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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사5적 시리즈

재도담 2013. 7. 21. 21:20

페친 권태호님의 글을 퍼온 것. 


내가 만난 계사5적

민주당이 만든 용어를 그대로 쓰는 게 부담스럽긴 한다. 민주당이 이번 국정원 사태와 관련된 정부와 새누리당 주요 인사들에게 ‘을사 5적’에 비유해 ‘계사 5적’이란 이름을 붙였다. 다소 과도한 측면은 있다. 한나라당, 이명박 청와대, 정치팀장을 맡으면서 지금 ‘계사 5적’으로 불리는 이들을 만난 적 있다.

1편 원세훈
국무회의 등에서 마주친 것을 제외하고, 한나라당을 출입하던 2007년 가을, 딱 한 번 함께 밥을 먹은 인연 밖에 없다. 그때 원세훈은 서울시 부시장을 떠나 이명박 대선 후보 캠프의 일원이었다. 별다른 직책이 없을 때였다.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잘 기억이 안나지만, 은근히 자기 자랑을 늘어놓았던 것 같다. “이(명박) 시장이 가끔 나를 혼낼 때, ‘자네는 학교는 좋은데 나와가지고, 왜 그래?’라고 한다”며 웃었다. 그는 서울 법대를 졸업했다. 그리고 이명박 전 대통령은 명문대 나오고, 집안 좋고, 얼굴 잘 생긴 사람을 좋아한다. 원세훈이 명문대를 나온 것은 맞고, 집안이 좋은지는 잘 모르겠고, 얼굴은 노코멘트.
어쨌든 이명박 시장은 서울시에 오자마자, 원세훈 원장을 등용했고 그를 무척 신임했다. 원세훈의 고향은 경북 영주다.
그날 원세훈은 조그만 민간기업체를 운영한다는 머리가 반쯤 벗겨진 원세훈보다 더 나이들어 보이던 후배라는 사람 한 명을 밥자리에 함께 데리고 왔다. 그날 나는 한나라당을 출입하던 후배와 함께 나가,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만두집에서 4명이 밥을 먹었다. 밥값은 대략 4만원 정도 나왔을 것이다. 원세훈 전 원장이 데려온 후배가 밥값을 냈다. 그 후배는 밥자리에서 거의 말이 없었다. 나중에 누가 말했다. “원세훈은 밥 먹을 때, 아무리 금액이 적어도 늘 누군가를 데리고 나와(그 사람이 밥값 내)”라고. 할 수만 있다면, 목구멍에 손가락을 집어넣어 그때 먹은 만두를 토하고 싶다.
  
원세훈은 서울대 재학시절인 1972년 현역 판정을 받았고, 1973년 행정고시에 합격했다. 1974년 경찰병원에서 실시한 공무원채용 신체검사에서 치아를 포함한 모든 분야에서 합격 판정을 받았다. 그런데 같은 해인, 1974년 병무청 신체검사에선 보충역 판정을 받았다. 그리고 입대를 미루다 1976년 턱 관절염으로 면제 판정을 받았다. 군대를 제때 갔으면, 턱 관절염 생기기 전에 제대했을텐데, 고시 합격했으니 장교로 입대하니까 웬만한 사람이면 그냥 군대 갈텐데, 턱이 많이 아팠나보다.
 
당시 행정고시 합격자의 희망 1순위는 내무부였다. 원세훈도 처음 내무부에 소속됐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서울시청으로 발령받았다. 이유는 알 수 없다. 서울시 당시 원세훈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원세훈은 성실하고 맡은 바 일을 잘했다고 한다. 윗사람이 시키는 일은 반드시 이뤄내는 사람이었다. 마찬가지로 아랫사람한테도 시키는 일을 반드시 이뤄내는 위아래 혼연이 일체된 사람이었다고 한다. 또 윗사람이 자신을 무시하거나 못살게 굴어도 크게 개의치 않았고, 마찬가지로 아랫사람을 무시하거나 못살게 굴어도 개의치 않았다 한다. 윗사람은 원세훈을 무척 좋아하고, 아랫사람은 원세훈을 몹시 싫어했다. 이런 경향은 원세훈이 공직을 떠나는 순간까지 계속 됐다.
 
국정원에 가자마자, 원세훈이 한 일은 대대적인 인사이동이었다. 정보를 담당했던 사람들을 관리 부서로 보내고, 정보를 한 번도 다뤄보지 못했던 사람들을 정보 쪽으로 스위치했다. 기존 조직의 힘을 빼, 조직을 단숨에 장악하기 위한 게 목적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자신이 서울시에 있을 때, 서울시를 출입했던 국정원 인사들을 등용했다. 국정원 내부에서 조심스런 반대 의견이 나왔다. “그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라고. 그러자, 원세훈은 불같이 화를 냈다 한다. ‘기득권의 반발’로 본 것이다. 그리고 그런 반대자를 지방으로 좌천시키거나, 아예 잘라 버렸다. 공포정치다. 이후 국정원에서 원세훈이 하는 일을 반대하는 이는 사라졌다. 그러나 속으로는 “서울시에서 수도꼭지(원세훈은 상수도본부장을 오래했다) 만지던 사람이 와 가지고 뭐 하는 짓인가?”라는 불만이 쌓여갔다. ‘정보 업무’는 오랜 시간과 숙련된 과정이 필요한 것인데, 원세훈은 이를 몰랐거나 무시했다.
얼마 안가, 2011년 국정원 요원들이 롯데호텔에서 무기구입을 위해 온 인도네시아 특사단 숙소에 잠입해 노트북을 뒤지다 딱 걸려 붙들리는 X망신을 당했다. 원세훈이 아니라, 대한민국이. 그때 특사단 숙소에 잠입한 사람들이 다 정보를 처음 다뤄보는 초짜들이었다. 우리 정부는 인도네시아 정부에 사과했다. 원세훈은 아무런 사과도 하지 않았고, 이명박 대통령은 원세훈 국정원장을 자르지 않았다. ‘댓글’은 그때의 일을 만회하기 위한 발버둥이었을까?

정치팀장을 맡고 있던 지난해 말, 대선이 막바지로 접어들었을 때, 정치팀 후배의 보고 하나가 올라왔는데, “국정원이 바깥에 사무실을 두고, 팀을 짜서 대선 관련 글을 익명으로 올리고, 댓글도 단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증거는 없고, 뭔가 불명확했다.
처음 그말을 들었을 때, 잘 안 믿었다. 기사가 나갔지만, 기사가 성겨 반향이 약했다. 아마 독자들도 나와 비슷한 생각이었나보다. 뭔가 다소 과장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국정원이 하는 일이라 하기엔 너무 쪼잔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아마, 국정원의 한 (중간간부급) 찌질이가 애들한테 참 웃기는 일 시켰구나’라고 생각했지, 그 ‘찌질이’가 국정원장이라고는 차마 생각 못했다.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후배에게 미안하다. 내 빈곤한 상상력이 원세훈의 원대한 상상력을 감히 따라잡지 못했다.
 
(*)글이 너무 길어져, 나머지 사람들에 대해선 나중에 올려야 할 것 같습니다.


