 생명체가 잘못되었다고 볼 수 있을까? 똑같은 환경과 주어진 조건에서 어떤 이가 수행할 수 없는 기능을 다른 이는 수행하며, 어떤 이가 느끼지 못하는 고통을 다른 이는 절절히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나에게 배설물에 불과한 것이 다른 생명에게는 훌륭한 음식이 된다. 이것이 생명의 연속성이며, 생명이 서로 연결되는 방식이다. 
'성'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간성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정상'이라는 말을 '올바른'이라거나 '마땅히 그래야 할'과 같은 의미로 사용할 수 없다.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는 '단일하고 진실한' 법칙은 없다. 다만 우리에게는 임시적이나마 '유용하고 현실적인' 경계선이 필요할 뿐이다. 

8장 생명을 결정하는 것은 본성인가? 

인간의 본성은 환경에 의해 바뀔 수 있다는 극단적인 믿음과, 인간의 사회적 행동도 결국 유전자에 의해 좌우된다는 정반대 주장에는 꼭 빼닮은 점이 있다. 인류에 씻을 수 없는 비극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어느 쪽 이론이 옳은지와 무관하게, 양극단으로 내닫는 광신은 놀랍도록 닮은 결과를 만들 수 있다. 
인간의 모습은 유전자와 환경의 끊임없는 대화가 만들어낸 것이라 할 수 있다. 타고난 유전자만으로는 부족하며, 환경적 요인만으로 어림없는 일이다. 우리가 성인이 된 이후에도 새로운 것을 배울 때마다 뇌의 형태가 끊임없이 개조된다는 사실이 뇌 과학 연구를 통해 새롭게 밝혀지고 있다. 
후성유전학적 지식이 쌓이면서 일란성 쌍둥이가 왜 다른지 조금씩 이해해가고 있다. 쌍둥이의 유전자는 동일하지만, 그들이 처한 환경에 따라 한 사람의 유전자는 커지고 다른 하나의 유전자는 꺼질 수 있다. 그들이 접하는 음식, 공해, 스트레스 등의 차이는 특정 유전자의 발현 여부를 크게 바꿀 수 있고, 이렇게 만들어진 차이는 두세 대 후의 자손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본성은 오직 양육을 통해서만 역할을 펼칠 수 있다. 본성은 오직 사람들이 자신의 욕구를 만족시킬 환경적 영향을 조금씩 찾아내도록 만들 때만 역할을 펼칠 수 있다. 

9장 생명은 이기적인가? 

생물학은 단일 법칙성의 과학이 아니라 예외의 과학이며, 거대한 통합의 과학이 아니라 다양성의 과학이다. 개미가 공산주의적이라는 사실은 인간의 본능적 미덕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자연선택의 잔혹성으로부터 잔혹이 미덕이라는 결론은 나올 수 없다. 
모든 생물은 스스로를 조직하고 유지하며, 성장하고 번식해 사회를 이룬다. 이 모든 신비한 행위는 자기 자신과 자손을 존속시킨다는 근본적인 목적을 달성하는 데 도움을 주기 때문에 모든 생명이 추구하는 '합목적적' 행동이다. 모든 생명은 하나의 전체론적인 연결망으로 이어져 있다. 
자연 세계에서 우리는 이기적으로 행동할 자격이 없으며, 그럴 수도 없다. 

10장 생명은 아름다운가? 

인간과 동물이 공히 아름답다고, 매력적이라고 느끼는 대상들에는 '평균', '대칭성', '성적 이형성'이라는 세 가지 공통된 특징이 존재한다. 이 세 가지는 모두 생명체가 '좋은 유전자'를 보유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독특한 방식이라 여겨진다. 따라서 이들은 성공적인 번식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가장 평균적인 자손을 만들기 위해서는 나와 반대되는 형질을 가진 배우자를 만나는 것이 유리할 수 있다. 이런 경우 '좋은 유전자'란 나의 부족한 부분을 메꿔줄 수 있는 '상호 보완적인 유전자'가 된다. 면역학적으로도 부모의 유전자가 다르면 다를수록 자식이 가진 주조직적합성복합체major histocompatibility complex: MHC의 다양성이 더 커지면서 질병에 더 잘 저항할 수 있게 된다. 

생명의 연속성이라는 점에서 보면 우리의 나이가 스무 살이라느니, 서른 살이라느니 하는 말들은 모두 잘못되었다. 우리의 나이는 모두 35억 살이기 때문이다.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다양한 생명이 시공간을 초월해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 가족이라는 사실은 놀랍기 그지없다.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경이로우면서도 아름다운 사실이다. 

