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dGen's story
[Book] 하나님에 대한 루머 본문
2015 - 48
책 제목도 흥미를 끌거니와 목차도 매력적인 것들이라 읽어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YWAM에서 트레이닝을 받은 나에게는 상당히 충격적으로 다가온 책.
처음엔 거부감과 반발심이 들었으나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읽는 중에, 저자의 생각에 어느 정도 동의하게 되었다.
그리고 반드시 현대 교회에 필요한 내용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을 통해 내가 철저하게 비판할 오늘날 교회에 만연한 새로운 복음은 삶의 변화를 위해 제시된 메시지들이지만 실상은 우리가 복음을 믿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장애물이다. 이는 복음을 실용적인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오랜 노력이 빚어낸 결과물로서 소비주의 사회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
이 책은 처음에는 당신을 염려하게 할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을 염려하게 하는 장본인이 바로 오늘날 복음주의 교회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는 기술들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복음주의는 그러한 기술들이 우리를 영적이고 거룩하게 하고 또한 행복하게 만들어준다고 주장하지만 나는 그것을 믿지 않는다. 그러한 기술들은 소비사회의 일부인 종교 시장 점유율을 유지하기 위한 기독교 단체들의 술수에 불과하다.
그릇된 신학은 성경에 맞서 승리할 수 없고 또한 비평적인 시각 아래서 번성할 수 없다. 하지만 진리는 그렇지 않다. 당신이 믿는 것이 진리라면, 그것은 비평적 사고를 견뎌낼 것이며, 또한 성경이 그것을 확증해줄 것이다. 따라서 당신의 믿음을 정말로 확신한다면, 비평적 사고를 절대로 두려워하지 마라.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것은 사랑의 삶을 사는 것이고, 그것은 자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내어주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때로는 자신을 죽여야 할 만큼 어렵고 그 때문에 예수님은 자신을 좇으려거든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말씀하신 것이다. 십자가가 좋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만일 예수님이 당신과 함께하지 않으신다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도록 당신과 함께 걸어주지 않으신다면, 십자가는 죽음의 도구일 뿐이다.
1.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고 근심하지 마라.
이 음성이 하나님의 것인줄 어떻게 알 수 있지? 대학 시절 우리가 배웠던 것은 결혼이나 진로와 같이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옳은 생각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러기 위해 하나님이 우리 마음속에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말한다(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자기 마음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잘못됐다는 뜻이 아니다.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알고자 한다면 이것은 꼭 필요한 과정이다.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잘 알아야 현명한 결정을 내릴 수 있고, 자기 자신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게된다. 이렇게 자기 마음의 음성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지식에 기여한다.
자기 마음속의 음성을 듣고 다른 이의 음성을 들었다고 말해서는 안된다.
롬10:17에서 바울이 이야기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말씀은 우리 마음속의 어떤 음성이 아니라, 우리가 귀로 들을 수 있는, 즉 외부적인 말씀의 형태로 선포되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복음을 뜻한다(롬10:15).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배우자나 진로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합리적인 사고와 생각이 필요한데, 애석한 것은 자신의 생각을 진지하게 성찰하기 위해서 그것에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이름표를 달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제대로 생각하는 법, 특별히 자신의 생각이 늘 옳은 것은 아니기 때문에 자기 비평적으로 사고하는 방법, 그리고 사람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는 존재이기에 용감히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책임감 있는 사고는 자신의 감정에 귀를 기울일 때에만 가능하다. 감정 역시 생각과 마찬가지로 늘 옳을 수 없지만, 들어야 할 중요한 이야기를 전해주기 때문이다. 자신의 감정에 "하나님" 혹은 성령의 음성이라는 도장을 받고 나서야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젊은이들이 많다. 하지만 이것은 그들의 성장을 방해할 뿐이다. 도덕적 책임감을 지닌 한 성인으로서 권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정작 자신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데, 이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잘못된 신학 때문이다. 우리 사고를 형성한 신학이 우리의 자기 이해와 도덕, 의무, 성인으로의 권리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마음속에서 들리는 음성에는 좋은 음성도 있고 나쁜 음성도 있기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에 대해 신중하고 비판적인 태도를 가져야 한다.
자기 이해는 자신의 마음속에서 나오는 음성, 즉 자신의 생각과 감정에 대한 이해다. 자신의 생각과 감정이 늘 옳은 것은 아니지만 당신의 것이고 그것 없이는 결코 당신 자신을 알 수 없다.