2편 김무성

한나라당을 처음 출입했을 때, 다들 김무성 의원을 보고 ‘무대’라고 불렀다. 의아했다. ‘무대’란, <수호지>에 나오는 좀 모자란 인물로, 희대의 요부였던 아내 반금련에 의해 독살당하는 캐릭터인데…. 앞니빨 2개가 툭 튀어나온, 서세원 닮은꼴인 만화가 고우영의 그림으로 더 유명한, 왜소하고 착하고 어리벙벙한 ‘무대’와 기골이 장대한 김무성 의원과는 잘 매치가 안 됐다. 오히려 호랑이를 맨손으로 때려잡는 무대의 동생 ‘무송’이 그의 별명이어야 할 것 같은데…. 나중에 얘기를 들으니, ‘무대’란, ‘김무성 대장’의 준말이라고 했다. 그런데 좀더 나중에 들으니, 알고보니 ‘무대뽀’의 준말이라고도 했다.
이제와 보니, 김무성에게는 ‘무송’과 ‘무대’가 같이 들어있는 것 같다.

김무성은 시원시원하고 거침없고 사내답다. 목소리도 크고 우렁차고, 말도 걸다. 2007년 이명박-박근혜의 한나라당 경선이 치열하던 와중, 친박계 좌장이던 김무성 의원과 김기춘 전 법무장관(92년 초원복집 사건의 주인공)과 함께 밥을 먹을 때였다. 당시 경선은 이미 이명박 후보에게로 추가 기울어 박근혜의 역전 가능성은 희박할 때였다. “내가 박근혜가 좋아서 박근혜 지지하는 것 아니다. 이번에 정권교체 해야하는데, 이명박으로는 안된다”(김무성)
“이명박이 왜 안되냐? 본선 경쟁력은 솔직히 이명박이 더 낫지 않나?”(기자들)
“이명박은 약점이 많다. 민주당 저놈아들이 어떤 놈들인데, 한 방에 간다. 이명박 되면 본선에서 진다. 내가 확신한다”(김무성)
기자들 대부분이 별반 동의하지 않았지만, 김무성은 너무나 진지하게, 정색을 하고 말했다. 속으로만 생각했다. ‘바보 아냐?’

  
1. 맘 약한 김무성
김무성은 부잣집 도련님 출신이다. 아버지가 1953년 전남방직을 설립했고, 형 김창성이 지금도 이를(전방) 경영하고 있다. 김무성은 25살(1976년)때 동해제강 상무를 했고, 31살(1982년)때 삼동산업 대표이사를 맡았다. ‘소년 급제’한 사람의 주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가, 조심성이 없다는 것이다. 한번도 남 눈치보며 살아온 적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김무성은 조직적 사고는 떨어지는 반면 경험은 풍부하고 정보는 많아, 정리되지 않은 콘텐츠가 여기저기 뒤섞여 있는데, 거침없는 성격과 맞물려 말실수가 잦을 수 밖에 없다.
정치에 뛰어든 뒤에도 42살(1993년)때 김영삼 정부에서 민정수석을 했고, 43살(1994년)때 내무부 차관을 했고, 45살(1996년)때 국회의원(15대)이 되어 지금까지 내리 5선(15~19대)을 했다. 한때 본인의 원내대표 선거에서 번번이 떨어지긴 했고, 김영삼(87년), 이회창(2002년), 박근혜(2007년) 등 자신이 모시던 주군의 대선 패배를 몇 차례 경험하긴 했지만, 김영삼(92년), 박근혜(2012년) 등 2명의 대통령 탄생에 한몫했다.
본인은 어떻게 말할 지 모르지만, 바깥에서 보기엔 거의 시련이 없었다.
 
아마도 첫 시련이 2008년, 친이명박계에 의해 진행된 공천 탈락이었을 것이다. 무소속 출마를 결정한 직후, 그에게 전화를 건 적이 있다. “김 선배, 힘내십시오”라고. 그때, 김무성은 풀이 죽은 목소리로 “그래, 고맙데이. 마이 밀어도고”라고 했다. <한겨레> 기자가 뭘 얼마나 밀어줄 수 있을까마는, 평소 큰소리 뻥뻥치던 김무성과는 많이 달라 애잔함까지 느껴졌다.
 
김무성이 수많은 실수에도 불구하고, 윗사람보다 아랫사람들이 더 그를 좋아한다는 건 그의 큰 장점 가운데 하나다. ‘대장’이란 이름이 그저 붙은 건 아니다.
지난해 그가 새누리당 총괄선대본부장을 맡자, 많은 당직자들이 이를 환영했다. 이전에 당 선대위가 워낙 오합지졸, 중구난방의 연속인데다, 누구도 책임지지 않으려 하기에 당직자들의 몸고생, 맘고생이 워낙 심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무성이 오자마자, ‘일찍 출근하고, 회의 늦지 말고, 밤에 술 마시지 말고’라고 군기를 딱 잡은 뒤, “박근혜 후보한테는 내가 얘기한다. 내가 책임질테니 해라”라고 했다. 그리고 선대위 사무실에 야전 침대를 놓고 본인이 거기에서 잠을 잤다. 그가 오면서 선대위가 기능적으로는 제대로 굴러가기 시작했다.
 
그는 또 아랫사람을 쉽게 내치지 않는다. 아랫사람이라고 보긴 그렇지만, “형님” 문자로 창피를 입은 김재원 의원이 만일, 그의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입수와 관련해 이를 바깥에 알린 ‘진범’이었다 하더라도, “형님, 제가 잠시 돌았나봅니다”라고 머리를 조아리면, 아마도 “그래, 고마 됐다. 우야겠노? 이제부터라도 잘 해보자. 앞으로 또 그카지 말고”라고 역시 어깨를 툭툭 치고 말았을 것이다.
  
한 마디로 모질지 못한 것이다. 정치인으로선 장점이자, 약점이다.

김무성이 가장 자랑스러워 하는 경력은 그가 1987년 6월, 민주화운동을 했다는 것이다. 기업을 경영하던 그는 1983년 김영삼(YS)을 찾아갔다. 그해, 김영삼은 전두환 독재에 항의해 단식투쟁을 벌인 바 있다. 김무성은 그때부터 이후 김영삼을 줄곧 따랐다. 최근 <임을 위한 행진곡> 논란에서 새누리당 인사로는 처음으로 “<임을 위한 행진곡>이 뭐가 문제냐”고 김무성이 나선 것도 그 시절에 대한 자긍심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상도동계의 막내였던 김무성이 가끔씩 들려주는 YS 일화도 재미있었다.
“민주산악회 때, YS랑 고기 먹을 때는 조심해야 한다. 입에 하나 씹고 있고, 젓가락으로 고기 하나 불판에 눌러서 찜하고 있고, 눈으로 다음에 먹을 고기 보고 있다. 그런데 눈치없는 녀석이 YS가 다음에 먹으려고 보고 있는 고기를 낼름 집어 먹으면 큰일난다”

“총무수석 홍인길이 시내에서 멸치회를 먹다가, 멸치회를 좋아하는 YS가 생각나서 멸치회를 포장해서 청와대로 가져갔다. 그런데 멸치회는 금방 상한다. YS가 그날밤 토사곽란으로 밤새 화장실을 들락날락했다. YS가 ‘인길이 이 노무 자슥이 날 암살하려 한다. 인길이 잡아온나’라고 했다. 홍인길 수석이 놀라서 1주일 가량 아예 수석회의에 참석하질 않았다. 그리고 가슴을 조마조마하며 오랜만에 회의에 참석했더니, YS가 ‘어, 인길이 니 안 보이데, 어데 갔었나?’라고 말하고 예전 일은 다 잊어버렸더라”

“YS는 해외순방 가서도 조깅을 거르지 않았는데, 한번은 그 나라 대통령과 함께 조깅을 하게 됐다. 그러면 대충 천천히 뛰고 사진만 찍으면 되는데, YS가 평소처럼 막 달려 여기에 보조를 맞추려고 그 나라 대통령이 무리하다가 나중에 쓰러졌다” 

김무성에게서 가끔 YS가 언뜻언뜻 보인다. 청와대 수석회의에서 늘 졸면서도 여야관계를 매끄럽게 했던 유인태 의원(민주)이 전형적인 허허실실(虛虛實實)형이라면, YS는 허허허허(虛虛虛虛)형, 김무성은 실실허허(實實虛虛)형에 가깝다. 