우리는 대지의 일부분이며, 대지는 우리의 일부분이다. 들꽃은 우리의 누이이고, 순록과 말, 큰 독수리는 우리의 형제들이다. 강의 물결과 초원에 자라는 풀의 수액, 조랑말과 인간의 땀은 모두 하나다. 모두가 한 가족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대지에게 일어나는 일은 대지의 아들들에게도 일어난다. 사람이 삶의 그물을 짜 나아가는 것이 아니다. 사람 역시 한 가닥의 그물에 불과하다. 따라서 그가 그물에 무슨 짓을 하든 그것은 반드시 자신에게 되돌아오기 마련이다. 
온 힘을 다하고 온 마음을 다해서 그대의 아이들을 위해 이 땅을 지키고 사랑하라. 하느님이 우리 모두를 사랑하듯이, 결국 우리는 한 형제임을 알게 될 것이다. 

11장 생물학은 무엇을 탐구하는가? 

자연을 이해하는 데 '존경과 사랑, 그리고 예배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자연에 대한 지식은 자연을 존중할 줄 아는 사람에게만 허용된다. 자연 전체가 각 부분들의 합보다 더 큰 가치를 가진다는 반反환원주의와, 인간은 자연과 연결되어 있다는 낭만주의적 인식이 과학자에게 꼭 필요한 덕목이다. 

과학은 객관적이며 가치중립적일 것이라는 기대를 받지만, 실제로 과학에는 연구를 수행해 얻은 결과를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얼마든지 주관적 판단이 개입할 수 있다. 과학에 논쟁이 존재할 수 밖에 없는 이유다. 과학은 그것을 손에 쥔 사람의 의도에 따라 쉽게 왜곡될 수 있다. 

생물학은 우리 자신을 포함해 모든 생명을 새롭게 바라보게 만든다. 우리가 알고 있는 주변의 모든 생물이 가까운 친척이며, 서로 분리하려야 분리할 수 없는 공동체임을 말해준다. 모든 생명이 서로를 위해 무한한 가치를 지닌 존재임을 깨닫게 만든다. 실제로 우리는 보이지 않지만 아주 끈끈한 연결을 통해 다른 모든 생명과 깊게 얽혀있다. 
생명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물론 우리 인간의 문화와 문명에 크게 기여할 수 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인간을 포함한 전체 생태계의 유지와 안녕르 기약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도 하다. 

12장 생명은 만들 수 있는가? 

우리는 생명을 창조할 수 있는가를 묻기 전에 우리가 창조한 생명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를 먼저 생각해야만 한다. 

13장 생명은 결국 죽는가? 

박테리아와 같은 단세포 원핵생물은 이론적으로 수명이 없다. 이들은 영원히 살 수 있다. 대칭적인 분열을 통해 가운데가 나누어져 한 마리가 두 마리로 늘어난다. 유성생식을 하는 다세포생물은 시간이 지나면 결국 죽는다. 
사람의 세포는 대략 60~70회 정도 분열하고 나면 더 이상 분열하지 못한다. 그것은 진핵생물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선형염색체의 말단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마모되어 점점 짧아지기 때문이다. 염색체 말단의 무의미한 반복서열은 '텔로미어'라고 하는데 인간의 텔로미어는 약 1만5천개의 뉴클레오타이드로 이루어져있고, 세포가 한 번 분열할 때마다 약 150~200개의 뉴클레오타이드만큼 길이가 짧아진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텔로미어의 길이도 다르고, 마모속도도 다르다. 놀라운 사실은 텔로미어가 얼마나 빨리 닳아 없어질지에 우리 개인의 선택이 어느 정도 개입할 수 있다는 점이다. 
특이하게도 우리 신체의 모든 부위를 구성하는 일반 체세포와 달리, 줄기세포와 생식세포는 세포분열이 계속되어도 텔로미어가 전혀 짧아지지 않는다. 이는 한 번 짧아진 텔로미어를 다시 길게 합성해주는 '텔로머레이스' 효소 때문이다. 

우리는 노화를 물리치기 위해 여러 가지 생활 습관을 고칠 수도 있다. 대부분의 노화 연구자들이 권하는 대로 간헐적 단식을 하면서 음식을 적게 먹고, 고기에 많이 들어있는 메타이오닌이나 류신을 가급적 적게 섭취할 수 있다. 가능하면 몸을 차갑게 유지하고, 담배나 방사선을 피해 DNA 손상을 줄이면서 규칙적인 운동을 하면 틀림없이 도움이 될 것이다. 
허나, 우리가 노화를 완벽히 퇴치하는데 성공해 영원히 살 수 있다고 한다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 미리 생각해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예상치 못한 부작용을 막을 법과 윤리의 기준은 언제나 기술 발전에 뒤쳐지기 때문이다. 