우리 마음속 음성들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사실 하나는 우리 마음 자체가 그렇듯 그 음성들 대부분을 형성하는 것이 우리 마음 바깥에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 마음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비평적인 사고를 회피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다. 이것은 우리가 훌륭한 청지기나 책임감 있는 성인으로서 사고하지 못하도록 한다.
많은 모임들이 자신만의 쾌적대를 만들어 놓고 그것에 속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불편함을 느끼게 한다. 미혹의 가장 강력한 비밀 중 하나는 사람들이 의도하지 않고도 심지어는 돕고 싶다는 좋은 의도만으로 상대를 미혹할 수 있다는 점이다.
중요한 것은 바깥에 있는 많은 음성들 중 우리가 무엇을 듣느냐이다. 대부분의 경우 이런(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미혹이 행해지는 것은 집단을 통해서이며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선한 의도로 상대를 미혹한다.
2. 직관과 성령을 혼동하지 마라.
직관의 다른 이름은 "직관적 이성"이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직관과 논증적인 추론 모두가 이성적 존재인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지능의 한 형태라는 것이다. 따라서 직관은 설명될 수 있음은 물론이고, 논쟁되고 반대되고 추론되며, 심지어는 옳고 그름이 입증될 수 있다. 직관과 성령의 음성을 혼동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의 직관은 인간에게 주어진 기량과 이해의 자연스러운 산물이며 그것은 옳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바울은 성령의 열매로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를 언급하는데,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미덕, 즉 그리스도인의 마음의 지적 습관이다. 이것은 단순한 감정이나 행동의 습관이 아니다. 모든 감정과 지각, 사고를 형성하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마음의 습관이 그러하듯 이러한 미덕을 통해 우리의 직관이 흘러나온다.
직관은 마음의 지적 습관인 기량과 미덕으로부터 나온다. 자비와 같은 미덕이 그리스도인에게만 한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만일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통찰이나 자비는 없는 대신 굉장한 자기의로 충만한 사람이다.
성령의 사역은 우리를 변화시킨다. 성령의 사역을 통해 우리의 내면이 스스로의 노력만으로는 절대 도달할 수 없는 형태로까지 변화된다는 뜻이다. 어쨌든 여기에는 우리의 노력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이는 성령이 우리의 노력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변화시키는 데 우리의 노력을 들어 쓰시기 때문이다. 성령은 우리의 마음을 없애시지 않고 변화시키시며 우리 마음을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새로이 빚으신다.
마음의 미덕은 수년간의 훈련의 열매로서 이전에는 없던 새로운 능력과 자유를 제공해 준다. 미덕을 갖춘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것이 가능해진다. 온갖 것들을 느끼고 이해하고 지각하고 인내할 수도 있게 된다.
3. 하나님께 모든 걸 맡길 필요는 없다.
정말 하나님이 행하시도록 하고 있는지 우리는 알 필요가 없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 그 행위자는 언제나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가능한 행위였대도 우리 마음의 내면적 행위는 언제나 우리 자신의 것이다. 성령이 없이는 하나님이 명령하신 선한 일을 우리가 행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선한 일들을 행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그것이 우리가 구원받은 목적들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마25:14-30에 나오는 달란트 비유를 보면, 종이 주인에게 맡긴 것이 아니고 주인이 얼마의 달란트를 종들에게 맡겼고, 맡겨진 달란트로 이제 무언가를 행해야 하는 것은 종들이었다. 달란트 비유가 보여주는 그리스도인의 순종은 "하나님께 맡겨 드린다"는 개념과 완벽히 대치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일하시도록 할 수 없다. 하나님이 우리가 일하시도록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얼마의 달란트를 맡겨주셨고 우리가 그것을 가지고 힘써 일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의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실상은 허용이며 여기에서도 그러한 사실은 너무나도 중요하다. 순종은 우리 자신의 일부를 내어 드리거나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사용하는 것이다. 순종은 주인이 당신에게 맡긴 일을 당신이 스스로 행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조종하셔야 한다는 생각은 청지기와 종, 순종의 성경적 개념과 정면으로 대치한다. 명령은 받는 것은 사람이지만 조종을 받는 것은 기계다. 청지기들은 배워야 한다. 그들은 하나님이 아니고 언제든 실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달란트를 배워가는 과정에서는 실수를 할 수도 있고 이것은 죄가 아니다. 우리는 불완전한 피조물이고 따라서 배우는 과정에서의 실수는 불가피하다. 그런데 실수를 하는 당사자가 자신인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
오늘날의 새로운 복음은 가르침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사회적인 압력으로 그것에 동조하지 못하는 사람은 죄의식과 염려를 느끼게 한다.