 
2. 말실수
김무성의 가장 주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다. 몇 가지만 추려보면,
 
2002년 대선, 이회창 대선후보 비서실장을 맡을 당시, 장상 총리서리를 향해 “대통령 유고시, 국방을 모르는 여성 총리가 직무 제대로 수행할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여성계가 크게 반발하면서 선거 악재로 떠오르자, 비서실장직을 물러났다. 

2010년 5월 지방선거 당시, 한나라당 중앙선대위 부위원장을 맡을 당시, 경남 함안 유세에서 “기초의원 선거, 아버지는 1-가 찍고, 엄마는 1-나 찍고, ‘아새끼’는 1-다 찍도록 훈련 잘하시기 바란다”고 말했다. 이 지역에서 한나라당 후보가 가, 나, 다 등 후보 3명이니 표를 골고루 받아서 3명 다 합격할 수 있도록 하는 전략을 유권자들에게 설명하는 과정이었다. 지역 폄하 발언으로 분위기가 험악해지면서 함안 지역 인사 8명이 한나라당을 탈당했다. 김무성은 사과문을 발표했다. 

2011년에는 한나라당 최고중진연석회의에서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 반대 시위를 두고 “입으로는 평화를 외치지만 사실상 김정일 정권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고 있는 종북세력들이 대부분이다”라고 말해, 강정마을 주민들로부터 손해배상 소송을 당했다.
 
지난해 대선 당시인 9월에는 김해공항에서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여러분들이 속고 있다. 노무현은 6월 항쟁에 참여 안했다”고 말해, 노무현재단과 민주당으로부터 거센 반발을 받았다. 아스팔트 위에 주자앉아 ‘퇴진 노태우’란 어깨띠를 걸고, 경찰들과 홀로 대치하고 있던 87년 당시 노무현의 모습이 찍힌 사진이 공개되기도 하는 등 ‘역풍’을 맞았다.
 
또 역시 지난해 10월에는 당 선대위 회의에서 뜬금없이 “부유세를 도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통합진보당도 조심스러워하는 공약이다. 당시 “복지는 무한정 해주되, 세금은 더 안 걷는다”고 말한 박근혜 후보의 말과도 배치된다. 논란을 빚자, “개인적 사견일 뿐이다”며 걷어들였다. 당시 김무성의 직책은 새누리당 중앙선거대책위원회 총괄본부장이었다.
 
또 하나 있다. 박근혜와 척이 져 있던 김무성이 대선 막판, SOS 신호를 받고 선대위 총괄본부장으로 임명되면서 200명 당직자들에게 “내가 1인당 10만원씩 줄테니, 맛있는 거 사먹으라. 그리고 열심히 일하자”고 해 박수를 받았다. 그런데, 이게 알고보니 선거법 위반이었다. 그래서 접었다.
 
박근혜와 척이 진 것도 따지고 보면, ‘말’ 때문이다. 지난 5월25일치 <동아일보> 기사 내용 중 일부다.
2007년 경선 당시 경남지역 언론사 편집국장·보도국장 초청 저녁 모임. 
김무성=“대표님, 돈이 다 떨어졌습니다.”
박근혜=“….”
김무성=“(박 대표의) 삼성동 집을 부동산에 알아보니까 한 20억 원쯤 간다고 합디다. 그거 팔고 아버지하고 살던 예전 신당동 집으로 들어가십시오. 일주일이면 집을 고칠 수 있다고 하니…. 신당동 들어가면 (박 대표의) 이미지에도 좋습니다. 당선되면 (집 문제는) 어떻게든 풀릴 겁니다. 떨어지면 내가 전셋돈 마련해주겠습니다.”
박근혜=“(점점 표정이 일그러지면서) 제가 언제 돈 쓰라고 했어요? 돈 쓰지 마세요!”
김무성=“그래, 됐습니다. 고마 치아 삐리소!”
    
그리고 지금까지의 말실수 가운데 가장 큰 것이 지난달 26일 당 최고중진연석회의에서 지난 대선 당시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이미 읽어봤다고 스스로 실토한 것이다. “지난 대선 때 이미 내가 그 대화록을 다 입수해서 읽어봤다. 몇 페이지 읽다가 손이 떨려서 다 못 읽었고, 12월14일 부산 서면 유세 때 울부짖듯이 이를 읽어내려갔다”고. 논란이 커져 기자들이 ‘서면 유세 때 발언과 국정원 발췌본이 굉장히 유사하다’고 하자, 
“그게 왜 같은지 나도 잘 모르겠다” 김무성의 말이다.
어떻게 하면 이런 해명을 할 수 있을까? 얼마나 사람들을 우습게 보면….
그러나 이런 말을 한 사람이 김무성이라면 이해가 안 가는 바도 아니다.
 
  
(*)역시 너무 길어져 나머지 편은 다음에 올리겠습니다. 페이스북에 1편을 올린 뒤, ‘지금 무얼하고 있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별 정보는 없지만, 함께 나눈 대화를 공개하는 게 신의성실에 위배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고, 심각한 상황을 너무 흥미 위주로 희화화하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편을 올리는 이유는 약속한 사항이기도 하지만, ‘국정원의 대선 개입’을 너무도 황당하게 ‘NLL 논란’으로 뒤바꿔 버린 새누리당의 행태에 대한 분노, 그리고 기자로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사회적 저항이자, 책무 때문이라고 정리했습니다.

지금 상황은 마치 집에 물건 훔치러 들어왔다가 딱 걸린 도둑이 “그런데, 돌아가신 앞집 아저씨가 6년 전에 망치로 이 집 담벼락을 두드리는 걸 봤다”고 말하자, 집주인이 도둑은 뒤에 남겨두고 바깥에 나가 담벼락 점검하는 꼴입니다. 담벼락은 지금 그대로이고, 도둑의 말은 거짓말이고. “아닌데”라고 하자, 6년 전 골목길 CCTV를 까고 있습니다. 거기에도 그런 장면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계속 우깁니다. 어느새 도둑은 의로운 고발자, 아니면 찬반 양론의 논쟁자로 변신하고 있습니다.


3편 서상기
지난 2007년 초여름, 이명박-박근혜의 한나라당 경선이 치열해 질 무렵, 타사 한나라당 반장(정당 출입기자 현장팀장격, 여당반장, 야당반장이라 부르기도 한다)들 몇 명과 서상기 의원을 처음 만났다. 어렴풋한 기억에 당시 캠프에 막 들어갔던 이정현 선배(현 청와대 홍보수석)가 자리를 마련했고, ‘꼭 나오라’고 채근했던 것 같다. 
여의도의 한 식당이었다. 분위기는 괜찮았다. 서 의원은 시골 면장처럼 수더분했고, 정치인들에게 흔히 보는 가식이나 허세도 없었다. 과학계에서 일가를 이룬 사람이었지만, 퍽 겸손했다. 자신의 지난 삶을 이야기할 때도 자랑을 늘어놓는다는 느낌을 받지 않았다. 예의가 몸에 밴 사람이었다. 독한 말을 할 줄도 몰랐다. 늘 만나던 여늬 정치인들과 달랐기에 오히려 신선했다. 그날 경선이나 캠프, 정치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았다. 그때만 해도 서 의원은 ‘이너 서클’이 아니었고, 별 정보도 없었다. 
 
