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dGen's story
영화 오딧세이를 보고 본문
제우스의 법이 무너질 때
영화를 보는 내내 자꾸 미국이 겹쳐 보였다.
《오디세이》에서 가장 자주 반복되는 단어는 '제우스의 법'이다. 낯선 손님이 찾아오면 신분을 묻기 전에 먼저 씻기고 먹이고 재워야 한다는 규칙, 그리스인들이 크세니아(xenia)라 부르며 신 자체가 보증인이 되었던 이 불문율은 사실 그리 대단한 내용이 아니다. 내가 대접받고 싶은 모양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것, 신은 때로 이방인의 초라한 모습으로 찾아온다는 것, 그러니 호의를 악의로 갚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단순한 원칙 하나가 전부다. 그런데 영화 속 인물들은 이 규칙이 깨지는 순간을 세상이 무너지는 신호로 받아들인다. 페넬로페가 구혼자들의 무례함을 참아내면서도 끝내 그들을 내쫓지 못하는 이유, 텔레마코스가 분노하면서도 손을 대지 못하는 이유가 모두 여기에 있다. 그리고 이 암묵적 규칙이 완전히 깨지는 순간, 영화는 문명의 붕괴를 예고하며 막을 내린다.
문명을 지탱하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믿음이다
문명의 발전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흔히 눈에 보이는 것들을 떠올린다. 활자, 증기기관, 인터넷, 백신. 그러나 인류학자와 역사학자들이 반복해서 지적해온 사실이 하나 있다. 대규모 협력을 가능하게 한 결정적 발명품은 기술이 아니라 '공유된 허구'였다는 것이다.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인간이 다른 종과 구별되는 결정적 지점을 '상호주관적 실재'를 만들어내는 능력이라고 설명한다. 국가, 종교, 화폐, 인권 같은 개념은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들은 오직 다수가 동시에 믿을 때만 실재한다. 정치학자 베네딕트 앤더슨이 국민국가를 '상상된 공동체'라 부른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수천만 명이 서로를 같은 국민이라 믿고 세금을 내고 병역을 감수하는 일은, 그 믿음 체계가 살아있는 동안에만 가능하다.
화폐가 가장 극단적인 사례다. 100달러 지폐는 그 자체로는 잉크 묻은 종이 조각에 불과하다. 그것으로 빵을 살 수 있는 이유는 그 종이가 미래에도 가치를 지닐 것이라는, 그리고 상대방도 똑같이 믿을 것이라는 집단적 신뢰 때문이다. 이 신뢰가 흔들리는 순간 우리는 초인플레이션이라는 형태로 문명의 취약함을 목격한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마르크화, 짐바브웨 달러가 그 예다. 기술은 그대로였지만 믿음이 무너지자 경제 자체가 붕괴했다.
국제질서도 일종의 제우스의 법이다
현대 국제사회 역시 성문화되지 않은 규범 위에 서 있다. 유엔헌장이나 조약 몇 장으로 세계 질서가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그 문서들이 실제로 작동하는 이유는 강대국들이 최소한의 규칙—동맹에 대한 신의, 민간인 보호, 인종과 성별에 따른 차별 금지, 약속한 협정의 이행—을 지킬 것이라는 암묵적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국제정치학에서는 이를 '레짐'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본질은 《오디세이》 속 제우스의 법과 다르지 않다. 힘이 있어도 함부로 손님을 해치지 않는 것, 그것을 어기면 신이든 국제사회든 응징한다는 공통의 믿음이 질서를 지탱한다.
그런데 최근 몇 년간 미국의 행보를 지켜보면서 이 불문율이 하나씩 깨지고 있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수십 년간 지속된 우방과의 신뢰 관계가 일방적인 관세와 협정 파기로 흔들리고, 난민과 이민자를 대하는 태도에서 최소한의 인류애가 후퇴하는 장면이 반복되며, 피부색과 성별에 따라 사람을 다르게 대우해서는 안 된다는 전후 합의가 정치적 수사 속에서 노골적으로 도전받고 있다. 개별 사건 하나하나는 사소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오디세이》가 보여주듯, 문명의 붕괴는 거대한 사건 하나가 아니라 작은 불문율들이 하나씩 무시되는 누적된 과정에서 시작된다.
지혜로운 자의 오만
흥미로운 것은 오디세우스 자신이 그리스 신화에서 '지혜'를 상징하는 인물이라는 사실이다. 그런 그조차 자신의 잔꾀로 자기 발목을 잡는 장면이 반복된다. 외눈박이 거인 폴리페모스의 동굴에서 가까스로 탈출한 뒤, 그는 침묵을 지켰다면 무사히 넘어갔을 순간에 굳이 배 위에서 자신의 진짜 이름을 외치며 우쭐댄다. 그 오만함의 대가로 그는 포세이돈의 저주를 받아 10년을 바다 위에서 헤매게 된다. 트로이의 목마 역시 마찬가지다. 선물을 주는 척하며 손님과 주인 사이의 신뢰, 곧 제우스의 법을 정면으로 어기는 계략으로 그는 전쟁에서 승리한다. 그러나 그 승리의 방식이 결국 그리스 문명 전체를 붕괴로 이끄는 씨앗이 된다. 지혜가 잔꾀로 변질되어 눈앞의 승리를 얻는 순간, 더 큰 것을 잃는다는 역설이 오디세우스의 서사 전체를 관통한다.
미국이 당장의 이익을 위해 현대 문명의 토대인 상호 신뢰를 하나씩 허물 때마다, 나는 이 역설이 지금 이 시대에도 반복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관세로 우방을 압박해 단기적 협상 우위를 점하고, 최소한의 인류애를 저버리면서까지 정치적 이익을 챙기는 모습은 트로이의 목마와 닮아 있다. 눈앞의 승리는 얻을지 몰라도, 그 승리를 가능하게 한 신뢰의 기반은 이미 갈라지고 있다.
놀란의 경고
놀란이 하필 지금 이 시점에, 하필 '손님과 주인의 상호 존중'이라는 지극히 사소해 보이는 규칙을 서사의 축으로 삼아 대작을 만든 것이 우연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그는 항상 시간과 붕괴, 그리고 인간이 만든 체계의 취약함을 다뤄온 감독이다. 《오디세이》 역시 표면적으로는 신화의 재현이지만, 그 이면에는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문명의 규범들이 실은 매 순간 지켜내야만 유지되는 약속이라는 경고가 담겨 있는 것은 아닐까.
기술은 계속 발전하고 있다. 그러나 그 기술을 문명이라 부를 수 있게 해주는 것은 결국 우리가 서로에게 지키기로 한 약속, 제우스의 법이다. 그 법이 깨지는 순간, 우리는 페넬로페의 궁전처럼 겉으로는 화려하지만 안으로는 이미 무너지고 있는 세계에 살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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