우리의 허용이 없이는 하나님이 우리 삶 속에서 일하실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실재하시고, 우리는 그분이 "우리의 삶 속에서 실재하시도록" 허용할 필요가 없다. 여느 실재하는 사람들과 같이 그분은 우리의 삶 속에서 언제나 일하고 계신다. 우리의 허용이나 인정과는 상관이 없다. 하지만 하나님이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사람 안에서 일하시는 방식과 저항하는 사람 안에서 일하시는 방식은 전혀 다르며, 이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하시도록" 허용하기 위해서는 특단의 열심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러한 자신의 노력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 또한 이 게임의 핵심이다. 만일 그 일을 행하는 사람이 당신이라면 당신은 여전히 자신의 힘으로 그것을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말도 안되는 논리다. 이 게임을 잘 하려면 자신을 잘 속여야 하는데 중요한 것은 그러한 속임수를 자신이 눈치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사실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은 우리 행위의 크기, 꼭 그만큼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증명하기 위해 우리의 행위 자체를 부인할 필요는 없다. 우리의 모든 행함은 사실 그의 행하심이며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선한 것들은 그의 영광을 위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의 행위자는 우리여야 한다. 우리가 아무것도 행하지 않고 사라지는 것이 그분의 뜻이 아니다. 우리 아버지는 선하시며, 그분은 우리가 성령의 은혜를 통해 그의 영원한 아들과 연합된 아들딸로서 그와 함께 일하기를 간절히 바라신다.
4. 우리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찾을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찾고 구해야 하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우리가 놓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뿐이다. 그것은 쉽고 우리는 이것을 죄라고 부른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큰 죄를 짓고 하나님께 불순종할 수는 있지만, 하나님의 뜻을 놓칠 수는 없다는 의미다. 말씀에 드러난 하나님의 뜻 외에도 우주와 역사를 다스리시는 그의 섭리를 의미하는 하나님의 숨겨진 뜻이 있다. 하나님의 뜻을 찾고자 하는 사람이 말하는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드러난 뜻도, 섭리적인 뜻도 아니다. 이것은 성경이 언급하지 않는 "뜻"이다. 곧 존재하지 않는 뜻이다. 이것은 좋은 소식인데, 왜냐하면 우리가 책임감 있는 도덕적 행위자로서, 즉 지혜와 이해 가운데 자라가기를 소원하는 장성한 사람으로서, 자신의 달란트를 적절한 곳에 투자하고자 노력하는 청지기로서, 자신의 의사결정을 주도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숨기신 것을 찾을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언제나 세상의 모든 악과 죄에 상관없이 자신의 선하신 목적을 성취하신다. 우리가 고통을 당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신 것 같은 순간에도 우리를 향하신 여호와의 숨겨진 생각은 분명 선하시다. 이러한 사실을 믿기 어려울 때가 있지만 믿음은 그러한 순간을 위해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의 가장 깊으신 생각이 드러나게 된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였다.
마22:37-39. 하나님 율법의 핵심이 되는 이러한 계명에 순종하는 사람은 율법의 요구를 모두 성취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뜻 안에" 거하기 위해서 다른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거짓된 가르침이다. 그러한 거짓 가르침에서 벗어나라! 대신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라.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평생이라는 시간도 부족할 것이다. 평생의 시간으로도 이루어내기 어려운 것이 이 위대한 계명에 대한 철저한 순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보다 나은 평생은 없을 것이다. 주님은 선한 것이 무엇인지를 이미 우리에게 보이셨다!