서 의원은 경북중-경기고-서울대 금속공학과-미국 대학에서 재료공학 석·박사 등을 거쳐 81년부터 거의 20년 가까이 한국기계연구소에서 근무하며, 연구원장을 역임한 우리 기계공학계의 주요한 연구자 가운데 한 명이다. 그날 밥자리에선 그가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직후, 70년대 후반 포드 자동차생산기술연구소에서 4년간 근무할 때 고생한 이야기 등 젊은날의 초상들을 나누었다.
인생을 열심히, 성실히 산 분이었다. 그리고 선한 분이었다. 연구소에서 존경받는 선배일 수도 있었을 것 같다. 그렇게 기계만 계속 연구하셨어야 했는데….
 
인생의 비약인지, 굴절인지 알 수 없으나 그는 2002년 대선, 이회창 후보 정책특별보좌역을 맡는다. 고향이 대구였기에 그의 선택은 자연스러워보인다. 이런 정책보좌역은 사실 ‘구색 맞추기’로 이름만 올릴 뿐, 별반 하는 일은 없다. 연구자를 떠난 제2의 인생을 정치로 잡았나보다. 어쩌면, ‘정치’ 그 자체보다는 집권할 경우, 과기부 장관 정도를 염두에 뒀을 가능성이 더 높다.
2004년 이때의 연이 작용했는지, 그는 비례대표로 국회의원이 된다. 59살 늦은 나이였다. 그는 정치적 지략이 뛰어난 것도 아니고, 정치적 리더십을 발휘할 위치에 있지도 않고, 자신만의 정치철학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정치적 경험도 없고, 계파의 일원으로 바닥을 기기에는 나이도 너무 많다. 이런 경우, 보통 국회의원 비례 한 번으로 끝난다.
그런데 그는 벌써 3선이다. 그의 공천 이력을 보면 참 절묘하다. 2004년 탄핵정국 와중에 정치색 없는, 이공계 출신의 비례대표 입성은 수월했고, 2008년 친이(이명박)계에 의한, 친박계 공천학살(?)이 자행될 때, 김무성 유기준 김재원 박종근 이인기 등 친박계 의원들이 줄줄이 낙천될 때, 서상기 의원은 그 지역 터줏대감이던 친이계의 3선 안택수 의원을 제치고 대구 북을 지역구 한나라당 공천을 받았다. 아무리 이명박 정권 초창기지만, 공천을 싹쓸이할 순 없고, 친박 쪽에도 최소한의 배려는 해야 했는데, 그럴려면 목소리 크고 힘있는 사람은 배제해야 했고, 그렇다고 친이 쪽의 핵심을 제외할 순 없고, 그러면서도 어느 정도 친이가 양보했다는 표를 내려면 중진을 주저앉혀야 했고, 이 모든 조합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면서 서상기 의원은 공천을 받고, 본선에선 압도적 표차로 재선에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서상기 의원의 정치력 발휘, 별로 없었다.
그리고 2012년 공천, 이번에는 친이계의 몰락으로 또 자연스럽게 공천을 받는다.
어차피 대구에서 본선이란 별 의미가 없는 것이고, 3번의 공천(비례대표를 포함해)에서 서상기 의원의 공이 꽤 있을 것이다. 하지만 주변 상황이 참 절묘하게 돌아갔다.

서 의원은 인물이 맑다. 빈 항아리, 백짓장 같다. ‘박근혜’를 ‘서상기’에 들이부으면 그대로 ‘박근혜’가 된다. 
   
지난해 여름 정보위원장을 맡았는데, 본인도, 박근혜 대통령도, 서 의원이 이렇게 국정원 정치개입 국정조사 온몸 막기, NLL 물타기,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공개, 국정원 개혁 모르쇠 등 이처럼 혁혁한 공을 세울 수 있었을런지 몰랐을 것이다. 2007년 경선, 2012년 대선에서 별반 큰 도움이 되지 못했으나, 그 모든 걸 상쇄하고도 남는다. 조금이라도 ‘자기 정치’, ‘국민 눈을 의식하는 정치’를 하려는 새누리당 의원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청와대와 박 대통령은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어차피 대구에선 공천만 받으면 끝이니까, 국민 눈은 신경 안 써도 된다. 대구시장을 염두에 두고 있는데, 이 역시 마찬가지다. 새누리당으로서는 참 다행이다. 서 의원처럼 맑은데다 성실하기까지 한 분이 곁에 있어줘서…. 다행이구나.

(6월20일, 정상회담 대화록 발췌본을 본 직후 연 기자회견)
“노 전 대통령이 엔엘엘 포기 발언은 물론이고, 수시로 김정일 위원장에게 ‘보고드린다’거나 ‘앞서 보고드렸듯이’라는 식의 말을 썼다. 내 말이 조금이라도 과장됐다면 의원직을 사퇴하겠다”
=>그러나 25일 국정원이 공개한 대화록 전문을 보면 “보고드린다”, “앞서 보고드렸듯이”라는 표현은 대화록에 안 나온다. 대신 “보고를 그렇게 상세하게 (북한 김계관 대표가 노무현 대통령에게) 보고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나온다. 서상기 정보위원장은 ‘보고드리다’의 주어가 ‘김계관’인데, 발췌록만 보고 ‘노무현’으로 착각한 것이다.
 
(6월25일 아침, KBS라디오 방송) 
-진행자 : 대화록 전문에 NLL 포기라는 발언은 없지 않습니까?
=서상기 : 그게 제가 늘 강조하는 본말이 전도된 겁니다. 그러면 대통령이 거기 가서 인감증명 떼 가지고, 가서 도장 찍고 와야 포기입니까? 문맥을 보면 포기보다 더한 거죠. 그래서 자꾸 포기라는 단어를 찾겠다고 그렇게 말씀하시면 정말 섭섭합니다.
 
-진행자 : 이렇게 전격적으로 원문이 공개되면서 정상회담 내용이 정쟁에 이용되고, 국제외교상의 신뢰가 떨어지지 않겠냐, 이런 걱정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서상기 : 맞습니다. 그야말로 이게 본말전도입니다. 그 문제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거는 말 중에도 아주 말이고, 이거 본이 어디 있느냐? NLL 포기한 발언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문제를 말끔하게 해명하고 정리하고 사과하고 국민들 안심시키고 넘어가자는 겁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정상회담 하는 자리에서 목숨걸고 지킨 영토선을 포기하는 취지의 발언하는 이런 사례가 100년 전을 거슬러 가도 있습니까? 앞으로 100년 동안 있을 일도 아니고. 거기에 비하면 우리 외교상의 뭐 문제 있는 거는 그야말로, 그런 문제는 거기에 비하면 정말 저는 뭐 바위와 깃털이라는 비교를 했습니다마는.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본문 보시면 뭐 그렇게 북측에서 뭐 그렇게 섭섭해 할 내용은 별로 없습니다. 그거는 NLL은 원래 어떻게든지 포기를 받겠다는 의지가 강했던 거고, 우리는 뭐 거기에 거의 동조하다시피 한 그게 잘못이지 뭐 다른 특별한 건 없기 때문에 외교상에도 생각하는만큼의 큰 파장은 없으리라고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진행자 : 자, 이게 본말전도라고 하신다면 국정원의 정치개입 문제가 본질이고 새누리당이 주장하는 여직원 인권유린과 매관에 대한 의혹제기 역시 본말전도다, 이런 민주당의 지적은 어떻게 받아들이십니까?
=서상기 : 그거는 이제 본하고 말의 무게 차이입니다. 무게 차이인데, 그거는 뭐 보기에 따라서 지금은 본말이라고 하지만은 말이 본보다도 무게가 더 나갈 수도 있고, 그건 보는 입장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뭐 민주당은 민주당대로, 또 뭐 어쩔 수 없이, 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고, 또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서, 또 한 번 목소리를 높여볼 필요성도 있고, 뭐 그런 거는 충분히 이해를 합니다마는, 이제는 민생을 챙길 때입니다.

