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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작용이 만들어 낸 두 개의 기형

재도담 2026. 4. 27. 17:19

사회가 오래된 잘못을 바로잡을 때, 종종 그 반작용이 너무 커서 반대쪽 끝으로 튕겨나가는 일이 생긴다.
추가 한쪽으로 과하게 치우치면, 바로잡으려는 힘이 추를 반대편으로 밀어버리는 것처럼. 
그렇게 기형적인 왜곡이 발생했다고 느끼는 두 가지 영역이 있다. 

1. 공권력 

과거 집회와 시위 현장에서 평화로운 시민들을 향해 휘둘러진 물리력은 분명히 비판받아 마땅했다.
그 반성의 결과로 공권력 행사에 대한 감시와 제약이 강화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제약이 대상을 가리지 않는다는데 있다. 
집회 현장의 시민과 흉기를 든 범죄자는 전혀 다른 맥락에 놓여 있다.
전자에 대한 반성이 후자에 대한 대응에까지 영향을 미치면서,
공권력은 정작 힘을 써야 할 곳에서 주저하게 되었다.
폭력 성향이 명백한 범죄자를 제압하는 상황에서도
경찰이 테이저건이나 경찰봉 같은 물리력을 적절히 사용하지 못하고 망설이는 모습은,
역설적으로 시민의 안전을 위협한다.
공권력의 도덕성은 누구에게 사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시민의 정당한 권리를 억압하는 데 쓰이면 폭력이지만,
다른 시민을 위협하는 범죄자를 제압하는 데 쓰이면 의무다.
이 둘을 구별하지 못한 채 전반적인 위축만 남긴 것, 그것이 지금 공권력이 가진 기형의 실체다.

2. 교권 

교실의 문제도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
과거 교사들이 학생에게 가했던 폭력적 체벌은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명백한 범죄 수준이었다. 
(느그 아버지 뭐하시노, 의 시대에 살았던 우리들...) 
그에 대한 반성으로 체벌이 금지되고, 학생의 권리가 강조된 것은 옳은 방향이었다.
그러나 이제 교사에게는 수업을 방해하거나 다른 학생들에게 피해를 주는 학생을 제재할 수 있는 수단이 사실상 없다.
훈육은 권위를 잃었고, 분리 조치는 절차에 막혀 있으며, 학부모 민원은 교사를 소진시킨다.
그 결과 교실 안에서 문제행동을 반복하는 학생은 사실상 무방비 상태로 방치되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같은 공간에 앉아 있는 다른 학생들에게 돌아간다.
체벌이 사라진 것은 옳다.
그러나 체벌을 대체할 실효성 있는 수단도 함께 마련되어야 한다.
그것이 빠진 채로 제약만 남으면서, 교실은 교사도 학생도 보호받지 못하는 공간이 되어버렸다.
보호받아야 할 학생의 권리가, 다른 학생들의 수업권을 침해하는 방패로 오용되는 아이러니가 지금 학교 현장의 현실이다.

두 문제는 표면적으로 달라 보이지만 같은 오류에서 비롯되었다.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는 과정에서, 그 관행의 맥락과 기능까지 함께 지워버린 것이다.
중요한 것은 수단 자체가 아니라 그 수단이 누구를 위해, 어떤 기준으로 사용되는가이다.
경찰의 물리력은 시민을 위협할 때가 아니라 시민을 지킬 때 쓰여야 한다.
교사의 통제권은 학생을 억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교실 공동체 전체를 보호하기 위해 존재해야 한다.
반성은 필요하다.
그러나 반성이 기능 자체를 마비시켜서는 안 된다.
추를 바로잡는 일은, 반대편으로 세게 밀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중심을 다시 찾는 일이어야 한다.