하나님의 계명은 무수하다. 하지만 그 계명은 우리에게 짐을 더 지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의와 인자와 사랑이 실제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상세히 보여주시기 위해서다. 우리는 성경에서 가르치지 않은 것을 행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성경은 우리에게 결코 "우리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찾으라"는 끔찍한 짐을 지우지 않는다.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지?"라는 질문은 무언가가 잘못되어 있다는 신호다. 현명한 것과 어리석은 것을 분별하는 지능적 기량, 즉 지혜는 있다. 그리고 이것은 방법이 아닌 기량이다. 청지기는 현명한 투자법을 배워야 한다. 현명한 투자법을 배우는 것이 그에게 주어진 일이다. 이러한 배움은 성경이 지혜라 일컫는 기량과 미덕을 습득하는 것이고 이 지혜는 바로 선과 악을 분별하는 능력이다. 이러한 능력을 계발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연습이다.
성공적인 결혼 생활은 두 명의 배우자가 서로에게 신실하여 선하게 대하며 함께 좋은 부모가 될 때 가능하다. 이것은 당신이 자신을 위해 예정된 "바로 그" 배우자를 성공적으로 찾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성공적인 결혼의 열쇠는 결혼서약을 지키는 것이지 예정된 "배우자"를 찾는 것이 아니다. 단 하나의 최고의 배우자감은 없다.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함께 만들어갈 수 있는 좋은 배우자감과 결혼을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올바른 의사결정을 위해서는 올바른 질문이 필요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 기도하지 않아도 된다. 대신 선악을 분별하기 위해 기도해야 한다.
5. 동기가 올바른지 염려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선한 것에는 여러 가지 다른 동기들이 섞여 있다. 선한 동기와 악한 동기, 또한 그중 많은 동기들은 불분명할 뿐 아니라 서로 뒤엉켜 있기도 하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이웃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그릇된 동기로 이웃의 유익을 구하는 것은 아닐까 염려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것이다. 이웃에게 유익한 것을 찾기란 쉽지가 않다. 때문에 우리는 지혜를 구해야 한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에 순종하는 사람은 이 때문에 지혜를 구하라는 명령에도 순종하게 된다. 지혜가 없는 사랑은 맹인과 같고 또한 선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기적이지 않겠다는 각오만큼 자기중심적인 것은 없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진심으로 고백할 때, 그 사람의 마음은 나도, 심지어 사랑도 아닌, '당신'에게 집중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가 사랑하는 것이 우리의 동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이웃 때문이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강력한 동기는 자신이 사랑이 많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무를 행하는 것이다. 의무감이 아닌 사랑으로 선한 것을 행하겠다는 각오는 죄의식으로 종결되기 십상이다.
의무의 개념을 대체한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만 한다는 생각이다. 이러한 개념의 저변에는 그리스도인들만이 이웃에게 사랑과 친절과 선을 베풀 수 있다는 집단적 자기애와 자기의가 깔려 있다. 이것은 도덕적으로도 말이 되지 않고, 자아상에 대한 심리적인 염려로 보는 편이 옳다.
죄의식에 사로잡힌 자기애와 올바른 동기에 대한 집착은 우리가 정말로 관심을 쏟고 있는 대상이 그들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며 또한 우리 마음속에서 찾고 싶어하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기심을 이웃이 모르고 있을 거라고는 절대로 생각하지 마라!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을 위선자로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가 여기에 있으니 말이다.
우리가 악하고 사랑이 없는 우리의 이웃들과는 다른 사람들이라고 강조함으로써 기독교를 더욱 매력적인 종교로 만들려고 하는 시도를 할 때 비그리스도인들이 우리를 자기의에 사로잡힌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다!
회개를 통해 우리는 마음속에 올바른 동기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 그러한 자유가 우리에게 유익한 것은 이것이 우리의 부패한 마음을 정직하게 상대해서 참된 자기 이해라는 쉽지 않은 여정을 위한 첫 걸음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서 기쁨을 누리는데, 이는 사랑이 이기적이지 않게 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근본적으로 말이 안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가 인생에서 필요한 모든 선한 것들을 포함하여 하나님에게 있는 모든 선한 것을 구하는 것이다.
사랑은 자신을 위함이 아니라 상대를 위함이다. 기쁨이 있다면 좋겠지만 기쁨이 사랑에 필수 요건은 아니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미덕을 위한 중요한 훈련이 된다.
우리 자신의 마음과 그것의 동기에 집중해서는 이 새사람을 절대 찾을 수 없고 우리의 시선을 그리스도와 그 안에 있는 형제자매와 이웃에게로 돌릴 때에만 가능하다.
6. 머리가 가슴이 따로 움직이지 않는지 근심하지 마라.