=>서상기 정보위원장이 당황하신 것 같다. 특히 마지막 질문에서. 서 위원장은 당황하면 ‘뭐’라는 단어를 많이 쓴다.
이날 오후 3시, 서상기 위원장은 NLL 관련 정창래 의원(민주당)과의 맞짱토론으로 열릴 예정이던 ‘100분 토론’을 방송 몇 시간을 앞두고 불참을 통보한다. 이유는 ‘국회 일정’ 때문이었다. 이날 서 위원장의 국회 일정은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공개와 관련된 국회 정보위였고, 정보위는 오후 7시30분쯤 끝났고, 7시40분쯤 관련 브리핑이 있었고, 그 자리에는 민주당 정보위 간사인, 100분 토론 참석 예정자인 정청래 의원과 서 위원장도 나왔다. 정 의원은 그날 100분 토론에 나왔고, ‘국회 일정’을 이유로 불참한 서 위원장은 100분 토론이 열리는 그날 밤 12시25분, 인적끊긴 캄캄한 국회 어느 곳에서 무슨 일정을 어떻게 소화했는지 아는 사람은 없다.
개인적 추측. 이날 서 위원장의 아침방송이 3~4군데 나왔다. 그 내용을 들은 청와대에서 “안 되겠다. 이 정도로 100분 토론 나가면 완전히 밀리겠다”고 보고, 불참을 ‘지시’했을 가능성이 보인다. 그 판단은 비서관급 정도에서 됐을 가능성도 있다.
 
(6월26일 국회 기자회견)
-기자 : 서상기 사퇴얘기 나오는데?
=서상기 : 발언이 전혀 허위가 아니고 단어상의 착오 있다는 것 나도 인정해야죠. 원본 보니까 그야말로 국민 배신하고 굴욕적인 표현, ‘6번이나 시간달라’고 말하는 게 더했으면 더했지 조금도 어긋나는 것 없어. 내가 국가기밀 유출했나요, 뭘 했나요. 기본적인 자세에 국민들 굴욕감 느끼고…. 원문 펼쳐보니까 (NLL 포기) 그 단어 있나 없나는 문제 제기할 수 있지만, 전체 맥락으로 보면 오후에 시간 더 달라고 6번씩이나 구걸하는 행태가 국민들이 볼 때 자존심 상하는 일 아닌가?

서 위원장은 국회 정보위원장이다. 청와대는 다행이다. 국민들은…. 서 위원장은 다음 총선(2016년) 때는 71살이다. 공천을 또 받아 4선이 되는 게 쉽지 않다. 내년(2014년) 대구시장에 나서려 할 것이다. 현 김범일 시장이 가장 큰 경쟁자다. 여의치 않으면, 계속 국회에 남아 4선을 하고, 김 시장이 3연임으로 물러나는 2018년(73살) 지방선거에 나서는 게 생의 마지막 ‘버킷 리스트’일 것이다. 현 김 시장한테는 미안하지만, 제발, 이렇게 혁혁한 공을 세운 서 위원장을 청와대가 내년에 일찍 대구시장 시켜줬으면 좋겠다.
 

4편 남재준

5명의 ‘계사 5적’ 가운데 유일하게 만난 적이 없는 인물이다. 별도로 한 편을 쓸만큼 아는 것도 없지만, 그럴만한 가치도 없는 분이라 그냥 서상기 뒤에 붙인다.
 
육군사관학교를 나와 2005년 육군참모총장을 마지막으로 예편할 때까지 평생을 군인으로 살았다. 청렴결백해서 ‘선비’라는 별명을 얻었고, 부하직원들에게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김장수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의 육사 2년 선배, 김관진 국방장관의 육사 3년 선배다. 군, 무인에 대한 자부심이 상당하다. 연배와 그리고 군의 특성상, 반공과 안보로 무장한 보수 색채가 무척 강하다.

그런데 의구심이 인다. 국정원이 엊그저께 노무현 대통령의 남북정상회담 발언과 관련해 “NLL 포기가 맞다”고 상세하게 해석했다. 이런 보수가 어디 있나? “대한민국 대통령이 NLL 포기 발언한 게 맞다”고 친절하게 친북, 종북 발언을 하다니….
 
지난 6월25일,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공개한 이유로 “야당이 자꾸 공격하니까 국정원의 명예를 위해서 (대화록을 공개)했다”고 말했다. 야당이 공격한 건, ‘국정원 댓글 정치개입’이었지, 몇 년 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공개와 관련해 국정원을 공격한 적이 없었다. 야당의 공격에 대해 국정원의 명예를 지키려 했다면, “댓글 우리가 단 게 아니다”고 하든지, “우리 조직에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게 불명예스럽다. 그런 일을 지시한 사람과 조직을 도려내겠다”고 하든지 했어야지, 웬 ‘물타기’, ‘덮어씌우기’인가?
그래서 내린 결론. 남 원장은 작은 조직에서 작은 명예를 위하게끔 했으면 부하들에게 존경받으며 잘 했을 사람인데, 너무 높이 올라갔다. 대대장 정도하면서, ‘대대의 명예’를 지키게 했어야 했다. 연대장? 아, 힘들 것 같다.
 
그는 2005년 예편 뒤, 대학에서 석좌교수 등을 하며 현직과는 떨어졌다. 2007년, 2012년 대선 때 각각 박근혜 캠프에서 국방안보 특보단장을 맡는 정도였다. 8년만에 부하를 거느린 직책으로 돌아왔다. 군이 아닌, 국정원으로. 적합한 인사가 아니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새 지휘관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2가지다. ‘완벽한 물갈이’, 아니면 ‘기존 조직을 끌어안는 것’. 그는 후자를 택했다. 어쩌면 그런 지시를 받았는지도 모른다. 제대로 아는 조직도 아니고, 무엇보다 ‘댓글 달기’를 다 까발리는 게 명예를 더럽히는 것이라 생각했는지 모른다. 군에서 보통 ‘명예’라 함은 수치를 드러내고 시시비비를 명명백백하게 가리는 것보다는, 수치를 감추고 대신 희생하는 것을 더 자주 ‘명예’라 부르는 경우가 많다. 그는 군에서 하던대로 하고 있다. 조직원을 지키기 위해 노구를 이끌고 전면에 나서 계란을 맞고 있다. 이게 남재준이 생각하는 명예인가?
  
국회 정보위에서 남재준 원장의 말.
-야당 의원 : 노무현 전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 당시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포기한다는 발언을 하지 않았는데, 국정원장이 그런 내용을 봤다면 확인해달라.
=남재준 : (…) 답변하지 않겠습니다.
 
-야당 의원 : 대화록 무단 공개 과정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개입이나 지시가 있었나?
=남재준 : (…) 답변하지 않겠습니다.
 
=>‘거짓말’을 하는 것은 또 명예를 더럽힌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최근 국정원의 모습을 보면, 치부가 드러나니 발악을 한다는 느낌이다.
‘국정원 개혁’ 이야기가 나올 수 밖에 없는 상황인데, 그러면 결국 예산과 조직의 대대적인 축소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국내 조직을 드러내자고 하니, 어찌 가만히 있겠는가? 국내, 해외, 대북 등 국정원의 큰 3대 조직 가운데 가장 힘이 센 곳이 ‘국내 파트’다. 국내 파트를 줄이면, 그들이 해외나 대북으로 이동해서 결국 해외나 대북에 있는 조직이 피해를 보니, 국정원 전체가 맞선다. 어떤 조직에 메스를 들이대려 하면, 어떤 조직도 가만 있지 않는다. 줄이면 안 되는 논리를 펴고, 항의도 하고, 개기기도 한다. 지금 국정원은 눈에 보이는 게 없다. 