개별 생명체는 환경이 변할 때 이에 적응하는 능력이 한정되어 있고, 수명도 이를 이길 만큼 충분히 길지 못하다. 누군가는 죽어서 살아 있는 자들에게 길을 터주는 것, 바로 이 부분이 진화를 위한 자연선택이 일어나는 지점이다. 생명은 죽음을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 영속하는 것이 생명의 과제이고, 그것의 법칙은 죽음이다. 

노년의 시간이 우리의 행복한 삶, 품위 있는 삶을 결정한다. 노화와 죽음은 역설적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와 직결된다. 삶을 살 만한 가치가 있게 만드는 것은 각자가 살아가면서 얻는 지혜에 달려 있다. 살아갈 이유를 아는 사람은 어떤 형태의 삶이든 받아들일 수 있다. 다가올 죽음도 의연히 맞이할 수 있다. 

14장 생명은 무엇이 되려 하는가? 

삶을 주어진 선물로 인정하는 것은 우리의 재능과 능력이 전적으로 우리 행동의 결과는 아니며 완전히 우리의 소유도 아니라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다. 물론 그 능력을 개발하거나 발휘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기는 해도 말이다. 또한 세상의 모든 것을 우리가 원하는 용도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님을 인정하는 것이다. 삶을 주어진 선물로 인정하면 프로메테우스적 열망을 제한하고 어느 정도 겸손함을 가질 수 있다. 이런 관점은 부분적으로 종교적 감수성에 해당하지만, 그것의 울림은 종교라는 영역을 뛰어넘는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은 인간의 삶에 편리하고 풍요로운 변화를 가져다준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에게 행복과 존엄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진보, 즉 우리가 전보다 더 나아지고 있다는 믿음은 인간의 마음에 달린 문제이다. 우리 모두가 마음으로 공감함이 마땅한 윤리의 문제이다.

15장 생명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생명을 개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개체의 성격을 결정하는 것은 특정한 분자 형태나 유전 부호가 안정적으로 존재하느냐 여부가 아니라 관계의 집합이다. 관계의 구체적 성격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바뀌지만 그물망은 지속되며, 이것이야말로 생명 형태의 본질이다. 그러므로 생명에는 모순적이고 창조적인 이중성이 있다. 생명은 원자이거나 그물망이다. 둘 다 이거나 둘 다 아니다. 이것은 비유적 표현이 아니라 생명의 근본적 성격이다. 생명은 존재의 두 상태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으며, 그리하여 죽어 있던 우주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생명의 본질은 '관계'이며, 따라서 그것의 윤리는 '연대'의 윤리여야 한다.

바이오필리아란 에드워드 윌슨이 만든 말로,  '생명에 대한 사랑'이라는 뜻이다. 인간의 마음속에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을 향한 애착심이 내재해 있음을 강조하고자 했다. 그는 인류가 단지 생존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지적·지적·심미적 욕구에 따라 생명을 아끼고 보존하려는 본능을 타고났다고 주장한다. 윤리적인 판단과 도덕적인 행동 모두 진화의 산물이라고 보긴 했지만.

과학은 정치·사회적 이해관계에 끊임없이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으며, 그로 인해 중립을 지키기 어렵다. 과학이 보여주는 데이터는 하나일지 몰라도, 그것을 해석하고 결론짓는 방법은 상황과 맥락에 따라 여러 가지로 달라질 수 밖에 없다. 과학 그 자체는 스스로에게 어떤 가치도 부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양자역학의 선구자 하이젠베르크는 "우리가 관찰하는 대상이 자연 그 자체가 아니라 과학의 방법론에 노출된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전자가 파동이면서 동시에 입자라는 모순적인 현상은 이해할 수 없는 자연의 신비나 변덕으로 생각할 일이 아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방법론으로 납득할 수 있는 것은 자연의 전체가 아니라 기껏해야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자연의 원리와 참모습을 설명하기에는 우리의 언어와 사고가 완전하지 못하다.

현대 물리학을 새로이 정립한 양자역학의 코펜하겐 해석에 따르면, '관찰자observer'가 없이는 우주와 세상도 존재하지 않는다. 생명이 바로 그 관찰자 역할을 수행하기 위한 존재는 아닐까. 생명은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생명이란 우주와 세계를 존재하는 '실재'로 만들기 위해 필연적으로 탄생했어야만 하는 인식의 주체인 것이다. 따라서 생명이 없다면 세상도 존재의 의미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