지성을 마음과 분리된 다른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된다. 너무 많이 생각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그리스도인 학생들이 너무나도 많고 그러한 염려의 배후에는 생각이 마음에 유익하지 않다는 두려움이 깔려 있다. 새로운 복음 역시 우리가 지나치게 사고하는 것을 경계한다. 우리가 비평적으로 사고하지 않아야 쉽게 우리를 미혹하고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우리 역시 느끼고 싶어하게끔 압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지나친 생각이라는 것이 아예 없다. 따라서 존재하지 않는 것을 두고 염려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마음껏 느끼고 마음껏 생각하는 것이 옳다. 거기에는 지나침이 없다. 우리가 주의하고 염려해야 할 것은 거짓되고 경솔하고 어리석은 생각이며 악하고 교만한 감정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지나친 사고와 감정이 아니라 악한 사고와 감정이다.
감정을 통해 우리는 사물을 다르게, 많은 경우는 더욱 제대로 볼 수 있게 된다. 긍휼이라는 감정은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더욱 선명히 볼 수 있게 하며, 분노는 불의의 끔찍함을 느끼게 하고, 자녀를 향한 기쁨은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로 그들을 인지하도록 한다. 어떤 경우에는 느낌이나 감정이 이성보다 한 발 앞서서 타인의 고통이나 불의의 끔찍함 같은 진실을 인지하게 한다. 이성의 임무는 감정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에 대해 생각하고 이해하며 주의를 기울이고 감정이 인지하는 진리를 분별하는 것이다. 비평적 사고의 목적은 내가 보고 싶은 대로 실재를 왜곡해 보지 않고 있는 모습 그대로 세상을 보며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다. 비평적 사고가 우리의 생각을 억제하기보다 더욱 날카롭고 분명하게 다듬어가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고 이것은 감정에서도 마찬가지다.
내가 분노하는 진짜 이유를 거짓말로 정당화하기보다 그것을 인정하고, 이를 위해서 먼저 이성적인 생각으로 자신을 가장하고 있는 내면의 생각을 넘어서야 한다.
피상적이지 않은 지식은 우리의 생각, 감정, 사랑, 행동과 같은 마음의 습관과 깊이 연결되어 있는 지식이다. 훌륭한 교육은 절대 "머리로만 아는 지식"에 머무르지 않는다.
오늘날의 새로운 복음이 섬기는 것은 소비주의 종교인데 이 신학의 목표는 진리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시장 점유율의 상승, 즉 사람들이 자신의 교회로 와서 떠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을 위한 가장 경제적이고 손쉬운 방법은 교회의 다양한 오락적 측면을 이용해 사람들을 끌어모은 후 그들이 다른 사람들과 같은 감정과 경험을 공유하지 않는 것에 대해 죄의식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그래야 사람들이 교회의 여러 프로그램에 참여해야 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일 사람들이 비평적으로 사고하기 시작한다면, 즉 자신이 듣는 내용 중 얼마가 진실일까를 생각하기 시작한다면, 이 모든 것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소비주의는 소비자가 지나치게 생각하는 것을 절대로 원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분이다"라는 주장은 소비주의와 완벽한 짝을 이룬다. 질문 자체를 봉쇄하기 위한 가장 부드럽고 친절한 대답은 "하나님은 원래 설명할 수 없는 분이야. 네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해"가 될 것이다. "봉쇄"의 전략과 배후에는 염려와 두려움이 깔려 있다. 그런 자유가 없을 때 질문은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질병이 되고, 젊은이들의 지나친 생각을 만류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 된다. 즉 교회는 "머리가 가슴으로부터 분리되지 않도록 주의하라", "지나친 논리를 경계하라"하고 경계하며,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는 분"으로 묘사하는 것이다. 신앙에 대한 질문을 회피할 때 우리 마음은 기독교 신앙을 허구로 생각하게 되고 심지어 기독교 신앙이 참이라는 감각 자체를 잃게 된다. 이것은 신앙을 수호하기 위한 바람직한 전략이 될 수 없고 내가 이것을 비평적인 사고보다 훨씬 위험한 것으로 말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진리에 대한 사랑은 참된 미덕이며 우리 마음의 핵심이다. 이것은 쓸데없는 호기심이나 지적 교만이 아니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 옳고 다른 사람이 틀린 것을 증명하기 위해 애쓰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이 틀렸을 때 오류를 발견하게 된 것을 기뻐한다. 그것을 통해 자신이 진리에 한 걸음 더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7. 항상 변화를 경험할 필요는 없다.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경험이 아니라 작은 씨앗이 큰 나무가 되어 자라고 든든한 기초 위에 집이 세워지듯이 그리스도 안에서 남은 인생 동안 성장해가는 것 뿐이다. 성장의 과정은 느리고 길며 또한 고되다. 이것은 순간의 경험이 아닌 일생의 과업이다. 어느 한 순간, 어떤 모임이나 경험을 통해 일어나는 사건이 절대 아니다.