지난 2011년 1월 서울 마포구 도화동에서 의사 백아무개씨의 아내 박아무개씨가 만삭의 상태로 욕조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의사인 남편 백씨는 ‘스스로 욕조에서 쓰러져 숨진 것’이라고 말하며 여러가지 이유를 들이댔다. ‘자세 이상으로 인한 질식 사고’로 볼 수 있는 여지가 많았다. 
하지만 경찰이 가장 의심스러워한 대목이 이 지점이다. “만삭인 아내가 사망했는데 슬픔과 충격에 빠지기보다 ‘사고에 의한 자연스러운 사망’이라고 설명하는 데 열중하는 남편의 모습”이었다. 
 
‘대한민국 대통령이 NLL 포기했다’고 음지에서 기어나와, 종북성 방성대곡을 하고 있는 국정원의 모습이 딱 그때의 의사 백씨를 보는 듯하다. 국정원에게는 대한민국보다, NLL보다, 국정원의 명예, 즉 ‘밥줄’이 더 중요하다. 드라마 <너의 목소리가 들려>에서 차 변호사(윤상현)가 20살 박수하에게 모진 말을 내뱉은 뒤, 혼자 자신을 향해 이런 말을 했다. “초조해지니까 바닥을 다 드러내네”라고. 백씨는 20년형을 받았다. 

이런 국정원더러, ‘알아서 개혁하라’고 박근혜 대통령은 밝혔다. 미친 개가 줄이 풀린 채 동네를 뛰어다니며 난리를 치는데, 무슨 영화 <늑대소년>에 나오는 박보영인가? “기다려” 한 마디만 하면 모든 일이 다 해결되나?
내일(7월13일)은 복날이다.


5편(마지막회) 권영세

1985년께(?) 어느 날 사법고시에 합격한 뒤, 사법연수원 수료를 앞둔 이들 몇 명이 서울지검(?)에 견학차 들렀다.
한 선배 검사가 죽 늘어선 후배들에게 “넌, 어디 나왔냐?”며 물었다. 대학이 아닌, 고등학교를. 대학은 대부분 서울 법대를 나왔을테니, 별반 궁금하지도 않은 것이다. 그 당시, 검찰에 들어오는 이들은 대부분 경기고, 아니면 서울, 경남, 경북고 등이었을 것이다.
그 자리에 권영세가 있었다. 그는 77학번이다. 이른바 ‘58년 개띠’로 더 유명한 77학번부터 고교 평준화 세대였다.
“배재고 졸업했습니다”(권영세)
“너는 열심히 해야 되겠다”(선배 검사)
 
내가 본 권영세는 성실한 노력파다. 평준화만 아니었으면 열심히 공부해 경기고를 갔을 것이다. 그는 어쩌면, 경기고를 갈 수 있었음에도 경기고를 갈 수 없었던 것이 인생의 첫 ‘쓴 맛’, 억울함으로 기억할런지도 모르겠다.

내가 본 권영세는 엘리트주의자다. ‘멍청하고 게으른 사람’을 싫어한다. 또 한편으론 ‘야비하거나 저열한 짓’을 싫어하고, 자존심이 강해 남한테 굽신거리는 것, 역시 싫어한다. 그는 2007년 한나라당의 거의 모든 의원들이 이명박, 아니면 박근혜 둘 중 하나를 택해 줄을 설 때, ‘중립’을 선언했다. ‘정치적 소신’이라기보단, 스타일 때문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그는 그런 자신의 ‘스타일’ 때문에 쓴 맛을 좀 봤다.

2007년 그는 한나라당 대표를 뽑는 전당대회에 소장개혁파인 미래연대의 대표격으로 출마했다. 미래연대 경선에서 임태희, 남경필을 제쳤다. 당시 미래연대는 이명박-박근혜로 양분되는 한나라당 구도에서 ‘개혁’의 기치를 내걸며 나섰다.
강재섭(친박)-이재오(친이) 양강 구도가 권영세가 포함된 3강 구도로 확대되느냐가 전당대회 전 초미의 관심사였다. 8명이 출마했다. 1등을 하면 당 대표가 되고, 5등 안에 들어야 자력으로 최고위원이 된다. 권영세는 6등을 했다. 
강재섭이 1등, 이재오가 2등이었고, 3~5등이 강창희, 정형근, 전여옥이었다. 대의원 득표율 8.37%. 초라한 성적표에 당시 신문들은 ‘소장파의 몰락’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움직임에 대해 당내에서 이를 반대하고, 최병렬 당 대표의 퇴진을 요구하면서, ‘남원정’(남경필, 원희룡, 정병국)을 중심으로 떠올랐던 한나라당 소장파는, 그해 전당대회에서 원희룡을 박근혜에 이은 2위로 밀어올리고, 2005년 서울시장 후보 경선에서 맹형규, 홍준표를 제치고 자신들이 미는 오세훈을 당선시키면서 기세를 떨쳤으나 ‘권영세의 몰락’이라고 불려지던 2007년 7월 전당대회부터 균열이 시작된다. 권영세의 1차 ‘쓴 맛’이었다.

이후, 소장파는 손학규 후보를 지지하기로 했으나, 소장파들은 당선 가능성이 희박한 손학규 지지에 열의가 없었고, 원희룡이 단기필마로 대선 경선 출마를 선언했으나, 김명주 의원 단 1명만이 지지를 표명했다.
임태희, 박형준, 남경필, 정병국 등 소장파 대부분이 ‘이명박 지지’로 다 돌아섰다.
그 와중에 권영세가 중립을 지켰다는 것은 나름, 인정해 줄만하다. 친이계 쪽에서는 권영세가 ‘이명박 지지’를 않는다는 이유로 ‘친박’으로 분류하기도 했다.

대선이 끝나고, 이명박 정부 인수위 시절이던 2008년 1월 어느날, 당시 한나라당에 이어 인수위 현장반장이었던 나는 삼청동 인수위 사무실을 막 나서려던 밤 11시쯤 권영세 선배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그런데 말을 하려다 마는 듯했다. “요즘, 당은 안 챙기냐?”고 묻더니, “이 자식들 말이야, 하는 짓거리가 영...”이라고만 말했는데, 무척 화가 나 있었다.
짐작은 갔다. 당시 4월 총선을 앞두고, 정권을 막 잡은 친이계가 당시 이방호 사무총장이 나서 대대적인 물갈이를 표방하면서 친박계의 학살이 시작됐고, 권영세 의원은 자신이 생각하기에는 ‘친박’도 아니었는데, 도매금으로 몰렸다. 친이계가 작성한 이른바 ‘공천 살생부’ 명단에 권영세의 이름이 올랐다. 
권영세의 두번째 ‘쓴 맛’이었다. 권 의원은 다행히, 그해 공천을 받았다. 강재섭 대표의 공이 컸다.
  
권영세는 이명박 정권 출범 이후에도 대통령인 이명박에게도, 또 미래권력인 박근혜에게도 뚜렷하게 줄을 서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소장쇄신파의 재구축에 나서는 등 개혁의 기치를 높이 들지도 않았다. 거의 유일하게 남았던 쇄신그룹인 남경필, 김성식 등의 손을 굳게 잡지도 않았다. 제3자가 보기에는 ‘중립을 위한 중립’, 또는 ‘그냥 눈치보기’처럼 비칠 법했다.
  