사랑은 지속적인 삶의 방식이며 우리 마음속 사랑의 존재는 기독교 교리를 빌어 표현한다면 미덕, 즉 지속적인 감정, 생각, 선택, 행동, 인식의 양식이다. 사랑은 이 모든 것을 포함한다. 사랑은 다음의 모든 것을 포함하는 습관이다. 그러고 싶지 않을 때라도 당신은 자녀들을 돌보듯이, 가장 먼저 사랑은 행동이다. 또한 애정과 기쁨을 선사해주기에 사랑은 감정이며, 자녀들보다 당신이 그 아이들에 대해 더 잘 알고 있기 땜누에 사랑은 인식이다. 피곤한 때에도 잠자리에서 일어나 자녀들의 방으로 향하도록 하기에 사랑은 선택이며, 세상 누구에 대해서보다 자녀들에게만큼은 세심하고 신중히 생각하기 때문에 또한 사랑은 사고다.
선한 삶은 한결같은 삶이며, 한결같음이 없이는 절대 참된 사랑을 행할 수 없다.
서로에 대한 혼인 서약과 평생 그것을 지켜가는 것이 성공적 결혼 생활을 위한 열쇠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대로 미래의 감정에 대해서는 약속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사랑과 같은 미덕을 가꾸어가기로 약속하는 것은 가능하다. 우리는 자신의 마음을 훈련시켜 분개를 뒤로 하고 독이 든 감정을 억누르며 선한 감정을 연습하고 계발해야 한다. 그리고 그 같은 훈련은 그러고 싶지 않을 때라도 친절히 말하는 것과 같이 우리의 외부적 행동부터 시작할 수 있다. 감정의 경작은 정원을 경작하는 것과 비슷하다. 정원에 잡초가 전혀 나지 않게 하기는 불가능하지만 그것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은 가능하다. 선한 감정들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도록 돕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올바르게 경작된 감정은 찰나의 변화보다 규칙적이고 평범한 모습을 띤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볼 때 진정한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평범함이다.
당신의 마음이 사랑과 한결같음, 자비, 정직으로 빚어졌고, 그러한 미덕들이 당신에게 평범하게 느껴진다면 당신의 삶은 선한 삶이다. 그리고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이와 같은 선한 삶을 사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이것은 평범하고 지속적인 습관으로만 가능하다. 어려움과 핍박의 순간에도 쉽게 변하지 않는 것이 바로 습관이기 때문이다. 나치 시절 안네 프랑크와 그의 가족을 도와준 이들이 좋은 예인데, 이들은 자신들을 영웅으로 생각하지 않고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다고 믿었다.
장기적으로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은 "삶을 변화시키는" 한두 편의 설교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반복된 가르침과 설교다. 매주일 그것이 반복될 때 우리가 그리스도를 계속해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8. 항상 기뻐하고 있는지 염려하지 마라.
세상에는 고통이 존재하고 그 고통에 참여하는 것이 우리의 소명이라는 사실을 솔직하게 말할 광고주는 없다. 우리 주님은 풍성한 삶을 약속하셨는데(요10:10) 자신의 삶이 풍성해 보이지 않을 때 우리는 "도대체 나의 문제는 뭘까?"하고 고민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모든 문제와 슬픔에도 불구하고 마음 깊은 곳에서 기쁨을 경험해야 한다는 개념은 비성경적이며 사회적 압력으로 작용해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그리스도인은 항상 마음 깊은 곳에서 기쁨을 경험해야 한다는 생각은 잔인하기 그지없는 생각이다. 고통 받는 사람을 위로하고자 하는 사람을 순식간에 고문하는 사람으로 바꾸어버리는 이러한 생각 자체가 잔인하다는 말이다. 이미 고통 중에 있는 친구에게 그가 고통 받는 것은 그리스도인답게 살지 못한 까닭이라는 죄의식을 더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십자가를 지는 것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다.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사도 바울의 권면이 강요 혹은 정죄로 변질되어 기쁨으로의 초청이 아니라 그렇지 않으면 큰일 난다는 식의 요구로 전락한 것이다.
누군가 울고 있다면 우리는 그들과 함께 울어야 한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12:15)"
성경에 비추어볼 때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에게 쏟아 놓는 불평은 소망의 행위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자신의 편인 양 자기 세계관을 따라 욥을 괴롭게 했던 친구들의 잘못만은 분명히 지적하신다. 고통 받는 자들과 함께 기다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인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위로는 고통받는 자와 무력하나마 함께 침묵하는 것이다. 말로 호전시키기 어려운 상태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바로 지혜다. 우리의 말이 때로는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것처럼 상태를 더 악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상대의 고통 속으로 들어가 그 고통을 나눌 수 있다. 동정과 연민은 누군가의 고통을 함께한다는 의미이며 이 두 가지 미덕은 우리가 누군가를 위로할 때 꼭 필요한 것이다. 예수님이 못 박히신 십자가도 이와 같아서 그 십자가를 내려놓을 수도 없었으며, 고통 받는 것 외에는 다른 무엇을 할 수도 없으셨다. 가장 혹독했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은 우리가 고통을 경험해도 괜찮다는 것이다. 고통에 대해 그 무엇도 할 수 없는 때가 분명히 있고 그래도 괜찮다. 우리 인생이 힘겹고 고통스러운 것은 우리의 잘못 때문이 아니다. 문제는 우리가 아니라 고통이다. 주어진 고통을 덜어내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더라도 괜찮다. 하나님이 우리의 힘겨운 고통을 어서 끝내주시기를 소망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때가 분명 있다. 그러나 욥이 까닭 없이 하나님을 섬길 기회를 얻었던 것처럼 우리 역시 그와 같은 기다림을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다. 반대로 고통 받는 자에게 연민을 베풀고자 할 경우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변호하는 사람이 바로 그들일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상대의 삶을 변화시키고 상대를 돕고 그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야 한다는 광고 문구들을 이제는 그만 버려야 한다. 다른 사람이 고통 받는 목적이 우리 자신을 훌륭한 그리스도인으로 증명하는 것일 수는 없다. 욥의 친구들처럼 고통 받는 사람들의 곁에서 하나님과 자신이 친밀하다는 사실을 증명하려 애쓰는 그리스도인들은 고통 받는 사람들의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뿐이다.
인내의 미덕을 방해하는 적들은 무수히 많다. 이해하기까지의 기다림을 꺼리는 지적 조급함도 그 중 하나다. 성경은 지혜롭게도 악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전혀 제공하지 않는다. 고통이 끔찍한 것은 우리가 고통의 의미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외치신 놀랍고 신비한 말씀도 같은 맥락이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6)"
우리에게 해답은 없지만 소망은 있다. 악의 문제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해답의 자세한 내용이 아니라 해답의 구조다. 우리 주의 나라가 임할 때, 억압 가운데 짓눌리고 고통 가운데 생을 마감해야 했던 모든 사람들과 학대받았던 어린아이들은 "하나님이 제게 주신 인생은 선한 것이었습니다"라고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이다.
9. 설교가 꼭 실천적일 필요는 없다.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를 돕기 위한 최선의 설교는 신부가 아닌 신랑에 대한 설교다.
복음이 설명하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얻느냐"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구원하시느냐"다. 복음 선포는 한 거지가 다른 거지에게 어디로 가면 떡을 얻을 수 있는지 설명해주는 것이 아니다. 한 거지가 다른 거지에게 직접 떡을 건네는 것이다.
10. 경험적 믿음이 기독교 신앙에 필수요소는 아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우리의 경험이 아니라 그리스도시다. 기독교의 믿음과 경험은 그리스도에게서 나오며, 믿음과 경험 모두를 위해 우리는 에수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책을 다 읽고 드는 생각은, 더더욱 사람들에게 권할 만한 책이라는 것이다.
교회를 다니는 분들이라면 꼭 한번 이 책을 읽어보시길 강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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