그리고 한나라당이 거의 박근혜계로 넘어갈 무렵이던, 2011년 전당대회에 나섰다. 홍준표가 대표가 됐던 그 전당대회였다.
그때까지 권영세가 뚜렷하게 ‘친박’ 활동을 한 것은 아니지만, 원희룡이 이상득계로 넘어가던 것과 달리, 권영세는 어쨌든 친이계로 넘어가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자신도 모르게 점점 ‘친박’으로 인식되어갔다. 1인2표제인 전당대회를 앞두고 박사모가 ‘유승민-권영세 공개지지’를 선언할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출마자 7명 가운데 권영세는 7등을 했다. 홍준표 대표에 이어 유승민-나경원-원희룡-남경필(여기까지가 최고위원)-박진, 그 다음이 권영세였다. 자존심에 상당한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 권영세의 3번째 ‘쓴 맛’이었다. 
  
개혁파의 대표로 나섰다가 ‘배신’을 경험하고, ‘중립’을 지키다 벼랑 끝까지 몰렸다 살아나고, ‘친박’으로 분류는 되는데, 정작 ‘친박’이 제대로 밀어주지도 않는 상황을 경험했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엘리트주의자가 선택할 방법은 무엇일까?
  
이젠 ‘적극적인, 전면에 나서는 친박’이 되는 길 밖에 없다.  
2012년 새해, 권영세는 사무총장을 맡았고, 곧바로 공천 작업을 주도했다. 그리고 불과 4년 전, ‘공천 살생부’에 올랐던 그가, 당 사무처가 작성한 ‘39명 의원 살생부 명단’ 문건에 대해 해명을 해야하는 위치로 바뀌었다. 4년전 이방호 사무총장의 공천 전횡을 비난했던 권영세였는데, 어느새 별명이 ‘권방호’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4선을 노리던 권영세는 총선에서 MBC 앵커 출신인 신경민(민주)에게 간발의 차로 패하고 만다. 국회의원을 하다 무관이 되면, 사실상 백수다.
대선이 본격화되던 9월 말, 권영세는 새누리당 선대위 총괄선거대책본부 종합상황실장으로 부름을 받는다. 권영세는 그의 성실함을 바탕으로 더욱 가속 페달을 밟을 수 밖에 없다. 

여론조사에서 박근혜를 위협하던 안철수가 야권 후보가 돼 새누리당 표를 잠식할까봐 우려하던 11월 어느날, 권영세는 기자간담회에서 “우리가 파악하기로 안철수 캠프에서 여론조사기관에 돈을 엄청 뿌렸다. 여론조사기관 몇 곳은 장악했다고 판단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또 “문재인 캠프도 그렇게 했다고 봐야지. 그쪽은 노무현 때 해봤으니까”라고 말했다. 언론들이 추가취재에 나서자 6시간 뒤, 그는 “아까 점심때 얘기한 건 그런 소문이 있다는 것”이라고 한발 물러섰다.
‘말실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새누리당의 주특기인 ‘치고 빠지기’, 일단 의혹으로 덮어 씌운 뒤 물러나는, 김빼기 전략을 권영세도 답습한 것으로 본다. 합리성을 따지던 ‘예전의’ 권영세답지 않다. 한편으로 이해는 한다. 권영세는 종합상황실장이다. 진흙탕 싸움인 대선판에서 고고한 척, 우아 떠는 건 ‘박근혜 후보’ 한 명으로 족하다. 현장실장까지 그럴 순 없는 노릇이다. 누군가는 악역을 맡아야 했다. 거기다 상황실장이 손에 오물 안 묻히려고 하면, 대선 이후에도 ‘미래’는 없다.
 
박근혜 정부가 들어선 뒤, ‘국정원 선거개입 댓글’ 사건의 실체가 밝혀지려 할 때,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이 왜 그렇게 안절부절하는 모습을 보이며, 사건의 진상규명보다는 어떻게든 축소·은폐하려고 전전긍긍하며, 급기야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공개라는 마지막 수단까지 끄집어내서 저러는지 잘 이해가 안 됐다.

‘국정원 댓글’로 당시 선거에서 일부 이득은 봤고, 또 그로 인해 ‘정통성 시비’에 휘말릴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 하나만으로 ‘선거 무효’를 주장하기는 현실적으로 힘들다. 또 그건 ‘이명박 정부’의 일이다. 오히려 철저한 수사를 지시해 진상을 드러낸 뒤, 그 다음 남재준 원장을 필두로 국정원 개혁 목소리를 높이면, ‘국정원 선거개입’은 박근혜 정부로선 오히려 ‘정치적 호재’가 될 수도 있는 것인데, 왜 저럴까, 왜 저렇게 히스테리 반응을 보일까 하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그런데 권영세의 ‘까고’ 발언을 접했을 때, 그 수수께끼가 대번에 풀리는 것 같았다. 민주당 박범계 의원이 입수해 폭로한 음성파일을 보면, 권영세는 대선 직전에 “NLL 관련 얘기를 해야 하는데 대화록 자료를 구하는 것은 문제가 아닌데 역풍 가능성 있다. 그건 컨틴전시 플랜(contingency plan·비상계획)이다. ‘도 아니면 모’일 때 아니면 못 간다”, “소스가 청와대 아니면 국정원이니까 대화록 작성한데서 들여다볼 수 있으니 우리가 집권하면 까고” 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때는, 대선 막판, 견고하던 박근혜의 지지율이 흔들리면서 ‘문재인 역전’ 이야기가 점점 높아지던 때였다. 새누리당이 몸이 달았을 때였다.

‘국정원 선거개입’이 ‘이명박 정부 단독범행’이고, 박근혜는 ‘단순 수혜자’일 때는, 비록 이명박 쪽 인사들로부터 배은망덕 소리를 듣더라도, 철저수사를 통한, 박근혜 대통령이 즐겨 쓰는 ‘발본색원’을 통한, 정치적 새출발이 가능하지만, 선거 전에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사전협의’가 있었다면, ‘철저수사’를 하면 안된다. ‘대충 수사’를 해야하는데, 정치적 사건의 경우, 이건 때론 ‘철저수사’보다 더 어렵다.
 
그러니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까고’, 언젠가 정치적 위기 때 써먹으려 했던 ‘4대강 감사’, ‘전두환 자택 압수수색’건도 ‘까서’ 미끼 던져주고, 때마침 ‘귀태’ 발언 해주니 이걸로 또 하루 늦게 한 이틀 흥분하고, 그 다음엔 ‘김현·진선미 국정조사 위원 시비’ 걸고, 이제 그 다음엔 ‘국정조사 증인 시비’ 걸 차례인데, 예상치 않게도 대화록 원본이 행방불명됐다.
새누리당으로서도 다소 어리둥절한 상황이지만, 어쨌든 박근혜 정권으로선 ‘악재’는 아니다. 범인은 ‘노무현 아니면 이명박’인 상황이니까. 이명박-박근혜가 동시에 협의해서 대화록 원본을 빼돌리지 않았다면…. 아마도 청와대에선 ‘아, 하늘에 계신 각하께서 우리 각하를 도우시는구나’라고 생각할런지도 모르겠다.
나라보다 정권이 더 중요한 사람들이 어떻게 나라를 끌고 가는지 너무도 처절하게 겪고 있다. 

(에필로그)
페이스북 글에 에필로그까지 쓴다는 게 좀 우습습니다만…. 어정쩡하게 ‘계사 5적’ 시리즈를 마칩니다.  

사람 사이의 관계를 보자면, 생각이 같거나 사람이 괜찮거나, 둘 중에 하나의 조건만 충족하면 친구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경험칙으로 보자면, ‘나와 생각이 같지만, 사람이 괜찮지 않은 사람’보다는 ‘나와 생각은 달라도, 사람이 괜찮은 사람’을 우린 더 좋아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새누리당 인사, 이명박 정부, 박근혜 정부 인사 가운데는 친한 사람도 많고, 좋아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생각은 다르지만 사람은 괜찮은’ 실무자들도 꽤 있습니다.(있었습니다)

권영세 의원의 경우, 냉정한 성격 탓에 수더분한 인간미는 덜했지만, 이전엔 그래도 나름 ‘합리성’에 근거해 파렴치한 짓거리를 무척 싫어한 점을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권 의원을 처음 봤을 때인 2007년 미래연대 시절의 그 모습, 이미지와 2013년 현재의 모습과 이미지는 너무도 다릅니다. 권영세 의원이 지금 정치를 하는 이유가 뭔지 잘 모르겠습니다. 
 
‘NLL 포기’라며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공개의 근원지인 정문헌 의원의 경우도 비슷합니다. 2008년 이명박 청와대를 처음 출입할 때, 당시 이명박 정부의 한반도 정책 실권자인, 네오콘 김태효 대외전략비서관의 대북 강경책에 대해, 상대적 ‘비둘기파’였던 정문헌 청와대 통일비서관은 그때까지만 해도 김태효 비서관의 강경책을 비판하고, 남북화해를 주장했습니다. 그때는 정문헌 비서관을 만나면 잠시 숨통이 트이는 듯했습니다. 그런데 3년간 워싱턴 특파원으로 갔다 돌아오니, 정문헌 의원은 한반도정책에서 강경 매파 싸움꾼이 되어 있더군요. 1966년생인 정 의원은 그 몇 년 사이 무척 노화가 진행된 듯하고, 무엇보다 인상이 많이 험악해졌습니다.

‘형님’ 문자로 망신을 당한 김재원 의원의 경우, 머리가 명석할 뿐 아니라,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새누리당내의 몇 안 되는 재원입니다. 그가 의원직을 떠나 <불교방송>에서 아침방송을 진행할 때는, 정치부 기자들 사이에선 그 대담 방송을 ‘손석희의 시선집중’ 다음으로 주목하기도 했습니다. 진행도 객관적으로 하려고 무척 애를 썼었고, 차라리 정치를 그만두고, 정치평론가로 나서는 게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나마 상대적으로 나았던 인사들도 왜 새누리당에 오래 몸을 담고 있으면 이렇게 변하나요? 새누리당은 물리면 다 똑같아지는, 무슨 좀비 집단인가요? 이에 대한 원인 분석을 하자면, 또 한바닥을 써야하겠습니다만….  
 
방송인으로 거듭나고 있는 강용석 전 의원이 방송에서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이 공개된 뒤, ‘NLL 포기 발언이 없다면, 의원직을 물러나겠다’고 했던 서상기, 정문헌 의원에 대해 “이 정도면 서상기, 정문헌 의원은 사퇴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강용석 전 의원이 이런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새누리당 바깥에 있기 때문입니다. 새누리당 안에 들어가는 순간, 이런 게 안 보이는지, 보여도 눈을 감는지 알 수 없습니다만...

저는 새누리당 인사들이 가끔 목놓아 ‘애국애족’을 부르짖고, 종종 ‘국기문란’이라는 단어를 쓰며 진보인사들을 비판합니다만, 만일 북한이 적화통일을 할 경우, 북한의 독재체제에 항거해 분연히 일어설 사람들은 새누리당 사람들은 아닐 겁니다.
  
또 하나. 사족이 깁니다만, ‘국정원 정치개입’ 사건과 관련해 이른바 ‘댓글녀’라는 그 29살 국정원 여직원을 생각합니다. 진선미 의원(민주)은 이 댓글녀가 ‘좌익효수’라는 닉네임을 쓰면서 전라도 비하 발언, 11살 여자 어린이에게 성적 비하 글을 올렸다고 주장했고, 국정원은 “그렇지 않다”고 부인했습니다. 사실관계는 아직 명확치 않습니다만, 요즘은 국정원의 말은 거의 증거능력을 상실한 수준이니까, 국정원이 최근 진 의원에 대해 소송을 제기했는데 ‘오피스텔에 달려온 댓글녀의 오빠를 국정원 직원이라고 했다’는 것인데, 사안으로 보면 이보다는 ‘댓글녀=좌익효수 닉네임’이라는 게 훨씬 더 커보이니, 국정원이 이 건에 대해서도 진 의원을 고소해 사실관계를 명확히 정리해 남재준 원장이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국정원의 명예’를 지켜줬으면 합니다.
 
아돌프 오토 아이히만, 2차대전 당시 600만명의 유대인이 희생당한 홀로코스트의 실무 책임자였습니다. 계급은 중령입니다. 아르헨티나에 숨어살다 1961년 붙잡혀 전범 재판으로 넘겨졌는데, 아이히만은 지극히 평범한, 가정적인 가장이었고, 반유대주의자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그는 맡은 바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재판에서 “나는 괴물이 아니다. 나는 오류의 희생자다”라면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충실히 따랐을 뿐이라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국정원 취업할 수 있습니다. ‘댓글 달기’ 조직에 소속돼, 팀장의 지시에 따를 수 있다고 칩시다. 그러나 ‘정도의 문제’가 남습니다. (댓글녀가 ‘좌익 효수’라는 닉네임 당사자라는 것을 전제로 할 때,) 상부의 지시에 따르더라도, ‘해선 안 될 말, 안될 행동’이 있습니다.
취재일선에서 부조리한 상황에 대해 현장에 있는 공무원들에게 이를 언급할 때, 자주 듣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뭘 아나요? 그냥 시키니까 하는거죠”라는.
“시키니까 했다”는, 한국사회에서 주로 ‘법적·도적적 면책’의 주요한 근거로 쓰입니다. 논리가 확장되면, 1980년 광주학살에 참가한 군인들도 “시키니까 했다”, 김근태를 고문한 이근안도 “위에서 시키니까 했다”는 식이 될 수 있습니다.
“시키니까 했다”는 더이상 면책 사유가 되어선 안 됩니다. 사유하지 않은 것, 그것이 죄가 됩니다. 29살이면, 결코 어리지 않습니다.
 
저는 그 ‘댓글녀’가 보수 이념을 가졌거나, 극우파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명문대를 졸업했고, 국정원에 취직할 때까지 그는 열심히 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국정원에서 팀의 일원으로 지시에 충실히 따랐을 것입니다. 좋은 점수, 학점 올리느라 노력했듯이 직장인 국정원에서도 좋은 평가를 얻기 위해 애썼을 것입니다. 
‘무죄’입니까? 저는 ‘유죄’라 생각합니다. 사유하지 않은 죄, 판단하지 않은 죄.

요즘도 그런지 모르겠습니다만, 군에 처음 들어가면 듣게 되는 말이 “판단하지 마”입니다. 이는 그저 ‘시키는대로 해’라는 뜻입니다. 김재규가 10.26을 일으킬 때, 부하직원들 중에는 상황을 전혀 모르고 그날 지시를 받고 그저 따른 정보부 요원 4명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상관의 지시에 그저 따른 죄’ 밖에 없었다고 항변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사형됐습니다.

우리의 교육이 ‘무엇이 옳은 일인가?’에 초점을 맞추기보단, 지금처럼 ‘무엇이 더 좋은 점수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인가?’에 초점을 맞춘다면, 우리는 평범한 사람이 괴물로 변하는 모습을 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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